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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경기 남양주 운길산

無碍人 2010. 1. 15. 18:15

2010년1월15일 금요일 영하6도 눈온뒤 맑음 천사랑

 

수도권에서 주말이면 북한산,도봉산,관악산이 산꾼에 막혀 거의 시장같은데

최근 전철개통으로 새롭게 떠 오르고 있는 운길산-적갑산-예봉산코스가 있다.

1호선 전철 용산역이나 회기역에서 중앙선 전철로 환승하면 팔당역다음인

운길산역에서 하차한다. 용산역에서 환승할경우 56분소요되고 시간당

2~3회의 배차간격으로 접근성도 아주좋다.

한북정맥 종주중인데 몸컨디션조절을위해 간단히 몸풀기위해 오늘 운길산

수종사와 한음 이덕형별가가있는 송천마을을 둘러보기로 하고 내기준에서는

늦은시간인 9시부개역을 출발했다.

용산역에서 환승하면 중앙선 전철은 서빙고 한남등 서울 한강변을 지나 덕소를

거쳐 1시간이안돼 호젓한 운길산역에 데려다준다.

중앙선 전철은 2008년도 팔당까지 개통된뒤 지난해 12월 23일 용문까지

연장개통되어 용문산까지 전철로 갈수 있다.

특히 금년중에 원주까지 전철개통예정이어서 곧 치악산도 전철을 이용하여

접근할수 있어 산꾼인 나로써는 쌍수 들어 환영할일이다.

최근 내린 눈으로 등산로는 눈으로 덮여있었으나  많은 산꾼이 다닌듯 어제 내린눈도

모두 다져져있었다.

운길산역에서 진중리마을을 지나면 운길산 등산로로 접근하는데 남양주시에서

예쁜 이정표를 설치해 시까지 걸어두는 세심함으로 시를 감상하는 즐거움까지

더해준다.진중리마을어귀에서 바로 산길로 접어들면 가파른 등산로를 2km

정도 진행하면 수종사 갈림길에 도착하고 곧바로 운길산 정상으로 진행할수

있지만 여기 수종사를 그냥 지나치면 평생 후회하는 일이 생긴다.

수종사는 신라시대부터 있던 절이지만 그 절이 조선 세조때 중창되었으니

양수리 두물머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조망하는데 이보다 더한곳이 없다.

우리산 우리절 많은곳을 다녀보았지만,여주 신륵사,강화 정수사에서나 볼수

있는 아니 그보다 더한 강을 조망하는데는 최고다.(정수사는바다)

수종사에서 800여m오르면 운길산 정상에 이르고 여기서 세재고개를거쳐 적갑산

예봉산으로 종주 할수 있으나,오늘은 절상봉을거쳐 송천리 한음 이덕형 별가터를

둘러보고 하산했다.예봉산으로 종주는 7시간정도 걸리니,컨디션조절을위한 산행이니

이쯤에서 접고,수종사와 한음을 만나는 것으로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산길을 쫒다보면 그냥지나치거나 무시하기 쉬운 역사적인 절이나 현장을 오늘은

여유를 갖고 돌아보았다.

하산하여 운길산역에서 잔치국수 한그릇에 막걸리 한잔으로 요기하고 이른 오후

3시23분 전철로 귀가하니 5시에 부개역도착이다.

 

1. 산행코스

  운길산역-진중리-수종사-운길산-절상봉-송천리 한음별가-운길산역

  (총 7km,3시간30분소요)

 

@교통편

   1호선 용산역,회기역환승 중앙선 전철 운길산역하차

 

2. 산행개념도

 

 

  깔끔하게 새로지어 개통한 운길산역

 

 

 

 

 

  수종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1459년(세조 5) 세조와 관련된 창건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세조가

금강산을 구경하고 수로(水路)로 한강을 따라 환궁하던 도중 양수리(兩水里)에서

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갑자기 종소리가 들려와 기이하게 여겨 다음날 조사해보니 운길산에

고찰(古刹)의 유지(遺址)가 있다고 하여 가보았다. 그 바위굴 속에서 16나한을 발견했으며

굴 속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암벽을 울려 종소리처럼 들린 것임을 알게 되어, 이곳에 돌계단을

쌓고 절을 지어 수종사라고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절에는 현재 1439년(세종 21)에

세워진 정의옹주(貞懿翁主)의 부도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창건은 그 이전이며 세조연간에

크게 중창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뒤 조선 말기에 고종이 풍계(楓溪 : 楓漢)에게 비용을

하사하여 중창하게 했고, 1939년에는 태욱(泰旭)이 중수했으며 6·25전쟁 때 소실된

것을 1974년에 주지 장혜광(張慧光)이 대웅보전 등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 당우로는 대웅보전·나한전·약사전·경학원·요사채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수종사부도내유물(보물 제259호)이 있고, 조선시대 금동불감(金銅佛龕)과 금동불·보살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된 수종사다보탑(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2호)이 있다.

 수종사부도

  운길산에 자리한 수종사는 1458년에 왕명에 의해 중창된 사찰이다.

  이곳에는 팔각오층석탑과 팔각원당형 부도가 남아 있는데, 석탑에서 나온 15구의

  조선시대 금동불상 및 불감과 부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청자호 및 도금은제육각감

 (보물 제259호)은 현재 국립중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도는 팔각원당형으로 상륜부는 보주, 보륜, 복발로 구성되었으며 탑신부는 간략화

  시킨 노반 아래 팔각옥개석, 원당으로 형성되었고 기단부는 팔각의 상대석과 하대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게 변형된 원당 표면에는 한마리의 용이 고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부도의 기단부는 상, 중, 하대석으로 구성되는데 이 부도는 간략한 2개의

  석재로 상, 하대석만 마련한 것이 특이하다.

  이와 같은 형태의 부도는 인근지역에 있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무학 대사 부도와 유사하다.

  수종사 오층석탑 

이 탑은 팔각오층석탑(八角五層石塔)으로서 기단부(基壇部)의 연꽃(蓮華)과
안상문양(眼象紋樣)이 화려하여 탑신부(塔身部)의 8각(八角) 모서리주형(柱形)이
사실적이어서 주목된다. 옥개석(屋蓋石)받침도 3단(三段)씩 정연하고, 상륜(相輪)도
단아하며 조선(朝鮮) 세조(世祖) 5년(1459)에 건립된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대표적인 석탑이다. 세조가 등극후 양수강(兩水江)에서 경야중(經夜中) 갑자기 들려오는
종소리를 따라 이 운길산(雲吉山)을 답사하다 암굴(岩窟)에 열좌(列坐)된 18나한(十八羅漢)을
발견하고 8도(八道) 방백(方伯)에게 명하여 사찰을 창건케 하고 동시에 나한을 봉안하기 위하여
산 중턱에 조성(造成)한 석탑이라고 전한다. 1962년에 관리 관계로 현 위치로 이전할 때
각 탑신에서 불상(佛像), 보살상(菩薩像) 등 18점의 유물(遺物)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國立中央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수종사 대웅전앞에서 내려다본 두물머리

  수종사 이동수단 도르레

  예봉산

 

  운길산(610m)

  구름이 가다가 산에 걸려서 멈춘다고 하여 운길산이라한다.

  강원도 금강산에서 발원하여 화천,춘천을거쳐 약 371km를 흘러 내려온

  북한강물과 대덕산에서 발원하여 영월.충주를 거쳐 흘러내려온 남한강물이

  서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수가 모두 수려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운길산정상에서 본 세재고개의 글자같은 산(山)

  절상봉에서본 운길산정상

  절상봉(522m)

 

  한음이덕형 별가터

  한음 이덕형

자는 명보이고, 호는 한음∙쌍송이며, 시호는 문익이다. 어릴 때에 오성 이항복과 친하게

지내며 많은 일화를 남겨 '오성과 한음'이라는 이야기로 전해 오고 있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글씨와 문학에도 뛰어났다. 1580년에 문과 시험에 급제하여

박사, 수찬 등의 벼슬을 지내다가 부수찬·정언·부교리를 거쳐 이조 좌랑이 되었다.

1588년 이조 정랑으로서 일본 사신 겐소[玄蘇]∙다이라[平義智] 등을 접대하여 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다. 동부승지·부제학·대사간 등을 지내고 1591년 예조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 사신과 담판을 지으려 했으나 교섭하지 못하고

실패하였다. 곧 왕을 모시고 정주까지 피란시키고, 명나라로 가서 병력 지원을 요청하여 뜻을

이루었다. 이어 한성판윤에 올라 명나라 장수 이여송의 접반관(외국 사신이나 관리를 접대하는 관직)

으로 그와 행동을 같이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명나라 어사 양호를 설득하여 서울을 방어하게 했다. 

1598년에 우의정에 올랐고, 이어 좌의정을 지냈다. 이어 명나라 유정 제독과 함께

순천에서 이순신과 합동으로 적장 고니시[小西行長]의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1601년에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조선 시대에 전쟁이 일어났을 때

군무를 맡아보던 최고의 군직)가 되어 전쟁으로 황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바로잡았다. 

군사를 정비하는 일에 노력하였으며, 이듬해에 영의정에 올랐다. 1613년(광해군 5년) 이이첨 등이 

중심이 되어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들고 나오자, 이에 반대하다가 벼슬을 빼앗겼고 이후

지방으로 내려가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한음문고》 등이 있다.

  송천리에서본 운길산(왼쪽) 뾰족한게 절상봉

  진중리 생태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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