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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준의 "산수고"와"산경표"

無碍人 2010. 4. 27. 13:11

                    신경준의 『산수고』와 『산경표』

                                    - 국토의 산천에 대한 체계적 이해 -

                                                     양보경(규장각 특별연구원)


            목차

      1. 서언
      2. 묻혀져 있는 지리학자, 신경준
      3. 『산수고』 : 산천의 체계화와 전통적 자연지리학
      4. 『산경표』 : 잃어버린 산줄기의 체계와 전통적 산줄기 이름
      5. 맺음말

  1. 서언

『산경표』를 펼치면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는 책머리에 우뚝 서 있다.

네 개의 글자가 웅장하게 우리 국토를 꿰뚫고 있다고 느꼈다.
『산경표』를 처음 대했을 때의 기억이다.
단순히 한 지리학자의 지리학적 상상력으로 돌려 버릴 수 있을까 ?
국민학교(초등학교) 학생시절부터 20여년 동안 잘 외어지지 않는 산맥 이름 때문에 고생했던 순간들도 되살아
났고, 기억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 앞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국토의 산줄기 이름이 신기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외우려 노력했던 산맥의 이름은 20세기에 들어와 일본 지질학자가 붙여준 명칭이며,
우리 선조들이 부르던 전통적인 산줄기 이름이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통의 단절은 이렇듯 곳곳에서 자취를 드러내고 있다.
지리학의 경우도 우리의 전통적인 지리학과 단절된 채, 지리학이라는 옛 이름 아래 서구의 근대 지리학이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 결과 풍수지리를 포함한 과거의 지리학은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까지 인식되기도 하였다.
전통적인 지리학이건 근대지리학이건 그 기본적인 과제는 우리가 살고 있고 또 물려주어야 할 자기 국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이다.
국토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라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되어야 할 사람이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 1712 ~ 1781)이다. 그의 많은 저작가운데 『산수고(山水考)』와, 그의 저작으로 전하는 『산경표(山經表)』는 산과 강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지리서이며, 한국적인 국토 인식 방식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2. 묻혀져 있는 지리학자, 신경준

신경준은 1712년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났다.
고령 신씨가 순창에 거주한 것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자 신숙주의 동생인 신말주(申末舟)가 관직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한 15세기 부터였다.
신경준은 한 때 소사, 직산 등에 옮겨 살았으나 1744년에 다시 순창의 옛집으로 돌아왔다.
그가 관직에 나아간 것은 43세 때인 1754년(영조 30)에 실시된 증광향시에 급제하면서 부터였다.
늦은 나이로 관계에 진출한 그는 성균관 전적, 사간원 정언, 사헌부 장령, 서산 군수, 장연 현감, 사간원 헌납 등을 거쳤으나 관직생활은 그리 순탄한 편은 아니어서 15년만인 1769년(영조 45)에 고향인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이 해에 영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강력하게 천거하여 비국랑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가게 되었다.
영조는 신경준이 편찬한 『강역지(疆域誌)』를 보고 그로 하여금 『여지편람(輿地便覽)』을 감수하여 편찬하게 하였다. 『여지편람』을 본 영조는 그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文獻通考)』와 비슷하다 하여 『동국문헌비고(東國問獻備考)』로 이름을 바꾸어 새로 편찬하게 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찬집청을 설치하여 문학지사(文學之士) 8인을 선발하여 『동국문헌비고』를 편찬하도록 함에 따라, 신경준은 『여지고(輿地考)』부분을 관장하였다.
역대국계(歷代國界), 군현연혁(郡縣沿革), 산천(山川), 도리(道里), 관방(關防), 성곽(城郭), 해방(海防), 해로(海路) 부록으로 북간도강계(北間島疆界), 서간도강계(西間島疆界)로 구성된 목차에서 볼 수 있듯이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는 그의 해박한 지리 지식을 종합하여 편찬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의 지리에 관한 저술은 대부분 이 「여지고」에 부분적으로, 혹은 변형된 형태로 실려 있다.

신경준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지리학자의 한 사람으로 볼 수 있다.
그는 지리학보다도 국어학자로 일찍부터 평가를 받았으나, 그의 주요 저작은 대부분 지리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중에 시문과 성리학적인 글들, 『훈민정음운해』외에 대작(大作)은 『산수고』 『강계지(疆界誌)』 『사연고(四沿考)』 『도로고(道路考)』 『군현지제(郡縣之制)』 『차제책(車制策)』 『가람고(伽藍考)』 등 대개 지리학적인 것으로서, 여암만큼 다방면에 걸친 지리학 저술을 남긴 사람은 없다.
주요 저작의 내용을 보면, 『강계고』는 우리나라 역대의 강계와 지명 등을 고찰한 역사지리서로서
   일본, 대만, 유구국(오키나와), 섬라국(태국) 등도 별도 항목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연고』는 압록강 두만강 등 강로(强路)와 각 도별 연해로(沿海路), 중국 일본과의 해로, 조석 등
   주로 수로 교통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도로고』는 어로와 서울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그리고 사연로(四沿路)와 팔도해연로(八道海沿路), 대중소(大中小)의 역로(驛路), 봉로(熢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海路),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일 등 각종 도로와 정기 시장이 망라된 글이다.
『가람고』는 각 군현별 사찰의 위치, 연혁 등을, 『군현지제』는 우리나라 군현제의 실상과 문제점 등을 지적한 책이다.뿐만 아니라 '동국여지도발(東國輿地圖跋)' '동국팔로도소식(東國八路圖小識)' '어제여지도소서(御製輿地圖小序)' 등의 글을 보면 지도 제작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일가견을 가지고 당시의 지도 편찬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지도 발달에 한 전기를 마련하였던 농포자 정상기(鄭尙驥 : 1678 ~ 1752)와 아들 정원림, 손자 정항령까지 삼대(三代)에 이어졌던 지도 제작의 기법을 정항령과 친교가 있었던 신경준도 나누어 가졌음을 지도에 관한 그의 글에서 살필 수 있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사람은 17세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이었음을 그의 저작 곳곳에서 볼 수 있다.

그는 당대에는 왕을 비롯한 사대부들이 인정하였던 뛰어난 지리학자였으나, 20세기 지리학계에서는 주목받지
못한 잊혀진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지리학에 관한 연구들은 비교적 늦게 시작되었다.
최근에는 신경준과 『산경표』에 관한 자료들을 수집하여 해설을 덧붙인 『산경표』를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시대의 가른 학자나 실학자에 비하여 여암에 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상태에 있다.
하지만 위에서 살펴 본 그의 저술만으로도 신경준은 조선 후기 지리학, 나아가 실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많은 실학자들이 재야에서 활동하였음에 반하여 그는 왕명을 받아 국가적인 편찬 사업에 그의 재능과 학식을 발휘하여 조선 후기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던 점 또한 주목받을 만하다.

  3. 『산수고』 : 산천의 체계화와 전통적 자연지리학

여암이 저술한 지리에 관한 장편의 글들은
그의 사후(死後) 홍량호의 서문을 붙여 편찬한 『여암집(旅庵集)』(규장각 소장, 8권, 4책, 필사본)과
1910년에 후손들이 목판으로  간행한 『여암유고(旅庵遺稿)』(13권 5책)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신경준의 업적과 그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위당 정인보 선생이 1939년부터 『여암전서(旅庵全書)』를 간행하였는데, 원래 계획했던 신경준의 저작을 다 싣지는 못하였으나 『도로고』를 제외한 지리에 관한 글들이 대부분 실리게 되었다. 1976년에 기존에 출간되었으나 구하기 어려운 『여암유고』와 『여암전서』 그리고 여암전서에서 간행하지 못하였던 『도로고』와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海)』, 연보, 후손댁에 전하는 <강화도전도> <팔도전도> 등을 합해서 다시 『여암전서(旅庵全書)』(경인문화사 간)라는 이름으로 간행함으로써 여암의 저술이 대부분 망라되었다.

『산수고』는 『여암전서』에 산경(山經), 산위(山緯), 산경(山經), 수경(水經), 수위(水緯), 수위(水緯)의 총 6권으로 실려 있으나, 누락된 부분이 상당 수 있다.㉮
 
『산수고』는 다음과 같은 글로 시작된다.

"하나의 근본에서 만 갈래로 나누어지는 것은 산(山)이요. 만가지 다른 것이 모여서 하나로 합하는 것은 물(水)이다. (우리나라) 산수(山水)는 열 둘로 나타낼 수 있으니, (산은) 백두산으로부터 12산으로 나누어지며, 12산은 나뉘어, 팔로(八路 : 팔도)가 된다.
팔로의 여러 물은 합하여 12수(水)가 되고, 12수는 합하여 바다가 된다.
흐름과 솟음의 형세와 나누어지고 합함의 묘함을 여기에서 가히 볼 수 있다."

고 하여 『산수고』를 쓰게 된 동기와 산수의 원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나라의 근간이 되는 산과 강을 분합(分合)의 원리로 파악하여 대칭적이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음양의 구조처럼 이해한 점, 그리고 경혈(經穴)에 해당하는 주요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로 파악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지니고 있던 자연관과 우주관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연의 운행을 보면 1년은 열 두 달로 완결되며, 우주 만물에는 양과 음이 있다.
우리나라의 산천도 일반 자연 법칙과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어 12개의 물줄기와 산줄기가 있으며, 산수의 흩어짐과 합함, 우뚝 솟아 서 있음과 아래로 흘러내림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신경준 개인의 생각이면서 동시에 자신이 살고 있는 국토를 소우주로 이해하여 완결적인 존재로 파악하던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인 자연관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어서 『산수고』에는 12개의 산과 하천의 명칭이 개괄되어 있다.
12산은 ① 삼각산 ② 백두산 ③ 원산(圓山) ④ 낭림산 ⑤ 두류산(豆流山) ⑥ 분수령
⑦ 금강산 ⑧ 오대산 ⑨ 태백산 ⑩ 속리산 ⑪ 육십치(六十峙)㉯ ⑫ 지리산이다.
12수는 ① 한강 ② 예성강 ③ 대진강(大津江) ④ 금강 ⑤ 사호(沙湖) ⑥ 섬강(蟾江)
⑦ 낙동강 ⑧ 용흥강(龍興江) ⑨ 두만강 ⑩ 대동강 ⑪ 청천강 ⑫ 압록강이다.
산 중에는 삼각산을, 물은 한강을 으뜸으로 쳤으니, 이는 경도(京都 : 수도)를 높이기 위한 것이라 하였다.
이것은 그가 중앙, 수도 중심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산수고 1 :
「산경(山經)」에는 열 두 개의 주요 산과 상호 연결 관계, 주변의 작은 산들, 산줄기의 뻗침, 군현과의 관계 등을 기록하고, 마지막에 그 주요 산에 포괄되는 지역, 주요 산계가 미치는 하천의 범위, 즉 수계(水系)를 적어 놓았다.
몇 가지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백두산 :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불함산이라 하였고, 당서(唐書)는 태백산으로 기록하였다.
            백두산은 압록, 토문 양강의 사이에 연유하여 남으로 연지봉, 허항령에 이르러 둘러싸인 천평이 되고,
            동남으로 뻗어서 보다, 사이, 완항, 어은령이 되고, 원산(圓山)에 이른다.
            관북의 단천, 이성, 북청, 홍원, 함흥, 삼수와 관서의 강계, 폐사군의 여러 산이 여기에서 근원한다.
            동쪽으로는 길주의 부서천, 남쪽으로 바다 및 성천강, 서쪽으로 강계의 독로강, 북쪽으로 갑산의
            전천 및 압록강에 이른다.

원산 : 북관의 길주, 명천, 육진의 여러 산이 이 산에 근원을 두고 있다.
         동으로는 바다, 남으로 부서천, 서로 무산의 서천, 북으로 두만강에 이른다.

낭림산 : 관북의 정평, 영흥, 고원과 관서의 영원, 맹산, 은산, 성천, 강동, 삼등, 양덕의 여러 산이 이에서
            근원한다. 동으로 바다, 남으로 문천의 북천 및 양덕의 남천, 서로 순천강, 북으로 영원의 북천에 이른다.

두류산 : 관북의 문천, 덕원의 제산이 여기에 근원을 두고 있다.
            동으로 바다, 남으로 안변의 진천, 서로 이천의 고성강, 북으로 문천의 북천에 이른다.

이와 같이 산경(山經)은 산의 맥을 파악하고,
산과 산의 연결, 이에 의하여 나누어진 지역들의 범위와 사방의 경계를 하천 중심으로 파악한 것이다.
특히 산의 맥과 산줄기를 알기 쉽게 순서대로 정리하고,
산으로 둘러싸인 지역적 범위를 포착하여 자연적 지형에 의한 지역권(地域圈)을 구분하여 놓아 산줄기의 체계화를 이룩하였다.
이는 전국의 산세, 하천의 흐름, 그 자락에 자리잡고 앉은 각 군현에 관한 정확하고 풍부한 문헌 지도상의 정보,
그리고 실제적 경험이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성과로 생각된다.

산수고 2 : 「산위(山緯)」와 산수고 3 :「산경(山經)」에는 각 군현별로 군현 내에 있는 주요 산 이름을 쓰고,
그 산의 위치, 산의 갈래, 기우처(祈雨處)라든가 특별히 설명할 내용을 기록하였다.
산수고 1은 군현 단위를 넘어서는 산줄기의 파악과 그 산맥으로 둘러싸인 보다 커다란 지역권을 이해하도록
되어 있었다.
산수고 2와 3은 산줄기가 대상이 아니고,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하여 개별 산이 파악의 중심 대상이다.
전국의 각 군현에 어떤 산들이 위치하고 있고, 그 산들의 연계 관계는 어떠한가,
어느 산이 군현의 주산이고 사람들에게 이용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쉽도록 군현 행정 단위별로 적은 것이다.
일례를 들면, 갑산부 : 「백두산」부의 북쪽 330리에 있다.
                               또 무산부에도 보인다.
                              「연지봉」부의 북쪽 무산과의 경계에 있다.
                               이와 같은 형식으로 갑산부에는 모두 30개의 산과 봉, 고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산수고 4 : 「수경(水經)」에는 한강부터 시작하여 전국의 주요 하천과 그 지류들의 발원지, 주요 경유처,
                합류점을 기록하고, 지류 들을 열거한 뒤 마지막에 하천의 분수계(分水系)
                 즉 하천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의 지역적 범위를 산계(山系)와 연결시켜 기록하였다.
                
한강과 임진강을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한강 : 한강의 발원지, 주요 지류, 중랑포에 이르기까지의 경유처를 기록하고,
         만초천, 죽현천, 청령포, 고교천, 월천, 섬강, 천민천, 복하천, 신은천, 왕산천, 탄천, 양재천, 중랑천,
         사천, 달천, 화양천, 괴천, 이화천, 계립천, 열운천, 신연강, 신진, 금성남천, 두타천, 소양강, 홍천강,
         조종천 등의 지류를 나열하고 설명한 다음, 마지막에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이서(以西), 철령, 분수령,
         설악산, 불곡산, 월롱산 이남(以南), 대관령, 백복령, 태백산 이서(以西), 조죽산, 속리산 이북(以北),
         피반령, 상당산, 칠현산, 백운산, 광요산, 수리산, 안남산, 문수산 이동(印). 경도(京都)의 여러 물줄기가
         이곳으로 모여 든다.

임진강 : 노치, 박달산, 설탄산, 분수령 이남(以南), 쌍령산, 여파산, 불정산, 대성산 이남(以南), 개련산,
            화개산, 수룡산, 화장산, 성거산 이동(印), 설악산, 불곡산, 홍복산, 고령 이북(以北)의 여러 산의
            물줄기가 이곳으로 들어 온다.

산수고 5, 6 : 「수위(水緯)」에는 군현별로 각 지역의 하천, 연(淵), 지(池), 진(津), 포(浦) 등의 이름과 위치,
                   명사(名士)들이 남겨 놓은 관련 기록 등을 수록해 행정 단위를 기준으로, 그리고 작은 지역 내의
                   강의 분포를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예를 들면,정선(旌善) : 「한강」현의 남쪽 2리에 있다.
                  속칭은 대음강(大陰江)이라 하였는데, 후인들이 그 이름을 단아하지 못한 것을 싫어하여
                  동강(桐江)으로 고쳤다.
                  강릉의 금강연이 현의 북쪽 40리에서 들어와 주천(紬川)이 되고, 현의 북쪽 생석촌(生石村)에
                  이르러 죽천(竹川)과 합한다.
                  (이하 생략)

산수고는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전국의 산과 강을 거시적이 안목에서 조망하여 전체적인 체계를 파악하고,
촌락과 도시가 위치한 지역을 산과 강의 측면에서 파악한 책이다.
이와 같은 산천의 체계적인 파악을 전통적 지형학이라 부를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산수고』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우리나라 산천에 관한 글들의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신경준이 이와 같은 거작을 개인적인 노력으로 완성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는 왕명에 의해 『여지편람』 『동국문헌비고』와 같은 편찬 사업을 담당하면서
그 당시 개인적으로 접하기 어려웠던 국가의 많은 문헌과 자료를 참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기본적인 자료가 되었던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반계 유형원이 편찬한 전국지리지인 『여지지(輿地志)』,
그리고 특히 각 군현의 읍지(邑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산수고』의 곳곳에서 읍지를 언급하고 있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평안도 강계부 조를 보면,
강계부 내에 위치한 산을 하나하나 설명한 다음
"폐사군(廢四郡)과 후주(厚州)에 있는 여러 산들은 읍지와 여람(輿覽 :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모두 실려 있지 않아 알 수 없다."
(산수고 2 : 「산위(山緯)」) 고 하였다.
즉 여암이 『산수고』에서 전국에 걸친 산천의 계통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던 배경은
16세기 이후 각 군현 단위로 활발하게 편찬되었던 읍지를 통해
각 지방에 관한 상세한 지역의 자연적, 인문적 환경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산경표』 : 잃어 버린 산줄기의 체계와 산줄기 이름

1910년에 설립된 조선광문회는 빼앗긴 국토와 역사의 줄기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방법으로
"조선 구래의 문헌 도서 중 중대하고 긴요한 자(者:홈지기 덧붙임. '者'는 요즘 언어로 '~ 것'정도로 보면 될 듯 )를 수집, 편찬, 개간하여 귀중한 도서를 보존, 전포함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택리지』 『도리표』에 이어서 1913년에 지리서로서 세 번째로 간행된 책이 『산경표』였다.
이 영인본의 책머리에 실려 있는 서문 겸 해제에는 이 책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우리나라의지지를 그윽히 살펴 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란하고 계통이 없다.
오직 신경준이 편찬한 『여지고』의 「산경」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 돌아 읍치(邑治)를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하지 않음이 없다.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산경표는 「산경」을 바탕으로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이 『산경표』는 바탕으로 삼은 「산경」의 금상첨화일 뿐만 아니라 지리가(地理家)의 나침반이 될 만하다."

고 하여 『산경표』를 우리나라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낸 책으로 평가하였다.
또 이 책은 신경준이 편찬한 「여지고」(『문헌비고』)의 「여지고」를 지칭) 의 「산경」을 바탕으로 하였지만
편찬자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산경표』는 신경준의 작으로 전해 올 뿐이었다.
그러나 『산경표』가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와 『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하여 작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산의 위치를 일목요연하게 표로 나타낸 지리서이다.㉳
『산경표』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1개의 대간(大幹)과 1개의 정간(正幹), 13개의 정맥(正脈)으로 조선의 산줄기를 분류하였다.
『산경표』에 실려 있는 15개의 산맥을 차례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1) 백두대간(白頭大幹) : 백두산부터 원산, 단천의 황토령, 함흥의 황초령, 설한령, 영원의 낭림산, 안변의
                                 분수령, 회양의 철령과 금강산, 강릉의 오대산, 삼척의 태백산, 보은의 속리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으로 국토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산줄기이다.

2) 장백정간(長白正幹) : 장백산에서 시작, 경성의 거문령, 회령의 차유령, 경성의 녹야현, 경흥의 백악산
                                 조산을 지나 서수라곶산에 이르는 동쪽을 향한 산줄기이다.

3) 낙남정맥(洛南正脈) : 지리산 남쪽 취령으로부터 곤양의 소곡산, 사천의 팔음산, 남해의 무량산, 함안의
                                 여항산, 철원의 청룡산, 창원의 불모산, 김해의 분산으로 이어지는 동향의 산줄기로
                                 낙동강과 남강 이남 지역에 해당한다.

4) 청북정맥(淸北正脈) : 백두 대간의 낭림산에서 시작, 강계의 적유령, 삭주의 온정령, 천마산, 철산의 백운산
                                 과 서림산성, 용천의 용골산성을 지나 의주의 미곶산에 이르는 서쪽을 향한 산줄기로
                                 청천강 이북 지역에 해당하므로 청북정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5) 청남정맥(淸南正脈) : 낭림산으로부터 영변의 묘향산, 안주의 서산, 자산의 자모산성, 삼화의 광량산까지
                                 이어지는 서남향의 산줄기로 청천강 이남지역이 이에 속한다.

6) 해서정맥(海西正脈) : 강원도 이천(이천)의 개연산에서 시작하여 곡산의 중격산, 수안의 언진산, 평산의
                                 멸악산, 송화의 달마산, 강령의 장산곶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이다.

7)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 임진강과 예성강 사이에 있는 산줄기로, 개연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신계의 화개산, 금천의 백치, 금천의 성거산, 송도의
                                                         천마산과 부소압(송악)풍덕의 백룡산을 거쳐 풍덕읍치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8) 한북정맥(漢北正脈) : 백두 대간의 분수령에서 시작, 김화의 오갑산과 대성산, 포천의 운악산, 양주의
                                 홍복산, 도봉산, 삼각산,노고산을 거쳐 고양의 견달산, 교하의 장명산에 이르는
                                 서남으로 뻗은 한강 북쪽의 산줄기이다.

9) 낙동정맥(洛東正脈) : 태백산에서 시작하여 울진의 백병산, 영해의 용두산, 청송의 주방산, 경주의 단석산,
                                 청도의 운문산, 언양의 가지산, 양산의 금정산, 동래의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남쪽으로
                                 향한 낙동강 동쪽에 있는 산줄기이다.

10)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 속리산에서 시작, 회인의 피반령, 청주의 상당산성, 괴산의 보광산, 음성의
                                               보현산, 죽산의 칠현산, 백운산에 이르는 한강 남쪽 금강 북쪽 사이의
                                               산줄기이다.

11) 한남정맥(漢南正脈) : 칠현산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돌아 안성의 백운산, 용인의 보개산, 안산의 수리산,
                                   인천의 소래산을 거쳐 김포의 북성산에서 멈춘 산줄기이다.

12) 금북정맥(錦北正脈) : 칠현산에서 시작, 안서의 청룡산, 공주의 쌍령, 천안의 광덕산, 청양의 사자산,
                                   홍주의 오서산과 월산,덕산의 가야산, 태안의 안홍진에 이어지는 금강 북쪽에 있는
                                   산줄기이다.

13)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 백두 대간의 장안치에서 남원의 수분현, 장수의 성적산, 진안의 마이산을 거쳐
                                               주화산에 이르는 서북 방향의 산줄기이다.

14) 금남정맥(錦南正脈) : 진안의 마이산으로부터 북쪽으로 뻗어 주화산을 거쳐 금산의 병산, 대둔산, 공주의
                                   계룡산, 부여의 부소산, 조룡산에 이르는 금강 남쪽의 산줄기가 이에 속한다.

15) 호남정맥(湖南正脈) : 마이산에서 시작, 전주의 웅치, 정읍의 칠보산, 내장산, 장성의 백암산, 담양의
                                   금성산성, 광주의 무등산,능주의 천운산, 장흥의 사자산, 순천의 조계산, 광양의
                                   백운산에 이르는 'ㄴ'자형의 산줄기이다.

『산경표』의 산맥 체계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대간과 정간을 제외하면 대부분 하천의 수계를 기준으로 산줄기를 나눈 점이다.
자연적으로 구분된 단위인 수계 또는 하천이 지역을 격리시키는 역할을 하는 반면에,
동시에 지역을 상호 연계시켜 주는 통로의 구실을 하는 양 측면이 있음은 흔히 지적되고 있다.
예를 들면 섬진강 양안, 즉 경상도의 하동과 전라도의 구례나 광양은 양 지역의 문화나 생활양식이 혼합되어 점이적인 성격을 보이고, 시장의 이용 등에서 교류가 빈번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수계가 기준이 되었다는 것은 산줄기를 산줄기만으로 분리시켜 고찰했다기 보다,
하천을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생활권 내지 지역권을 형성하고 있었던 인문적인 측면까지 고려했던 결과라
생각된다.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자연관 즉 자연과 인간을 분리시키지 않고 유기적인 통합체로 보는 사고와도
결부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교육되고 있는 산맥 분류 체계는
일본인 지질학자가 지질구조를 바탕으로 하여 파악한 것㉴이라는 점과 대비시켜 보면 그 특징과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형을 이해할 때 그 땅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을 포함시켰는가,
인간을 배제하고 땅 속의 구조와 지모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가㉵하는 차이의 결과는
땅을 바라보는 사고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줄 것이다.

둘째, 대간, 정간, 정맥 등으로 산줄기에 위계성을 부여한 점이다.
간은 줄기이고, 맥은 줄기에서 흘러나간 갈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위계적 차별성은 산이나 산맥의 크기와 높이, 넓이 등 물리적인 외형상의 차이에서 기본적으로
연유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물과 현상을 계층성과 차별성에 두었던
중세적인 사유, 성리학적인 사유 구조에서 말미암은 자연의 분류 체계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셋째, 산과 산의 분포, 위치를 줄기 또는 맥으로 파악하여 끊어짐이 없이 이어지는 현상을 지칭하는 것은
오늘날도 다름이 없으나, 『산경표』에 나타난 간과 맥들은 단절이 없다.
마치 혈맥이 뻗어나가 서로 통하듯이 모든 산줄기가 연결되어 있고, 산줄기와 산줄기의 결절점에 주요 산이 위치하고 있다. 현재의 산맥 체계는 지질 구조를 중심으로 하여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산맥 사이의 연결관계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에 따라 개별 산맥들이 연속되어 있지 않고 병렬적으로 존재하며,
특히 북쪽과 남쪽의 지질구조가 달라 남북한의 산맥들은 연속되지 않고 단절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중요한 차이점을 내포하고 있다.
맥으로 연결된 땅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존재이며 크게 보면 하나의 뿌리를 가진 공동체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산맥 분류는 한반도를 하나의 공동체적인 뗄 수 없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이질적인 기원과 성격을 가진 개체들의 집합으로 바라보도록 되어 있다.

넷째, 백두산이 국토의 중심 또는 출발점으로 인식되어 있는 점이다.㉶
전통적으로 국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국토의 중심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앞서 살펴 본 신경준의 『산수고』는 백두산을 중시하면서도 중심을 한양에 두고 있다.
그런데 백두산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또 다른 지역 인식 체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 인식 체계는 풍수적 사고의 영향, 청나라와의 국경 분쟁 등으로 인한 관심의 촉발,
북방 지역의 개발과 거주 확대에 따른 지역 인식의 변화, 중국 중심의 공간적 사고에서 탈피할 수 있었던
조선 후기의 일부 사조 등의 여러 측면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음말

18세기는 조선 후기 문화의 꽃이 활짝 피었던 시기였다.
17세기부터 싹을 피웠던 실학적 지리학도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실학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국토 지역의 구조가 변화함을 인식하고,
지리학의 중요성과 실용성을 주목하여 지리에 관한 저술들을 남겼다.
그러나 여암 신경준처럼 방대한 지리학 저작을 남기고,
자신의 지리적 지식을 인정받아 국가적인 편찬사업으로 연결시켰던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신경준이 편찬한 『산수고』는 우리나라의 산과 하천을 각각 12개의 분합(分合)체계로 파악한 한국적 지형학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은 산수(산수)를 중심으로 국토의 자연을 정리하였으나, 그 속에는 인간 생활과 통합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산경표』는 『산수고』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또 다른 지역 인식 체계를 보여주며, 우리가 불렀던 산줄기의 이름과 체계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렇다고 하여 지금 다시 옛 지리학의 체계로 돌아가자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과거, 전통과 같은 문화의 원형을 정확히 알고,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조화를 이룰 것인가를 모색해 보는 출발점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창조와 발전은 원형의 올바른 인식에서 출발한다.
국토를 이해했던 우리의 원형적 사고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그래서 더욱 절실하다.
고전은 그 원형을 전해주는 문화 유산이다.
『산수고』와 『산경표』는 우리 국토의 자연 체계와 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고전이다..

                   월간 『토지연구』 (3권 3호, 1992, pp 135~145.),『백두대간 관련 문헌집』(1996. 산림청)에 재수록.

주)-------------------------------
㉮ 그러나 『산수고』는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의 '산천'조와 내용이 거의 동일하기 때문에
누락된 부분을 보충하여 이해할 수 있다.

㉯ 『동국문헌비고』(이하 『문헌비고』라 칭함)에는 열 한번째 산으로 장안산(長安山)을 기록하였다.
『산수고』에 기록된 지명으로 보아 『산수고』는 『문헌비고』의 편찬이 완료된 후 만년에 다시 저술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 조와 『산수고』,
그리고 전술한 고려대학교 도서관의 수택본과의 비교 고찰은 별도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 『여암전서』 권10 『산수고』.
신경준이 주관하였다 하더라도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반영되고,
국가적이 기준이 강하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문헌비고』의 「여지고」에는
백두산을 조종으로 하여 백두산으로부터 우리나라 산천의 체계가 시작되는 것으로 기록하였다.

㉱ 특히 1757년 ~ 1765년 사이에 편찬된 각읍 읍지를 수록한 『여지도서』55책은
거의 같은 시기에 전국의 모든 읍에서 작성하여 상송한 전국 읍지였으므로 많은 참고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밖에 개인 저술로는 고려, 조선의 문필가들이 남긴 시문, 그리고 유형원의 『여지지』 등이 인용되었다.

㉲ 박용수 해설. 1990.
『산경표』에서는 이 책의 저자를 신경준으로 편찬 시기를 1769년(영조 45)경이라고 단정하였다.
이의 근거는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는 장서각 도서인 『여지편람』(2책, 필사본)의 내제(內題)가 "산경표"로 되어 있고,영조가 1769년에 신경준에게 『여지편람』의 감수를 맡겼던 기로게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정가당문고에 전하고 있는 같은 제목의 『여지편람(輿地便覽)』은 전혀 다른 내용의 6책으로 된 조선 지도책이며 영조가 『동국문헌비고』 편찬의 과정을 설명하면서
『여지편람』의 범례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다고 언급한 점등을 고려해 볼 때
『산경표』의 저자를 신경준으로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보다 신중한 검토가 있어야 하리라고 생각된다.
또한 『산경표』의 바탕에 자리잡고 있는 풍수사상을 신경준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점 등도 참작할 필요가 있다.

㉳ 책의 내제(內題)가 『산경표』로 되어 있는 여러 이본(異本)이 있다.
규장각도서에는 『산경표』 『산리고』 『기봉방역지』라는 이름의 책들이 있고, 장서각 도서에 『여지편람』이 있다.
이들 『산경표』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하나 부분적으로 상이한 곳들이 있으며,
도로고에 해당하는 『정리표(程里表)』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가의 여부에서 차이가 있다.

㉴ 1900년대 초부터 일본인 지질학자들이 한국의 지질과 지형을 많이 연구하였는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분류체계는 동경제국대학의 고또(小藤文次郞)가 1903년에 슨 논문에서 제시하였던 틀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 김주환, 1979, 「일본 지질학자들의 한국 지질 지형관 편모(片貌) - 1900 ~ 1945년을 중심으로」p247. 'Koto.B(1903)에 의하면 한반도는 지질학적으로 원산 강화를 연한 열곡(裂谷)을 경계로 북한과 남한이 구분되며 이 열곡이 추가령지구대이다.....

㉶ 이 점은 박용수, 앞책, 27쪽, 29쪽에도 강조되어 있다.

㉷ 양보경, 1987, 「조선시대 읍지의 성격과 지리적 인식에 관한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p.131.

  홈지기 덧붙임)
이 글은 백두대간을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태백산맥은 없다』에서도 많이 인용되거나 활용된 자료입니다. 양보경님의 글은 이후 「조선시대의 자연 인식 체계」(『한국사 시민강좌』14집, 1994)와 「여암 신경준의 지리사상」(「월간 국토」99년 5월호. '백두대간 사람/삶'메뉴의 같은 제목으로 실려 있음.)이라는 논문으로 이어집니다.
「조선시대의 자연 인식 체계」는 '백두대간과 만나다'메뉴에 실려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05/09 최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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