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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남한산성

無碍人 2010. 12. 8. 06:58

2010년 12월5일 일요일 흐림 친구부부 15명

 

정축년 1월1일(1636년) 인조임금은 남한산성에서 스러져가는 명의 하늘을향해 춤을추고 있었다.

성밖 망월봉에선 적국의 군왕이 포탄을 조준하고 그 의식을 지켜보고있었다.

신년하례라기 보다는 진혼식이라고 해야할까?

왜? 명을 섬기느냐,청을 섬기느냐하는 명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기에 도성을버리고 백성을 적국에 넘겨주고 독안에 든쥐 신세를

자청해서....척화와 화의를 주장하는 군신들 틈에서 인조는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전두환일당은 광주에서 피맛을보고 남한산성아래 마천동 그부대에서 유사시 적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띈 특수부대를 사병화하기위해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난 공수훈련을 받기위해 피교육생 신분으로 마천동에서 처음 남한산성을 만났다.

거기에서 난 일주일동안 대기병 신분으로 교련복에 청바지를입은 저들 말에의하면 광주폭도였다.

그들이 퍼붓는 최루탄과 몽둥이 세례를 수도없이 받으며 그들의 최루탄 받이였다.

 

병자년(1636년) 12월4일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쓰다가 청의 용골대부대가 들어오자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준비도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이 성에서 47일동안 척화냐,화의냐를 놓고 끊임업이 갈팡질팔하다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다.

불과 수년전에 있었던 정묘호란의 교훈을 잊고 백성들을  진흙밭에 엎드려 울게 한것이다.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번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자초했으니 우리 역사에서 이런 치욕은 ???

조선의 3대치욕이있으니 임진왜란,경술국치 그리고 삼전도 굴욕  그리고 오늘날 연평도 치욕을 더할까?

 

최루탄과 몽둥이 세례를 받아도 국방부 시계는 잘도간다.

3주간의 공수지상훈련은 지옥 훈련이다.

눈 뜨면 달리고 구르고 넘어지고 뛰어내리고 ....PT체조로 시작하여 PT로 끊나는 일과다.

운동신경이 그리 안좋은 나는 하네스에 끌려가며 벌떡 일어나는 훈련에서는 고문관 직전까지 갔고, 11m 막타워 타기에서는 남들이 5~6번에

합격하는것을 10여번 넘게 뛰고 양목덜미가 터지길 수차례(물론 70여번만에 합격한 동기도 있지만)...

그 마지막 지상훈련이 끊나는 그주 일요일, 낙하훈련전에 주어지는 면회일에 난 언덕위의 하얀집(면회실)에서 기름에 빠진 닭 한마리놓고

고무신으로부터 안녕을 통보받았다.

이게 두번째 남한산성과의 만남이다.

 

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은 "왕조가 쓰러지고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 위로할수 있습니다"인조에게 고했다.

척화를 주장하던 군신들은 최명길을 처단하라고 일제히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척화를 주장하던 그들도 "싸우자고 준열한 언동을 하는자들도 내심 최명길 대감을 믿고,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역적이 성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겠소"라고 수어장 이시백이 일갈했던 것처럼 준비없는 척화가 얼마나 무기력한가를 보여주고있다.

결국, 인조는 서문을 걸어나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니 5000년 역사에 이런 치욕은 없었다.

그리고 청의 요구로 "대청황제 공덕비" 세우라 하여 그 비문을 쓰는데도 누가 그일을 할건지..

칭병하는자..스스로 목숨을 끊은자...일부러 채택안돼게 글을쓴자...이 모두 자기 가문과 자신의 체면만을....

결국은  부제학 이경석이 비문을 쓰고 평생을 글 배운것을 후회하며 살았다니...그래도 그의 용기는 기억해야 할진데..

 

낙하훈련은 재미있었다.

생전 처음타본 비행기 그게 군용기지만...

처음 성남 비행장을 이룩하던 순간 생생하다. 들판에는 가을이 무르익어 황금 들판이고 활주로를 이룩하는 순간까지도 내릴수있다는 가냘픈

희망을 가져보지만 이내 체념하고 조교의 "애인있습니까?" 물음에 당당히 "없습니다"

아 ~나도 막타워 훈련시까지만도 "있습니다"였는데 "애인 이름 세번??"조교의 말은 없었다.난 그저 "어머니~~"를외치고 창공을 박차고 올랐다.

낙하산이 펴지고 가을하늘이 연두색으로 밝아오며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슴푸레 남한산성 그림자가 한강에 비추고 ...이게 세번째 남한산성과의 만남이다.

 

수어장 이시백은 "수어장은 척화요?화의요?"하는 최명길의 물음에

"난 수문을 지키는 초병일 뿐이요.내가 할일은 저수문을 지키는것뿐이요"라고 했다.

햇볕정책이니 대북 강경책이니 하는것은 위정자들의 정책이다.

어느것을 택하든 5년동안 정권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부가 선택해야 할일이지만 오늘날 우리 군은 과연 이시백같은 군인이 있는가

항복하는 순간까지 (항복도 위정자의 선택) 그는 난세에도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

했볕이든 강경이든 군인은 군인일뿐 자기자리에서 자기 임무에 충실하면 되는데 우리는 천암함에서,연평도에서 실망스런 군인만보고있다.

준비없는 대북강경이 ..계산안된 맹목적인 친미가... 우리민족을  어디로 몰고가고있는지 47일간의 남한산성치욕의 역사에서 배워야한다.

 

낙하훈련이 끊나고 후반기 교육은 본격적인 적 침투훈련이다.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주요시설을 폭파하고 요인을 납치 암살하는 기술... 훈련은 남한산성이 본 무대다.

자기 전공별 훈련을마치고, 종합훈련에 들어가면 낮에는 남한산에서 숙영하고 밤에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인근 용인, 하남,광주등을

야간에 이동하며 하는 훈련,이게 본격적으로 나와 남한산성과 만남인 네번째 만남이다.

 

그래도 인조에게는 척화를 주장하면서 목숨을 내놓은 충신이있었다.

김상헌이 그였고 윤집,오달제,홍익한이 있었다.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론자로 청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선비의 기개를 지켰고, 윤집,오달제는 스스로 척화론자라하여 자진 볼모가돼 심양

서문밖에서 처형됐으며,홍익한역시 청에 잡혀가 처형됐다.

이시백은 문신으로써 남한산성 수어장이되어 인조곁에있었다.

화의를 주장했지만 최명길은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지 언정 민족과 백성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 충신이다.

이정부에 과연 이들같은 참모와 군인이있는지....

혹 중국작가 뤼순의 책 아Q정전에 나오는 아Q만 있는것 아닌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빰을 때리고 때린것은 자기고 맞은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나와 남한산성의  다섯번째 만남은 개구리복을 입고였다.

내내 이해가 안됐던 고무신의 안녕통보를 궁금해하던 그때, 그도시 어딘가에 살고있던 고무신을 산성카페에서  잠깐...

그랬다 그녀는 벌써 두아이 엄마였다.

그랬구나 차라리 안심이였다. 약간은 지쳐보였지만 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던가...그리고 어언 30년 가까이 지나...

오늘 친구들과 그산성에 왔다. 내옆에는 그녀보다 천배는 이쁜 천사가있고...ㅋㅋ

 

1. 산행코스

   산성역-수어장대-청량당-서문-북문-장경사-동문-남문(약10km, 4시간)

 

2. 산행경로

   수도권1호선 신도림2호선환승

   잠실에서 8호선환승 산성역하차

   산성역-수어장대-청량당-서문-북문-장경사-동문-장수촌 닭도가니 점심-남문-남문매표소-남한산성입구역

 

@. 교통편

    5호선 마천역

    8호선 산성역,남한산성입구역

 

3. 산행개념도

 

 영춘정(팔각정)

 

 남한산성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일명 일장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록은 없으나 조선『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문루와 장대·돈대·보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수어장대

조선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들어진 4개의 장대 중 하나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잡고 있어서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이곳은 병자호란(1636) 때 인조(재위 1623∼1649)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하여 싸운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에 이기진이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빼앗으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규모는 1층은 앞면 5칸·옆면 3칸이고 2층은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2층 4면의 바깥기둥은 1층의 높은 기둥이 연장되어서 이루어진 것이다.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가장 화려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금 있는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고쳐 세운 것으로 인조 2년(1624)에 지은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중요한 건물이다

 

 

 

 

 

 

 

 

 

 

  서문(우익문)

 인조가 이문을나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치뤘다.

 

 

 

 

 

 

 

 

 

  닭살커풀 일등입니다.

 

 

 

 

 장경사

남한산성 안에 있는 절이다.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더불어 도성(서울)을 지키던 산성으로 장경사는 남한산성을 지을 당시인 조선 인조 16년(1638)에 세웠다. 전

국8도의 승려들을 모집하여 산성 짓는 것을 도왔는데, 이때 승군(僧軍)들이 훈련을 받으며 머무르던 9개의 절 중 지금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절이다.
절에 있는 건물로는 대웅전, 진남루, 칠성각, 대방, 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조선시대 승병들이 나라를 위해 활동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예가 되고 있다.

 

 

 담엔 일붕이 엄마 안오면 일붕이라도 데불고와라

 

 

 동문

 

 

 

 

 

 

 

 

 

 

 

 

  동화 사람이한다는 장수촌 닭도가니 맛 괜찮아요.

  

  남문

 

  백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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