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또한 지나가리/강화지맥(完)

강화나들길 4코스(해가지는 마을길)

無碍人 2010. 11. 11. 19:19

2010년 11월 11일 목요일 맑다가 비오고바람불고...홀로종주

 

가을을타는지 괜한 감상에 젖는일이 싫다.

모처럼 온전하게 쉬고 싶어 지난 비번날 아무것도 하지않고 침대에서 뒹굴어 봤는데...

나한테는 어울리지 않는다 움직여야하는 팔자인지라...기분만 가라앉고 없는 우울증도 생기는것 같아 무작정 나섰다.

어제밤까지도 두어파트 철저하게 내몸을 쉬게하자 했는데....쉬는게 아픈데를 만드는것같아....

가릉에서 망양돈대까지는 나들길중 가장 가까운코스다. 11.5km 3시간정도면 탐방이 가능하다.

원래 계획은 노을지는 오후에와서 하룻밤자고 5코스까지 가려 했는데 갑자기 나섰다.

가릉지나 갈멜산기도원 정제두묘까지는 숲길을지나는 평범한길이지만 만추의 숲은 결코 쓸쓸하지만 않다.

제각기 생긴대로 나름의 아름다움으로 물든 나무들...바삭거리는 낙엽밟는소리..오수에 졸다 내발자욱소리에 뛰는 살찐고라니..

정제두묘를지나 하우약수터,건평리 마을길을 올라서면 조선후기 대문장가 이건창의묘가 그흔한 돌비석 하나  없이 쓸쓸하다.

건평나루부터 석모도의 해명산을 바라보며 잘닦인 해안도로를 휘휘돌다보면 외포리 선착장이다.

석모도로 떠나는 자동차를 가득실은 도선을 따르는 갈메기가 무심하다.

선착장 한켠의 노점은 보기엔 따스하지만,예전같은 인심은 없고 상술과 속임만이 눈에띄는 것같아 안타깝다.

 

1. 탐방코스

   가릉-정제두묘-하우약수터-건평나루-건평돈대-외포여객터미널-외포어시장-망양돈대

   (총 11.5km, 3시간 20분소요)

 

2. 탐방경로

   08:20분 - 부개동집출발

   08:40분 - 부평강화행 90번탑승

   09:20분 - 양촌에서 0-2번송정온수버스 환승

   10:10분 - 온수 60번 외포행버스 환스

                 온수터미널 근처 김밥천국에서 김밥두줄로 점심준비후 출발

   10:40분 - 가릉출발

                탑재삼거리 강화허브향기에서 출발도장받고 가릉옆으로 잣나무숲길출발

   11:30분 - 정재두묘

   12:00분 - 하우약수터

   12:20분 - 이건창묘

   12:40분 - 건평나루

   13:00분 - 건평돈대

                건평돈대는 군부대 출입금지안에 있으나 평상시 탐방가능한데 오늘은예외다.

                할 수없이 그냥지날밖에...

   14:00분 - 망양돈대

                선창장에서 바닷가 펜스따라가면 삼별초 기념비 지나 소나무 숲속에 있는데 돈대의 석양이 일품이라는데 석양은

                멀었고 금방이라도 쏟아질것같은 날씨가 내 발걸음을 제촉한다. 

                30여분 기다려 강화터미널행버스타고 터미널에서 90번환승

   17:30분 - 집도착

 

@ 교통편

    부평 90번버스양곡에서 60-2버스 환승

    온수에서 외포리행 60번환승 탑재삼거리하차

    외포리 30번탑승 터미널 90번환승귀가

 

3. 탐방개념도

 

  강화 허브향기

  진강산(433m)

  혈구산과 마니산사이에 있는 산

 

  가릉

 가릉옆 잣나무 숲

 갈멘산 기도원

 정제두묘

조선에 전래된 양명학의 사상체계를 확립하고 이를 바탕으로 경세론을 전개했다.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
정몽주(鄭夢周)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유성(維城)이고, 아버지는 진사 상징(尙徵)이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어려서 이상익(李商翼)에게 배웠고, 20여 세 때부터 박세채(朴世采)를 스승으로 섬겼다. 윤증(尹拯)에게도 배웠으며, 최규서(崔奎瑞)·

최석정(崔錫鼎) 등과 사귀었다.

1668년(현종 9) 초시에 급제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만 힘썼다. 이무렵부터 공소(空疎)에 빠진 주자학에 반대하고 양명학에 심취하여 상당한

이해가 있었다. 1680년(숙종 6) 김수항(金壽恒)의 추천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등의 벼슬이 주어졌으나 나가지 않았다. 1684년 공조정랑을 잠시 지냈다.

학문과 덕행으로 이름이 나자 중신들이 다투어 천거하여 1688년 평택현감에 임명되고, 서연관(書筵官)을 비롯하여 30여 회나 요직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거절했다.

1689년 안산(安山)에 옮겨 살았는데, 이때 양명학에 더욱 몰두했다. 이 시기에 저술된 〈학변 學辨〉·〈존언 存言〉에는 양명설을 바탕으로 한 그의 심성학(心性學)이

심화되어 표현되고 있다. 1709년 강화도 하곡으로 옮겨 살았으며, 숙종 때 호조참의·한성부윤, 경종 때 대사헌·성균좨주에 임명되었다. 1726년 이정박(李廷撲)이

그가 양명학을 한다고 배척했으나 영조의 보호를 받았다. 1728년 우참찬, 1736년 세자이사(世子貳師)로 임명되었다.

 

@ 강화학파

조선 후기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 1649~1736)를 시조로 하여 강화도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특한 학문적 경향을 가진 학파.
흔히 강화학파의 학문적 경향은 양명학(陽明學)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적 경향은 중국의 양명학과 다를 뿐 아니라 단순히 양명학에 그치지 않는다.

 정제두의 경우 당시 지배 교학(敎學)이었던 주자학(朱子學)에 대한 반발로서 양명학을 수용했으나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외형적으로 주자학과 양명학을

절충하는 형태를 취했다. 즉 왕양명(王陽明)의 심즉리(心卽理)와 치양지(致良知) 설을 따르면서도 이기론(理氣論)이 사상적 기초가 되고 있으며 또 이(理)와

기(氣)의 관계를 체용(體用)·본말(本末)로서 이해했다. 중국에서는 왕양명이 죽은 뒤 그의 학파가 인간의 정욕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좌파와 이에 대한

억제를 주장하는 우파로 나누어졌다. 정욕의 적극적 긍정 여부는 주자학과 그에 입각한 중세적 지배체제에 대한 적극적 부정의 여부와 관련된다. 주자학의

상하관계적 신분질서는 피지배층의 요구를 억제한 위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양명학 우파의 경우는 정욕의 억제를 생각하는 가운데 지배체제를 긍정하면서

점차 주자학과 절충적인 경향을 띠어갔다. 정제두는 인간 욕망 문제에 있어서 정욕을 이(理)의 영역 안에서 인정한다. 즉 정욕을 적극적으로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理性)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상의 점들로 보면 정제두가 수용한 양명학은 우파적 경향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제두는

중국의 양명학 우파와 달리 토지개혁을 주장하는 한편 당시 신분제를 적극적으로 부정하는 양반 소멸론까지 주장했다. 인간 욕망의 통제를 생각하는 것이

반드시 지배체제의 긍정은 아니며 인간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반드시 피지배층을 옹호하는 입장은 아니다. 또 이(理)의 내용에 변화가 생겼을 때,

또는 이(理)를 살아 움직이는 능동적이고도 이성적인 실천의 주체로 생각할 때에는 이(理)를 체(體)나 본(本)으로 보는 입장이 반드시 지배체제의 옹호는 아니다.

조선의 경우 실학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킨 기호 남인(畿湖南人) 계열은 주리학파(主理學派)이다. 정제두의 학문은 중국의 양명학 좌파와 우파 어느 한 쪽에

귀속시킬 수 없는 그 자신의 독자적 학문, 즉 '조선적 양명학'을 이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제두의 학문은 그의 아들 정후일(鄭厚一) 및 손자 사위인 이광명(李匡明), 그의 사촌인 이광사(李匡師), 육촌인 이광려(李匡呂)와 정제두의 손자 사위인

 신대우(申大羽)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후 강화학은 이들의 가학(家學) 형태로 이어졌다. 이후의 계승자로서는 이광명의 양아들인 이충익(李忠翊),

이광사의 아들인 이영익(李令翊)과 이긍익(李肯翊), 신대우의 아들 신작(申綽), 이광려의 제자인 정동유(鄭東愈)·유희(柳僖) 등이 유명하다. 이충익의

학문은 다시 아들 이면백(李勉伯), 손자인 이시원(李是遠)과 이지원(李止遠)으로 이어지며, 이지원의 손자가 이건방(李建芳)이고, 이시원의 아들이

이상학(李象學), 이상학의 아들이 이건승(李建承)과 이건창(李建昌)이다. 이건방은 정인보(鄭寅普)를 제자로 길렀으며, 강화학 200년은 정인보에 의해 마감되는

한편 근대적 사상으로 변모한다. 강화학파는 정인보 외에 김택영(金澤榮)·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 등 한말 일제하의 민족운동가·사상가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다. 이 점에서 보면 강화학은 우리 근대 민족주의의 원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들 강화학파는 당색(黨色)

상으로는 모두 소론(少論)으로서 이들 가운데 특히 이광명·이광사 집안은 1755년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 일명 乙亥逆獄) 등과 같은 사건에서

노론(老論) 집권층에게 큰 피해를 당했다. 이러한 정치적 입지는 이들이 주자학과 다른 사상적 경향을 더욱 발전시키는 데 일조했다.

이리하여 정제두 이후, 첫째 강화학에는 새로이 우리 역사와 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에 대한 치밀한 연구경향이 나타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이시원의 〈국조문헌 國朝文獻〉, 이건창의 〈당의통략 黨議通略〉은 오늘날에도 매우 자료적 가치가 높은 역사서이며 이광사의 〈오음정서 五音正序〉,

유희의 〈언문지 言文志〉 등은 우리 언어에 대한 과학적 연구이다. 오늘날 한국학의 기원을 여기에 둘 수도 있다. 또 이광사는 원교체(圓嶠體 : 원교는

이광사의 호)라는 매우 조선적인 서체(書體)를 창안했다. 이것은 중국적인 것에 심취한 김정희(金正喜)의 추사체(秋史體)와 대조를 이룬다고 할 것이다.

둘째로 강화학 내에서는 노장(老莊)사상 및 불교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이충익은 〈초원담로 椒園談老〉라는 저술을 지었으며 신작에게도 노자(老子)에

대한 연구서가 있었다. 노자와 장자(莊子)에 대한 연구는 강화학파에 앞서 같은 소론계인 박세당(朴世堂)에 의해 이미 시작되었으며 강화학파는 이것을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또 이충익은 불교를 깊이 연구하여 〈진언집 眞言集〉이라는 저서를 남겼다. 강화학파의 불교와 노장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이것을 통해 유교적 한계 또는 중세적 지배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고 여겨진다. 셋째로 강화학파에서는 19세기초에 이르러 유교 경학(經學)

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는 경향 및 정양용의 학문을 흡수하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신작은 〈시차고 詩次故〉·〈역차고 易次故〉·〈서차고 書次故〉

라는 저술을 지었다. 이것은 산일(散佚)된 유교 경전 주석을 체계적으로 집일(集佚)한 것으로 대체로 한대(漢代) 경학의 입장에 서 있다. 여기서

강화학이 단지 양명학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변화와 발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신작은 정약용과 깊은 학문적 교류를

했으며 이 인연을 계기로 이상학이 정약용의 학문에 대한 연구를 한다. 뒤에 이건방은 〈경세유표〉에 서문을 쓰고 정인보가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를 간행한 것 등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정약용의 학문은 많은 부분이 강화학파에게 수용되어 이들을 통해 근대의 우리에게 전해졌으며 강화학 자체도

정약용의 학문과 결합하는 가운데 민중적 성격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결합된 학문이 바로 일제시대 민족주의자들의 이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사상적 토대로 작용했다.

 정제두 부친 정상진과 그부인 한산이씨묘

 하우약수터 옆 정제두선생 숭모비

 

 

 하우약수

 

 이건창묘

조선 말기의 문신·대문장가.
가학(家學)을 이어 양명학(陽明學)을 연구했으며, 조선시대 당쟁 연구에 필요한 〈당의통략 黨議通略〉을 지었다.

 본관은 전주. 초명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鳳藻), 호는 영재(寧齋).

할아버지는 이조판서를 지낸 시원(是遠)이고, 아버지는 상학(象學)이며, 어머니는 윤자구(尹滋九)의 딸이다.

 개성에서 태어났으나 집안의 세거지(世居地)는 강화였으므로 계속 강화에서 살았다. 형제인 건승(建昇)·건면(建冕) 및 종형제인 건방(建芳) 등과 함께

할아버지로부터 가학인 양명학을 전수받았으며,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유했다. 1866년(고종 3) 15세 때 별시문과에 급제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려 19세 때인 1870년에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뽑혀 청나라에 가서 청의 문장가인 황각(黃珏)·장가양(張家驤)·

서보(徐郙)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가 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조사하고 임금에게 직접 보고하여

파면시켰다. 그러나 조병식의 사주에 의한 무고로 벽동군에 유배되었다. 1년 뒤에 풀려나 공사(公事)를 철저히 수행하다가 권세가들의 공격으로 귀양까지

가게 되자, 그뒤 벼슬길을 멀리했다. 그러나 왕이 간곡한 말로 부르자 1882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가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의

구휼에 힘쓰는 한편 세금을 감면하여 주기도 했다. 그뒤 부모의 상을 당하여 6년간 집상(執喪)을 마치고 1891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이때 외국인이

서울의 가옥과 토지를 매점(買占)하는 일이 있자, 이를 금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하여 청국공사(淸國公使)의 항의를 받았으나, "나는 내 서울 백성하고

말하는 것이지 외국과 맺은 조약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청국의 압력으로 이듬해 보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에

안핵사로 내려가 난민을 다스리고, 관찰사의 잘못을 낱낱이 조사하여 파면시켰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특진관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퇴했으며,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도 사양하다가 고군산도로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뒤에 풀려나 향리인 강화에서 은거하다가

2년 뒤 47세로 죽었다.

 

 

 건평나루

 

  석모도 해명산

 

 

 

 건평돈대

 

 

 망양돈대

돈대는 적의 움직임을 살피거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하여 영토내 접경지역 또는 해안지역의 감시가 쉬운 곳에 마련해 두는 초소이다.

 대개 높은 평지에 쌓아두는데, 밖은 성곽으로 높게 하고, 안은 낮게 하여 포를 설치해 둔다.
망양돈대는 남쪽으로 건평돈대까지 3,200m, 서쪽의 삼암돈대까지 1,3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포보의 관리하에 있었다.

높이 3m, 폭 2.5m, 둘레 120m의 원형돈대로 포좌(대포를 설치하는 곳) 4곳, 치첩 40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조선 숙종 5년(1679)에 쌓아놓은 것으로, 경상도군위어영군사 4,300여명과 함경도·황해도·강원도 승군 등 모두 8,000여 명이 참여하였다.

 

 삼별초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관련 지방자치단체가 설치한 상징물

강화군,진도군,북제주군 

 

 

 

 

 

 외포선착장

 

 

 

 정보다는 장삿속이....갈때마다  편치않다

  외포여행안내소

  4구간완주도장받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