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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碍人 부부 산방
2026년 10월 7일 수요일 맑음 나홀로 서해랑길 60코스는 깊은골 버스정류장에서 시작한다. 버스가 떠난 자리에는 풀잎에 맺힌 습기와 낮은 산자락만 남아 있다. 아침 공기는 선선하지만 햇볕은 제법 따갑다. 해가림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쓴 뒤 양산까지 꺼내 든다. 오늘 걸어야 할 거리는 17.4km. 숫자로 보면 제법 긴 거리지만, 마음은 벌써 토정 이지함이라는 이름을 향해 가고 있다.내가 이지함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것은 아마 중학교 국사 시간쯤일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전인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나는 이미 ‘토정’을 알고 있었다. 섣달 그믐 무렵이면 할머니는 다락에 고이 모셔둔 『토정비결』을 꺼내셨다. 그리고 내게 아버지와 큰아버지, 고모들의 운세를 찾아 읽어 달라고 하셨다.먼저 작..
2026년 10월 3일 토요일 맑음 좋은사람들 윤미리의 『수·당제국』 오디오북을 귀에 꽂고 길을 나선다.오랜만에 ‘좋은 사람들’ 산악회와 함께 걷는 길이다.지난 4월 셋째 주 토요일, 서해랑길 27코스를 함께 걸은 뒤 봄과 여름 동안에는 홀로 80~61코스와 28~38코스를 이어왔다. 태생이 홀산꾼이라 혼자 걷는 것이 편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지는 구간은 당분간 산악회와 함께 걸으며 연말까지 서해랑길을 마무리할 생각이다.내년에 남파랑길까지 완주하면 1대간 9정맥에 이어 코리아둘레길까지, 이 땅의 산줄기와 둘레길의 큰 줄기를 거의 모두 걸어보게 된다. 생각해 보면 참 오래 걸어왔다.오늘의 출발점은 답동마을이다.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관광객이 아니라 그저 마을길을 지나가는 한 사람의 나그네가 된다. 추수를 앞..
2026년 9월 29일 화요일 맑음 나홀로 오해를 이해로 씻어내며 걷는 길문지은의 『알라의 나라 이슬람』을 오디오북으로 귀에 꽂고 길을 나선다.내게 이슬람은 중학교 시절 역사 시간에 배운 십자군 전쟁을 통해 처음 각인되었다. 그때의 이슬람은 막연하게 ‘타도해야 할 악의 세력’에 가까웠다. 당시 교회에 다니던 개인적인 경험과 더불어, 이스라엘·이집트 전쟁을 바라보던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까지 겹치면서 서방 세계, 특히 이스라엘에 우호적인 시각이 자연스럽게 내 생각에도 스며들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만들어진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이스탄불의 성소피아를 알게 되면서 조금씩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이슬람 세계의 지배 아래에서도 건축물과 다른 종교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지..
2026년 9월 23일 맑음 천사랑 오늘은 오디오북을 내려놓는다. 천사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발걸음을 맞춘다.아침 햇살 가득한 합덕제는 조용하다. 추석을 앞둔 들판의 벼는 어느새 노랗게 익어가고, 고개 숙인 벼 이삭 사이로 결실의 계절이 다가왔음을 느낀다. 합덕제는 단순한 저수지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이곳 농경을 지탱해 온 물의 터전이다. 농촌의 역사는 결국 물을 다스리는 역사와 함께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합덕수리민속박물관을 지나 합덕전통시장으로 들어서자 분위기가 달라진다. 조용한 들판 대신 사람들의 목소리와 상인의 손놀림이 시장을 채운다. 추석을 앞둔 시장에는 과일과 햇곡식, 나물과 전을 부칠 재료들이 가득하다. 전집은 명절 준비로 부산스럽고, 우리도 떡집에 들러 바람떡과 송편을 사니 마음이 한..
2026년 9월 16일 수요일 맑음 나홀로 제국의 흥망을 들으며 내포의 길을 걷다서해랑길 65-5코스는 합덕수리민족박물관에서 아미산 입구까지 19.6km를 잇는다. 내포의 너른 들판과 낮은 산줄기를 따라 걷는 길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농경의 역사를 품은 합덕제, 천주교 순교의 피가 서린 합덕성당, 그리고 백제 부흥군의 한이 남아 있는 몽산까지 지나간다.오늘은 최현우의 『고대인도왕국 무굴제국』을 귀에 꽂는다. 내포의 들판을 걸으며 인도의 거대한 제국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혀 다른 두 공간의 역사가 묘하게 포개진다. 한쪽에는 물을 다스리며 삶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광대한 땅을 다스리기 위해 제도를 만들고 종교와 문화를 조율했던 황제들이 있다. 역사란 결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