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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둘레길 8,9 코스(운리-덕산-위태)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지리산 둘레길(完)

지리산 둘레길 8,9 코스(운리-덕산-위태)

無碍人 2021. 9. 29. 13:09

2021년 9월 26일 일요일 맑음 석기, 기수, 환춘, 병선

 

운리에서 원정 마을로 이어지는 임도는 이제 막 초록의 빛에서 연두로 색을 갈아입기 시작한 감들이 길손을 맞는다.

연둣빛이 점점 짙어져 분홍으로 분홍이 붉은 홍시가 될 때쯤 감잎은 소명을 다하고 보살핌을 거두어 드릴 게다.

길가에 잘 익은 알밤이 여명 전인데도 허리를 굽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한다.

가능한 농장이나 농가 주변의 밤은 줍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내 안의 물욕이 스믈스믈...

'밤은 이미 추수가 끝났어'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합리화한다.

어느새 몇 번의 오름과 굽이를 돌아 참나무 군락지에 이른다.

도토리가 지천 일 거라는 예상은 완전히 빛나갔다.

도토리가 없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은 생존이다.

가뭄이나 자연재해가 심해지면 열매를 맺는 나무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도시의 가로수로 심어진 은행나무를 보라

원래 식생은 열매를 맺지 않는 수 나무 위주로 심었는데 척박한 환경이 나무에게 종족 보존의 본능을 일깨웠다.

해마다 열심히 열매를 맺는 은행나무를 보면 측은하고 안쓰럽다.

그런데 이곳의 참나무는 환경이 좋은 탓인지 전혀 그렇지 않다.

이곳 참나무는 좋은 환경에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으니 전혀 종족보존 의지가 없어 보인다.

인간도 그런 것 아닐까?

유사 이래 이렇게 풍요로웠던 적이 있었을까?

아이를 안 낳는 건 키우기 힘들어서가 아니고 아이 낳는 일 말고 더 재미난  일이 많기 때문이다.

10m가 넘는 훤칠한 참나무 숲과 인간세상의 풍요로움의 상징 빌딩 숲이 묘하게 오버랩된다.

 

백운계곡을 건너며 처사 남명 조식을 생각한다.

조선의 많은 선비들 중의 선비...

그는 처음부터 벼슬에 나가려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가 단성소(丹城疏)에서 밝혔듯 세 번의 과거 시험에 낙방했다.

젊어서 세웠던 꿈을 접었던 평범한 우리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의 기개와 지조 그리고 학식과 덕망은 가히 유사 이래 최고였다.

난 그래서 선비 아니 처사 남명이 좋다.

단성소를 처음 접했을 때 그 떨림이 아직도 그대로다.

산천재를 지나며 그의 어떤 시보다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올렸던 단성소를 다시...

(단성소 전문을 이글 뒤에 붙여놓는다.

남명 조식의 됨됨은 이문장이면 된다)

산천재를 지나, 대원사 계곡에서 흘러온 물이 원리교에서 덕천강의 몸집을 불리고, 중산리 계곡의

물이 합류하는 천평교를 건너면 유턴(U)하듯 다시 덕천강을 되돌아간다.

덕천강을 중심으로 강 이쪽저쪽 들판을 냇가에 위치한 들녘이라 천평(川坪)이다.

풍수에서 명당을 가리키는 금환락지(金環落地)로 꼽힌다.

남명이 두물머리를 보고 읊은 시 한수, 시비로 남아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듸오 나난 옌가 하노라

 

덕천강과 헤어지면 한때 닥종이 생산지였던 중태 마을이다.

지금은 닥나무 대신 감나무 생산지로 바뀌었다.

중태 마을은 동학혁명과 한국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다

동학혁명의 마지막 녹두꽃이 떨어졌던 곳 중 하나로 우금치에서 패한 동학군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으로 주검이 계곡을 메웠다.

한국 전쟁 당시는 마을로 내려온 빨치산과 군경의 전투로 또 한 번 주검이 계곡을 메웠던 슬픈 원혼의 땅이다.

중태 마을에서 1시간여 시멘트 임도 따라 오르면 갈티재 직전 유점 마을이다.

예전에 유기(놋그릇)를 만들던 마을이라 한다.

제7일 안식일 교인들이 모여 사는 곳인지 교회 건물이 마을회관처럼 마을을 대표한다.

마을 뒤로 깔끄막을 오르면 대나무 숲이 아름답다.

정상엔 아름드리 서어나무 몇 그루가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고 쉼터 의자가 초가을 정취와 어울린다.

이곳이 갈티재(갈퇴재)라 불리는 산청과 하동의 분수령이다.

덕산 사람들은 소금이나 비료를 구하려 고개를 넘고, 하동 사람들은 덕산장을 보기 위해 고개를 넘었다.

덕산 사람들은 중태재 하동 사람들은 위태재라 부른다.

갈티재를 내려 서면 완전히 식생이 바뀐다.

덕산 쪽 대나무가 솜대라면 하동 쪽 대나무는 왕대다.

키 큰 왕대 숲이 중국 무협영화를 찍었음직하게 장대하다.

어디선가 주윤발과 장쯔이가 야호 하고 나타날 것만 같다.

왕대숲 켜켜이 소나무 몇 그루가 대나무와 키재기를 하고 있다.

키 큰 대숲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지를 버리고 하늘로 하늘로....

대나무처럼 자란다.

대나무가 폭설에 누울지 언정 꺾이지 않겠다고 지조를 자랑하니 소나무가 가지가 부러져도 푸르름을 잃지

않겠다고 버티는 장면이 연상된다.

대나무 세상에 소나무가 푸르름의 지조를 지켜내기를 바란다.

 

1. 탐방 경로

   운리마을

   백운계곡

   마근담 입구

   산천재

   덕천강

   원리교

   천평교

   중태 마을

   유점마을

   갈티재

   위태 마을

   (24km, 8시간)

 

@. 교통편

   센트럴시티-남원

   남원-위태(택시 이용 기수 차 병원)

   산청-남부터미널

 

- 丹 城 疏 (乙卯捨職疏)-

 

삼가 생각하건대, 선왕(先王)께서 신(臣)의 변변치 못함을 모르시고 처음에 참봉(參奉)에 제수(除授)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왕위를 계승(繼承)하심에 미쳐서는 두 번씩이나 주부(主簿)에 제 수하 시었고,

이번에는 또 현감(縣監)에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함이 산을 짊어진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오히려 한번 대궐(大闕)에 나아가서 천은(天恩)에 사례(謝禮) 하지 못하는 것은,

임금이 인재(人才)를 취하는 것은, 장인(匠人)이 심산 대택(深山大澤)을 두루 살펴 재목이 될 만한 나무를

빠뜨리지 않고 다 취하여다가 큰집을 짓는 것과 같아, 대장(大匠)이 나무를 구(求)하는 것이고 나무가

자발적(自發的)으로 쓰임에 참여(參與)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인재를 취하는 것은 임금 된 책임이고 신이 염려할 바가 아니므로 그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은혜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머뭇거리면서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은 마침내 측석(側席) 밑에서 감히 주달(奏達)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臣)이 나아가기 어렵게 여기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지금 신의 나이가 60에 가까왔으나 학술(學術)이 거칠어 문장(文章)은 병과(丙科)의 반열(班列)에 뽑히기에도

부족하고 행실(行實)은 쇄소(灑掃)하는 일을 맡기에도 부족합니다.

그리하여 과거(科擧)를 구한 지 10여 년에 세 번이나 낙방(落榜)하고 물러났으니 당초부터 과거 공부를 일삼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하더라도 성질이 조급(躁急)하고 마음이 좁은 평범한 한 사람에 불과할 뿐이고

크게 일할 수 있는 온전한 인재는 아닌데, 더구나 사람의 선악이 결코 과거를 구하느냐 구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님 에이겠습니까.

미천(微賤)한 신(臣)이 분수에 넘치는 헛된 명성으로 집사(執事)를 그르쳤고 집사는 헛된 명성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는데,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여기십니까?

도(道)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문장(文章)에 능하다고 여기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가 반드시 도가 있는 것이 아니며 도가 있는 자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다는 것을 전하께서만

모르신 것이 아니라 재상(宰相)도 모른 것입니다.

그 사람 됨됨을 알지 못하고 기용(起用)하였다가 뒷날에 국가의 수치(羞恥)가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파는 것보다는 곡식(穀食)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 못하겠으니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殿下)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比喩)하자면 마치 1백 년 된 큰 나무에 벌레가 속을 갉아먹어 진액이 다 말랐는데 회오리바람과 사나운

비가 언제 닥쳐올지를 전혀 모르는 것과 같이 된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朝廷)에 있는 사람 중에 충의(忠義) 로운

선비와 근면한 양신(良臣)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 형세가 이미 극도에 달하여 미칠 수 없으므로 사방을 돌아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음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酒色)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내신(內臣)은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龍)을 못에 끌어들이듯이 하고,  

외신(外臣)은 백성의 재물을 긁어 들여 이리가 들판에서 날뛰듯이 하면서도,

가죽이 다 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千百) 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億萬) 갈래의 인심(人心)을 무엇으로 감당해 내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내렸으니 [雨粟] 그 조짐이 어떠합니까?

음악 소리가 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 조짐이 벌써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시기를 당해서는 비록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같은 재주를 겸한 자가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인데 더구나 초개(草芥) 같은 한 미신(微臣)의 재질로 어찌하겠습니까?

위로는 위태로움을 만에 하나도 지탱하지 못할 것이고,

아래로는 백성을 털끝만큼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전하의 신하가 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명성을 팔아 전하의 관작(官爵)을 사고 녹(錄)을 먹으면서 맡은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은

또한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것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臣)이 보건대, 근래 변방(邊方)에 변(變)이 있어 여러 대부(大夫)가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것인데 전하의 신무(神武)하심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소 터진 것이며

하루아침에 생긴 사고(事故)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소 조정에서 재물로써 사람을 인용(引用)하여 재물을 모으고 백성을 흩어지게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는 장수(將帥)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고 성(城)에는 군졸(軍卒)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적들이 무인지경에 들어오듯이 들어온 것이 어찌 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對馬島)의 왜(倭)가 적왜와 몰래 결탁(結託)하고 안내하여 만고(萬古)토록 무궁한

치욕을 끼친 것인데, 왕령(王靈)을 떨치지 못해서 담이 무너지듯 패하였습니다.

이것이 어찌 구신(舊臣)을 대우하는 것은 주(周) 나라 법보다도 업 격하면서 구적(寇賊)을 총애하는

은덕은 도리어 망한 송(宋) 나라보다 더해서가 아니겠습니까?

세종대왕께서 남정하시고 성종 대왕께서 북벌(北伐)하신 일로 보더라도, 어느 것이 오늘날의 일과 같았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것은 피부(皮膚)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복(心腹)의 병통(病痛)은 못 됩니다.

심복의 병통이란 결리거나 맺히며 찌르거나 막혀 상하(上下)가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바로 이럴 때에 경대부(卿大夫)가 목구멍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분주하게 수고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왕병(勤王兵)을 불러 모으고 국사(國事)를 정돈하는 것은, 구구한 정형(政刑)에 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노심초사하여 큰 공을 세우는 그 기틀도 진실로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風流)와 여색(女色)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와 말달리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君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小人)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존망(存亡)이 달려 있습니다.

진실로 어느 날 척연히 놀라 깨닫고 분연(奮然) 히 학문에 힘을 써서 홀연히 덕(德)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를 얻을 수 있다면,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도리 속에는 만 가지 착함이 갖추어지고

백 가지 덕화(德化)도 이로 말미암아서 나오게 됩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균평(均平)하게 할 수 있고 백성도 교화시킬 수 있으며 위태로움도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요체(要諦)를 보존한다면 거울은 그대로 비추지 않음이 없고

저울은 공평하게 달지 않음이 없으며 생각은 사특함이 없을 것입니다.

불씨(佛氏)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 있어서는 유교(儒敎)와 불교(佛敎)가 한 가지입니다.

다만 인사(人事)를 행하는 데 있어 실지를 실천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유가(儒家)가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도(佛道)를 좋아하십니다.

만약 불도를 좋아하는 마음을 학문을 좋아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이는 우리 유가의 일이니,

어찌 어렸을 때에 잃어버렸던 아이가 제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친척·형제·친구를 만나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정사(政事)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으니

사람을 임용하는 것은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고

몸을 닦는 것은 도(道)로써 해야 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사람을 등용하는데 자신의 몸을 닦음으로써 하실 것 같으면 유악(?幄) 안에 있는 사람 치고

사직(社稷)을 보위(保衛) 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이니, 아무 일도 모르는 소신 같은 자가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헛된 명성만으로 등용한다면 잠자리[?席] 밖에는 모두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주변 없는

소신 같은 자가 또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덕화(德化)를 왕도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신다면 신도 마부의 말석(末席)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職分)을 다할 것이니, 임금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 백성을 새롭게 하는 요체(要諦)를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을 삼으셔서 지극한 이치를 세우도록 하소서.

지극한 이치가 지극한 이치로서의 구실을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할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예찰(睿察)하소서.

 

명종 10년( 1555년 을묘 / 명(明) 가정(嘉靖) 34년) 11월 19일 경술 

새로 제수(除授)된 단성 현감(丹城縣監) 조식(曺植)의 상소문(上疏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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