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강화지맥(完)

강화나들길 3코스(능묘가는길)

無碍人 2010. 11. 2. 09:16

2010년 10월30일 토요일 맑음 딸네미랑

 

대간을 가려 했는데 모처럼 시간 여유있는 딸네미가 함께 하고 싶다해서...

적당한 코스로 나들길을 택했다.

아들과 함께 또 딸과 함께 그리고 천사랑...

이게 행복인데...각자 삶이 너무  바빠 모두 한번에 가지 못하는게 아쉽다.

아들녀석 호주보내고 심란해 하는 부모 마음 헤아려 딸이 나섰는데...울 천사는 오늘 출근해야 한다니...갑자기

조금  맥 빠지긴 해도 그게 어디냐구...행복한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승용차로 온수사거리 패밀리마트에서 확인도장받고 삼랑성 동문 주차장에 주차를하고 동문을 거쳐 전등사경내(삼랑성)을

한바퀴 휘돌아보고 북문으로 길을옮긴다.

사실 전등사는 작년 봄에 [전등사 뒤지기]를 하면서 다녀간적이 있고 수십번 왔던곳이지만,그래도 그냥 지나칠순 없으니...

다시 온수리로 나와 성공회 온수성당에서 100년도 안됐지만 구한말 강화일대의 성공회가 자리잡아가는 역사의 현장을만난다.

그러고 보니 강화도가 성공회와 깊은인연이 있는것같다. 1코스에서도 성공회 강화성당을 지났는데... 

성공회 성당에서 제법 긴 시간을...종교적 신념이 있는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성당이나 사찰을 들르면 그래도 마음이 경건해지는것은..

내안의 무슨 힘이 작용하는걸까?  

그래도 아직 난 종교에 대한 관심은 별로다.다만 나와 다른 믿음을가진 사람에대한 배려는 필요하다고...

성공회 온수교회를 지나 강남중학교 길상저수지 길은 지난해 강화지맥 종주시 지나간 길이다.

저수지 제방길을 지나 농촌마을과 들녁을지나 이규보묘까지는 시골 풍경을 잘보여주고 있어 어린시절 거기 로 가는듯...감상에 젓는다.

이규보묘? 고려의 최고의 문장가? 신라에 최치원이 있고 조선에 박지원이 있다면,당연 고려에는 이규보라 할만하지...

역사에 대한 깊이는 얄팍하지마 능히 알만한 역사적 인물이니...이참에 공부좀하고,

연등국제선원을지나 예비군 훈려장 뒤로 해서 곤릉가는길로 접어든다.

이길도 지난번 강화지맥종주시 덕정산에서 내려와 정족산으로 이어지는 강회지맥 본류와 예전엔 별도의 섬이였던 마니산구간

즉 진강산에서 탑재삼거리로 해서 매립된 들판을지나 마니산으로 연결되는 구간을 종주 했었다.

곤릉 석릉 가릉길은 진강산 2~3부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고려시대 고분군이 산재했을 고려의 제2수도 심도의 공동묘지라?

한때 이지역에 머물렀던 왕족과 세도가의 무덤이 있었을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곤릉,석릉,가릉 이외에도 김취려,이규보.최항,허유전등 강화천도 전후 활약한 중앙관료의 무덤이 있다.

 

1. 탐방코스

   온수사거리-전등사동문-삼랑성북문-성공회온수리교회-길정저수지-이규보묘-연등국제선원-곤릉-석릉-가릉

   (총6시간20분,19.8km)

 

2. 탐방경로

   07:20분 - 집출발

                 집출발하여 청천동 아이즈빌에 천사내려주고 오후 5시 픽업약속후 출발

   08:20분 - 온수사거리

                 패밀리 마트에서 확인도장후 동문출발

   08:30분 - 동문주차장

                 동문주차장에 주차후 전등사 동문 출발 전등사경내 관람(삼랑성경내)

   09:00분 - 삼랑성 북문

                 북문지나 제법가파른 산길을 내려가면 성공회 온수리교회

   09:30분 - 온수리 성공회교회

                 성공회 성당의 고담스런 모습이 주위 풍경과 잘어울리나 새로운 교회 건물은 언바란스다.

                 교회를지나 마을길을따라 강남중학교 지나면 길상저수지

   10:00분 - 길상저수지

                덕정산을넘어와 예비군 훈련장을 지나면 길정저수지였다 강화지맥종주시 지나간길이다

                저수지지나 길직리마을길을 돌아가면 이규보묘

   11:20분 - 이규보묘

                 고려 최고의문장가 이규보묘에서 역사공부좀하고...

   11:30~50분 - 이규보묘지나 양지바른 언덕에서 점심(김밥과 귤몇개)

   12:00분 - 연동국제선원

                 외국인을 상대로 템플스테이 하는곳인듯

   12:20분 - 예비군훈련장

                 훈련장뒤 철책따라가면 곤릉,덕정산에서 내려와 정족산으로 이어지고,다시덕정산에서 진강산으로

                 이어지는 강화지맥 두분류의 갈림길

   12:50분 - 곤릉

                 예비군훈련장 지나면 본격적인 능묘길이다.

                 곤릉지나 석릉에 이르는길 중간에 묘지터를 닦는지,건물터를조성하는지 모르지만 공사중으로 알바조심

   13:20분 - 밤나무숲아래 약수터

                약수물은 별로인것같아 마시지않고 쉼터에서 휴식후 출발

   13:30분 - 석릉

                석릉부터 가릉에 이르는 5km는 아름다운 산책길이지만, 슬픈역사를 더 슬프게 한다.

                최우일당이 당신들 정권연장의 필요성으로 강화에 천도하여.....물론 두가지 측면이있다.

                정권연장과,항몽의지?

                그런데 지난 독재정권시절 자기와 비슷한 최씨정권의 강화천도를 호국교육용으로 활용하다보니...

                지나치게 항몽의지만 부각된거 아닌가...그 부산물로 여기 산책길에 보행자용 시멘트길....

                이 걷기좋은 산길에 웬? 시멘트포장...강화 어딘가에 옛날 학도호국단시절 호국교육원이 있었는데...

                지금도 있는지? 지금은 무슨교육을하는지? 궁금하다.

                그때 맹목적으로 주입받던 교육이....지금 생각하면 실소를....우리나라 좋은나라, 우리역사 좋은역사, 이게

                다는 아니다. 찬란한 문화유산이 전부가 아닌, 우리의 슬픈역사도 우리 역사다. 치욕의 역사도 우리 역사고...

                다시 반복되는 역사를보라, 몽고의 침략으로 왕조 앞에 충성스런 忠자를 붙였던 치욕을.. 그게 제대로 교육안됐으니

                임진왜란을겪었고,400년후 나라를 뺴앗겼고, 최씨일당의 독재정권이 700년후 이땅에서 30년간 재현된것을....

   14:50분 - 가릉

                 하마터면 딴길로 갈뻔했다.

                 잘 알지도 못한 역사의식을 설파하려다 딸네미로부터 외면받고...ㅋㅋㅋ그래도 딸이랑함께해서...행복하다.

   15:10분 - 전등사 동문주차장

                미리 알아둔 온수택시불러 이동후 인천으로 고고씽

   17:50분 - 부개동 집

                약속대로 5시 천사를 픽업하여 딸네미가 사준 광어회로 회포를 푸니 더이상 무어가 부러우랴....ㅋㅎ

 

@ 교통편

    인천 온수리행 버스 수시(계산역,터미널) 서울송정역 온수리행

    김포양곡에서 온수리행 환승가능

    승용차이용 동문주차,  탑재삼거리 교통불편 택시이용시 콜비포함 9000원 온수리접근가능

 

3. 탐방개념도

 

 전등사 동문(삼랑성)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
삼랑성 /삼랑성, 사적 제130호, 인천광역시 ...
사적 제130호. 둘레 약 1㎞. 축성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로 인해 삼랑성이라고 한다.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고도 부른다. 성벽은 거친 할석(割石)으로 축조되어 있다.
1259년(고종 46) 백승현(白勝賢)의 풍수설에 따라 고종은 왕업을 연장하기 위해 성안에 가궐(假闕)을 지었다.
마니산(摩尼山)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1660년(현종 1) 삼랑성 안에 새로 사고를 짓고 옮겨놓았다.
이를 정족산사고라 한다. 1739년(영조 15)에 중수하면서 남문에 문루를 건립하고 종해루(宗海樓)라 명명했다. 1764년 다시금 성을 중수했다.
1866년(고종 3) 양헌수 장군이 프랑스군을 물리친 병인양요의 승첩지로도 유명하며, 성안에는 양헌수의 승전비가 있다.
1976년 남문을 다시 복원하고 종해루를 세웠다.

 양헌수 승전비

 전등사 윤장대(輪裝臺)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 있는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이유는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전등사 대웅전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정족산의 삼랑성(三郞城) 안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교구 본사인 조계사의 말사이다. 중창기문(重創記文)에는 381년(소수림왕 11)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한 절로,
1266년(원종 7)에 중창된 이래 3, 4차례의 중수가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현존하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확실하게 단정짓기는 어렵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고 했으나 1282년(충렬왕 8) 충렬왕의 비인 정화공주가 승려 인기(印奇)를 중국 송나라에
보내 대장경을 가져오게 하고, 이 대장경과 함께 옥등(玉燈)을 이 절에 헌납한 후로 전등사라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 옥등은 전하지 않고 있다.
1337(충숙왕 6), 1341년(충혜왕 2)에 각각 중수되었다고 하나 당시 전등사의 역사를 알려주는 기록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1605(선조 38), 1614년(광해군 6)에
일어난 2차례의 화재로 절의 건물들은 완전히 소실되었고, 그 다음해 4월부터 지경(志敬)이 중심이 되어 재건하기 시작해 7년 만인 1621년 2월에 완성되었다.
1678년(숙종 4)에 실록을 보관하는 사고(史庫)가 건립되면서 왕조실록을 지키는 사찰로 왕실의 보호 아래에 있게 되었다. 이 사고장본(史庫藏本)은
1909년 서울로 옮겨져 조선총독부 분실(分室)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707년에는 유수(留守) 황흠(黃欽)이
사각(史閣)을 고쳐 짓고, 별관을 또 지어 취향당(翠香堂)이라 하고 보사권봉소(譜史權奉所)로 정했다. 그뒤에도 1749, 1839, 1855, 1871, 1876년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을 뿐만 아니라 근래까지 대규모의 중수 불사(佛事)가 이루어졌다. 이때 대조루(對潮樓)를 비롯해 양곡을 보관하는 정족창(鼎足倉)
·석량고(石糧庫) 등의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현재와 같은 대규모의 사찰이 되었다. 1912년 일제강점기 때 강화·개성 등 6개군에 있는 34개 사찰을 관리하는
조선불교 30본산의 하나로 승격되었다. 또한 이 절의 뒤편에 있는 정족산의 삼랑성은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하여 신성시되는 점이 주목된다. 경내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사원건축인 대웅전(보물 제178호)·약사전(보물 제179호)을 비롯해 명부전·삼성각·향로각·적묵당·강설당·범종각 등이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중국 북송시대의 범종(보물 제393호)과 전등사의 말사인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된 조선시대의 법화경판(1544)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경판은 6·25전쟁 때 파주에 있었던 모부대에서 1매를 가져가 현재 104매만 남아 있다. 그밖에 거대한 청동수조(靑銅水槽)와 대웅전에서 사용했던
작은 옥등 등이 있다.

 정족산사고

조선 후기에 있었던 사고 가운데 하나.
경기도 강화군 길상면 정족산성 안에 있는 전등사(傳燈寺) 서쪽에 자리했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파괴되어 기록이 많이 없어졌던 마니산실록을 현종 때 완전히 보수하여, 같은 강화도 안에 있는
정족산에 사고를 새로 설치하고 그곳으로 이전했다. 인조 이후의 실록은 4부씩 인쇄하여 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와 함께 정족산에 각 1부씩 보관했다.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정족산실록은 태백산실록과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국(學務局)으로 옮겨졌다.
1930년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교 도서관으로 보관·전환되어, 현재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국보로 보전·관리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실록의 원본으로는 정족산실록과 태백산실록뿐이다. 정족산사고의 자리에는 주춧돌만 놓여 있는데, 1931년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에 정족산사고의 사진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를 전후하여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삼랑성북문

 

 온수리 성공회 사제관

 

 

 

 

 

 

 

 

 

 

 온수리 성공회 성당

강화 길상면에 있는 온수리 성공회 성당(문화재 자료 제15호)은 1906년 영국인 주교 조마가(Mark N. Trollope)가 지은 성당 건물로 우리나라의 초기

서양기독교 교회로 동서 절충식 강당형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9칸으로 용마루 양 끝에 십자가를 장식하였기에 교회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온수리 성당은 시장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야산에 있는데 100년의 세월을 무색케 할 정도로 깨끗하며 서양 종교 건물답지 않고 그저 수수한 우리 관아

아니면 궁궐의 일부건물 같다.

건물 높이는 그리 높지 않고, 정면 옆 출입문은 항상 열려있어 드르륵 밀고 들어서면 된다. 이 건물은 새성당을 건축하면서 함께 원형 복원을 하였다 한다.

안으로 들어서면 방문 같은 亞자 미닫이문이 닫쳐 있는데 조심스럽게 열면 예배실 내부가 한눈에 들어온다. 좌우로 크게 3부분으로 나뉘어 있고 전면은

집례하는 공간으로 쓰이고 있는데 더 안쪽으로는 집례 준비를 위한 공간으로 구별하여 문을 닫아 놓았다.

내부가 그리 넓지도 않은데 가운데 두줄로 네모난 고주(기둥)를 두어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킨 것 같다. 

현재까지도 예배를 드리고 있는 안드레 성당 정문 또한 우리나라 대문양식을 본떠 솟을삼문의 종루로 지었는데 지금도 종을 칠수 있도록 줄이 연결되어 있다.

대문은 얼마 전까지도 벽체가 회벽으로 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털어내고 원형대로 창살로 고쳤다.

속이 환하게 보이는 입구에는 문은 없고 양옆으로 창고를 만들어 이용할수 있도록 하였다.        

 

 건너 진강산과 길상저수지

 이규보묘

 이규보

1168(의종 22)~1241(고종 28).고려의 문인.
본관은 황려(黃驪). 자는 춘경(春卿), 초명은 인저(仁低),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9세 때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으며 14세 때 성명재(誠明齋)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지어 기재(奇才)라 불렸다.
소년시절 술을 좋아하며 자유분방하게 지냈는데, 과거지문(科擧之文)을 하찮게 여기고 강좌칠현(姜左七賢)의 시회에 드나들었다.
이로 인해 16, 18, 20세 3번에 걸쳐 사마시(司馬試)에서 낙방했다. 23세 때 진사에 급제했으나 이런 생활을 계속함으로써 출세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
개성 천마산에 들어가 백운거사를 자처하고 시를 지으며 장자(莊子)사상에 심취했다.
26세 때 개성에 돌아와 궁핍한 생활을 하면서 당시 문란한 정치와 혼란한 사회를 보고 크게 각성하여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
등을 지었다. 그뒤 최충헌 정권에 시문으로 접근하여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고 32세부터 벼슬길에 오르게 되었다.
1207년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고 천우위녹사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1219년 우사간(右司諫)이 되었다.
이때 부하의 무고로 좌사간으로 좌천되었다가 지방관의 죄를 묵인했다 하여 면직되었으나 최이(崔怡)의 도움으로 계양도호부부사병마검할
(桂陽都護府副使兵馬黔轄)에 부임했다.
1220년 예부낭중기거주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올랐고 국자좨주한림시강학사(國子祭酒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를 지냈다.
이때 팔관회 행사에 잘못을 저지른 사건으로 한때 위도(渭島)에 유배되었다.
1232년 판비서성사 보문각학사경성부우첨사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로 복직되었고,
1237년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 등을 지냈다.
당시 계관시인과도 같은 존재로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있으나 대 몽골 항쟁에 강한 영도력이 필요하다는 판단으로 정권에 협조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는 우리 민족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을 갖고 외적의 침입에 대해 단호한 항거정신을 가졌다. 국란의 와중에 고통을 겪는 농민들의 삶에도 주목,
여러 편의 시를 남기기도 했다. 그의 문학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한 것이 특징인데, 당시 이인로 계열의 문인들이 형식미에 치중한 것에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신기(新奇)와 창의(創意)를 높이 샀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야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백운소설 白雲小說〉·〈국선생전 麴先生傳〉 등의 저서와 다수의 시문을 남겼다.

 

 연등국제선원

 벼베기가 늦었다.

길에서마난 주인장 남의벼 베느라 늦었다고....

 우리딸 이쁘다....

 

 곤릉

고려 강종(재위 1211∼1213)의 부인인 원덕태후 유씨의 무덤이다.
원덕태후는 고종의 어머니로 강종 1년(1212)에 왕비가 되고 연덕궁주라 하였다.

뒷날 원덕태후는 추대되고 1253년에 정강의 시호가 더해졌는데, 언제 사망하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석물은 없어졌고 봉분과 무덤을 둘러싼 담도 무너졌던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고려 희종(재위 1204∼1237)의 무덤이다.
희종은 신종의 첫째 아들로 어머니는 정선태후 김씨이며, 부인은 성평왕후 왕씨이다.

1204년 왕위에 올랐고, 최충헌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희종 7년(1211)에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 강화 교동으로 갔다.

고종 24년(1237) 57세의 나이로 죽자 낙진궁으로 옮겼으며, 10월에 덕정산 남쪽에서 장례를 지내고 석릉이라 하였다.
조선 현종 때 강화유수 조복양이 찾아내어 다시 무덤을 쌓았는데, 그 뒤 석물도 부서지고 무너진 무덤을 1974년 손질하여 고쳤다.

석릉 주변에는 최근에 고려시대 귀족의 무덤이라 생각되는 돌방무덤(석실분)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이게 웬 시멘트포장...

능내리석실분

 고려시대 지배계층의 무덤로 생각되는 곳이다.
무덤의 크기는 남북 방향 길이가 270㎝ 정도, 깊이가 195㎝의 규모로 내부는 잘 다듬어진 화강암으로 쌓았다.

무덤 앞쪽에는 사각형의 석주가 있는데 3면에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가릉

 고려 원종(재위 1259∼1274)의 왕비 순경태후의 무덤이다.
 순경태후는 장익공 김약선의 딸로서 고종 22년(1235) 원종이 태자가 되자 태자비인 경목현비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충렬왕을 낳았다.

 지금의 자리에는 고종 31년(1244)경 사망한 뒤 모신 것으로 짐작한다.

 고려 원종 3년(1262) 정순왕후로 추대되고 충렬왕이 즉위(1274)하여 순경태후로 높여졌다.

 무덤 주변의 석물은 부서져 없어졌고, 봉분도 무너진 것을 1974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손질하여 고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