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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사람들..잊혀진 등산로..(지리산/중산리-천왕봉-중봉-써리봉-치밭목대피소-대원사)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잊혀진 사람들..잊혀진 등산로..(지리산/중산리-천왕봉-중봉-써리봉-치밭목대피소-대원사)

無碍人 2020. 8. 26. 13:07

2020년 8월 23일 일요일 구름 다소 절친(병선, 환춘, 석기)

 

펜데믹(pandemic), 언텍트(untact) 시대다.

대유행, 비대면

수도권에 연일 300명 이상의 확진자가 나오고 있다.

주말에 출발하는 산악회 모든 산행일정이 취소됐다.

중산리행 주말 노선버스도 매진까지 갔다가 6명 탑승

확실한 untact가 가능해졌다.

중산리 아침 이렇게 조용한 적이 있었나 싶다.

10여 명이 산행 시작이다.

사람 만날 일도 사람과 교행 할 일도 없다.

서울서 출발한 병선 환춘과 대구서 합류한 석기 친구랑 익숙한 어둠에 몸을 맡긴다.

 

방문 밖 상제가 아까부터 장작을 팬다고 뚝딱 거리고 있다.

오후 3시경이나 되었을 까? 상제가 호랑이를 보고 소리친다.

"와 크다. 송아지만 하다."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어 겨우 드나드는 자그마한 문을(줄을 달아 여닫는 문) 왈칵 열고 내다보았다.

정말로 말로만 듣던 호랑이가 대웅전(서까래만 세워 둔 곳) 앞을 어슬렁어슬렁 지나고 있지 않는가?

자세히 볼 요령으로 양말만 신은발로 마당에 내려섰다.

굉장히 컸다.

대웅전 앞을 유유히 지나 삼층석탑 바위를 지나고 있었다.

마당이라야 폭 3~4m, 길이 5m 정도인데 사람이 소리를 지르던 말든

산중 왕답게 자세를 흐트러지지도 않고 앞만 보고 걸어갈 따름이다.

 

       -   중    략  -

 

그때 "이놈 상제야 냉큼 들어오너라" 벼락 같은 불호령이 떨어졌다.

항상 조용하시기만 했던 손보살이 대노를 했다.

어디서 이런 헛소리가 나는가?

머쓱해진 우리도 상제를 따라 방으로 들어섰다.

"이놈 상제야 우리 산신령을 보고 호랑이가 무엇이냐?"

준엄한 꾸지람이 있었다.

상제가 나가고 나니 손보살은 예전의 손보살로 돌아와 있었다.

 

1959년도 법계사 초막에 유숙했던 어느 산님의 산행기다.

이때만 해도 법계사에 호랑이가 거닐고 있다는게 생경하지만 오늘 내가 주목하는것은

호랑이가 아니라 손보살 즉 한청화 보살이다.

법계사는 1908년 의병의 근거지 였다는 이유로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1938년 신덕순(申德順) 보살이 사찰을 복구했다.

그러나 1948년 10월19일 여순병란의 격전 속에 다시 붙태워졌다.
1948년 소실된 법계사는 그로부터 10년 동안 폐허로 방치돼 오다 지리산 입산통제가 풀리자

가까운 곡점부락(경남 산청군 시천면)의 독실한 불자가 초막부터 세웠다.

한청화 보살(본명 손경순)이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법당 복구에 전념, 10년 동안에 걸쳐 불사를 벌인 끝에 법당의 뼈대를 세우고 서까래까지 얹었으나,

재력이 달려 기와도 올리지 못한 채 비에 젖게 버려두었다가 그만 허물어지고 말았다.

전쟁후 1957년이 되어서야 지리산 입산 금지가 풀렸다.

이때만 해도 아직 지리산엔 망실공비라 불리는 빨치산이 존재 할때다.

그시절 지리산 산행은 아무나 하던 여가는 아니였다.

지금처럼 여행이나 산행이 대중화 되지 못했으니 당연 재력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 이였다.

대학교수, 의사, 변호사등 재력을 갖춘 사람들이 하는 여가 놀이였다.

지리산을 오르는 것도 지금과 같은 노고단 부터 천왕봉이 아니라 천왕봉을 중심으로 세석.장터목을 거쳐

오르는게 전부였다.

그때 지리산에서 그 등산객들의 안전을 책임지고 길라 잡이를 한 이들이 있었다.

1957년 개방,1967년 국립공원 1호지정,1971년 8개 대피소 완공

대피소도 없던 초기 지리산 산행은 무모하기 까지 했다.

그때 지리산엔 이인(異人)들이 있었으니 법계사 초막에 한청화 보살(손보살), 세석에 '지리산 산실령'

으로 불리던 우천(宇天) 허만수,천왕봉 토굴속 김순룡 노인

이들은 초기 지리산 산행의 안전을 책임지고 길동무, 말벗이 되어 주던 사람들이다.

우천 허만수

초기 지리산 등산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고 산 지킴이 역할을 자처 했던 진정한 지리산인 이였다.

1975년 9월 그가 지리산에서 홀연히 사라지기 1년전

아마 나는 그를  세석 산장에서 마주한적이 있다.

그땐 그분이 우천 허만수인지 몰랐다.

장비같은 검은 수염, 깡마른 체구, 어딘가 풍기는 도인 같은 풍모, 기억은 가물가물 하지만

창고형 그 세석 산장에서 지금 같은 삼행시는 아니지만 운을 띄우면 글을 짓는 그런 놀이를 했던 기억이 있다.

이글을 쓰기 위해 그를 조사하다 '아~ 그분!' 하는 생각이 난다.

우천 허만수, 김순룡 노인, 손보살

이 세분은 서로 낯돌리고 남처럼 지내진 않은걸로 여러 기록에 나타난다.

거리상으로는 꽤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협력체제로 함께 지냈다.

손보살이 법계사 초막을 비울때 허우천이 지켜주고,천왕봉 김노인, 또한 법계사 초막에 종종 묵기도 했다.

초기 지리산에 이분들이 지리산을 찾는 이들의 안전을 책임졌다면

1971년 지리산에 대피소가 생기기 전후에서 많은 지리산 이인들이 존재 했다.

지리산 대피소라고 해서 지금 같은 그런 시설은 아니다.

노고단 대피소, 세석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를 1974,75,76년 경 직접 방문 했지만

모두 창고형으로 출입문과 통풍을 위한 창문이 있을 뿐 반은 마루이거나 아니면

온전히 맨흙으로 맨땅에 건물만 올려져 있었다.

바람이 불면 출입문이 덜컹거리고 늑대 울음이 아기울음 처럼 들렸다.

노고단과 피아골 산장의 지리산 호랑이 고 함태식 선생,연하천 털보라 불리던 김병관,

치밭목 산장지기 민병태등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에 살던 2기 위탁 산장을 운영하던 지리산인이 있다.

산꾼이라면 산장지기의 로망을 한번쯤 품어 봤을 그 사람들...

그런데 그분들이 이제 잊혀지고 있다.

아니 잊혀진게 아니라 지워지고 있다.

중산리 법계교 건너에 있던 우천 허만수 기념비도 뽑히고 없다.

어디로 옮겼는지 아무도 모른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운영체제로 바뀌면서 관리는 혁신 되었지만 추억과 정이 사라졌다.

지식인에 물어 봤는데 아는 답이 없다.

그를 기억 하는 사람도 떠나고 추억하는 사람도 떠났다.

치밭목 대피소에서 민병태를 기리는 기림비를 발견 했다.

소박하게 대피소 쉼터 옆에 있는 비

더는 뽑히는 일 없이 보존했음 좋겠다.

 

중산리 천왕봉 오름은 열손가락 넘게 왔다.

다만 서울에서 언제나 심야 버스로 이동하다 보니 늘 어둠속 오름이였다.

칼바위, 망바위는 늘 어둠에서 만났다.

언제 밝은날 한번 보는게 꿈이되고 있다.

중봉-치밭목-대원사

지리산 산꾼들에게 잊혀진 등산로다.

지역 산꾼들이나 오르는 등산로로 수도권이나 타지역 산꾼들에게 잊혀지고 있다.

나 역시 45년 넘게 지리산을 찾고 있지만 처음이다.

교통이 불편 하던 시절엔 남원까지 밤 기차로 백무동 하동바위로 올라 한신으로 하산하거나

한신으로 올라 하동바위로 하산하는 천왕봉 오르기 산행이 전부였다.

오늘 중봉에선 천왕봉을 보여 줄듯 말듯 운무가 장관이다.

잔뜩 기대했던 황금능선..달뜨기 능선은 운무에 가리고...

천왕봉,중봉,하봉,새재,외고개,밤머리재,웅석봉을 지리산 동부능선이라 한다.

황금 능선은 지리산 동부능선의 가지 능선으로

중봉,써리봉,국사봉,구곡산으로 이어지는 구곡능을 황금능선이라 한다.

내원골과 장당골 두 계곡 사이에 있는 능선이다.

오늘 산행코스는 동부능선, 황금능선 써리봉에서 치밭목 대피소,유평계곡,대원사다,

무제치 폭포에서 발원한 물은 장당골로 흘러 내원사에서 내원골에서 내려온 물과 합수한다.

이 합수점이 황금능선의 시작점이다

아쉽게도 이능선은 현재 비지정탐방로로 일부구간만 산행이 가능하다.

황금능선은 내원골이 생가인 마지막 빨치산,18세여자 빨치산,문맹빨치산의 수식어가 있는 정순덕 여인의 생가다.

정순덕 여자 빨치산

전쟁은 모든 사람의 인생을 피폐하게 하고 파괴한다.

한국전쟁이 이를 격어낸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파괴 했는지 여실히 증명 해주는 사람이 정순덕이다.

그의 인생을 판타지화 하거나 일부 NL 계통의 진보진영에서 영웅화 하려는 것에 동조 하려 그녀를 언급하는게 아니다.

정순덕은 전쟁이 어떻게 사람을 파괴 하는지 여실히 보여준 삶을 살았다.

자신이 그 삶을 어떻게 바라봤는지 그건 알길 없지만...

한국전쟁 반발 1개월전 인근 남자와 결혼한 18세 정순덕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입하나 줄이려 결혼한 여인

전쟁반발후 남편은 부역자가 돼 인천상륙작전후 패잔병 따라 지리산에 들어가고..다시 들어온

국군과 경찰은 부역자인 남편을 찾아 내라고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못살게했다.

공산주의가 뭔지 이념이 뭔지 문맹의 정순덕에겐 이를 생각할 겨를도없이 남편 찾아 지리산에 들고

그렇게 비무장 빨치산,무장 빨치산,망실공비,비전향장기수(전향서를 쓰긴함)

18세에 빨치산이돼 그녀가 체포될때 30세

그 13년동안 한인간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그의 삶이 보여준다.

전쟁 끝나고도 10년동안 지리산 일대 주민들의 공포 대상이 됐던 망실공비

18세 새댁이 어떻게 그렇게 됐는지...

30세도 안된  젊은 아낙이 절도,강도,살인(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전쟁이 원래 그런거라면)을 하며

자수를 권하는 가족을 외면하고 13년을 산에서 살았는지...무엇이 그녀를 투사로 만들었는지

아무도 그녀에게 손가락질 할 수 없지만, 누구도 그녀를 유관순과 같은 의혈녀이거나 학정에 항거한

가여운 여인으로 영웅화 해서도 안된다.

분명한건 20세기를 살아간 수많은 불행한 여인중 특히 불행한 여인이였다.(실록 정순덕 참고)

 

오늘 무제치 폭포는 물이 별로다.

53일간 긴 장마였는데 이 계곡은 갈수기다.

등로를 자세히 살펴보니 비온 흔적이 별로 없다.

비가 왔다면 소나기 한번으로도 등로의 갈잎이 쓸려 내려 갈텐데...

유평마을까지 장터목으로 하산한 친구 석기가 픽업해줘 유평부터 대원사 입구까지 포장도로를

걷는 수고를 덜었다.

함양의 어느 마을 냇가에서 알탕은 못해도 물놀이 호사를 누리며 동심으로 돌아갔다.

함께해준 석기 친구 고맙고 김치찌게, 민물고기 조림, 두릅장아찌, 찰밥 너무 맛났다.

천사님께 꼭 감사를 전해주길...

 

1. 산행코스

   중산리-법계사-천왕봉-중봉-서래봉-치밭목대피소-무제치폭포-유평마을-대원사

   (18.5km, 10시간10분)

 

@. 교통편

   남부터미널-중산리 주말심야버스

   함양-동서울

   대원사-함양 석기친구 픽업

 

2. 산경표

법계교 건너 우천허만수 기린비가 뽑혔다.
칼바위

 

 

망바위

 

 

무제치폭포

 

무제치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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