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우리땅줄기 백두대간 본문
우리 땅 산줄기 백두대간
2002. 9. 6. ~ 11. 15.
현 진 상
목차
1.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1. 1 백두대간의 개념
1. 2 백두대간의 실체
2. 『산경표』(山經表)란
2. 1 우리나라 산의 족보
<그림 1>
2. 2 산줄기 15개 - 1대간, 1정간, 13정맥
<그림 2>, <그림 3>, <그림 4>, <표 1>
2. 3 『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3.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과 기록
3. 1 백두산에 대한 인식
3. 2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
3. 3 지리지(地理誌)의 산천 인식체계
<표 2>
3. 4 지도의 산줄기 표현
<그림 5>, <그림 6>, <그림 7>
4. 백두대간의 복원과 보전
4. 1 백두대간은 어떻게 다시 알려졌나
4. 2 백두대간을 복원하라는 말은
4. 3 보호·보전의 필요성
4. 4 백두대간의 실태
4. 5 보호·보전을 위한 노력
5. 산맥(山脈)이란
5. 1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
<그림 8>, <그림 9>
5. 2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차이
5. 3 그렇다면 산맥은 버려야 하나
6. 백두대간 돌아보기
그림 및 표
<그림 1>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1쪽
<그림 2> 현대지도를 이용한 산경도(이우형)
<그림 3> 백지도를 이용한 산경도(현진상)
<그림 4> 나무에 비유한 대간·정간·정맥
<표 1> 『산경표』의 산줄기 분류체계
<표 2> 12종산과 12종강
<그림 5>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중 우리나라 부분
<그림 6> 「조선방역지도」(이이)
<그림 7> 「대동여지도」(김정호)
<그림 8> 현대지도를 이용한 산맥도
<그림 9> 백지도를 이용한 산맥도
1. 백두대간(白頭大幹)이란
백두대간 ! 그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백두산을 떠올리게 되고, 커다란 기운과 위용을 느끼며,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을 처음 들으면서 다소 생소하게 여기는 사람조차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의 정신세계 내면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백두산에 대한 독특하면서도 공통적인 정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이며,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물줄기에 의해 한 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을 신성시하여, 많고 많은 산 가운데서도 으뜸이 되는 산[宗山]으로 여기는 데서 형성되기 시작한 지리적 개념이요, 이 땅을 대표하는 산줄기 이름이다.
백두대간은 국토를 남북으로 내닫는 대동맥이며, 동해로 흐르는 물과 서해로 흐르는 물을 갈라놓는 대분수령이며, 14개 정간·정맥의 모태이며, 모든 강의 발원지이며, 한반도 산지 분류체계의 상징이며, 한민족의 인문·사회·문화·역사의 기반이며,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대표 산줄기이다.
1. 1 백두대간의 개념
백두대간에 대한 개념과 정의는 아직까지 이렇다 하게 정립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사람마다 백두대간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토대로 이렇게 저렇게 말하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백두대간은 1800년 경에 편찬된 『산경표』라는 책에 실린 백두대간을 말한다. 따라서 백두대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산경표』가 이 땅의 산지를 분류한 방법에 따라 백두대간을 바라보아야 하며, 『산경표』의 시각에 따라 백두대간의 본질적 속성을 파악하고, 그 속성에 합당한 지리적 범위를 제시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백두대간에 대한 개념을 몇 가지로 분류하여, 그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리적 범위를 살펴보기로 하자.
① 가장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 - 전통적 국토지리 인식체계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산과 강이 정연한 원칙에 따라 어우러져 있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로 바라보았다. 전통적 지리 인식체계에서는 산의 흐름을 살아있는 나무에 비유하여, 기둥줄기와 큰 줄기, 그리고 작은 줄기와 곁가지로 나뉘는 것으로 보았고, 줄기와 줄기 사이, 가지와 가지 사이에 강이 생성되어 흐르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국토’를 달리 표현할 때에는 산천(山川), 산수(山水), 산하(山河), 강산(江山) 등과 같이 ‘산’과 ‘물’을 함께 일컬어 ‘나라 땅’을 나타내었다.
이렇게 산과 물이 어우러지는 원리를 ‘산수경(山水經)의 원리’, ‘산수분합(山水分合)의 원리’ 또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리’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원리로 전통적 자연관, 산천관, 지리관, 국토관을 설명한다. 백두대간은 이러한 전통적 국토지리 인식체계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나무 한 그루, 곧 국토 전체를 의미한다.
②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 - 중심 산줄기와 그 부속 산지
『산경표』가 분류하고 있는 1대간(大幹)·1정간(正幹)·13정맥(正脈) 중 1정간·13정맥과 그 정간·정맥에 딸린 부속 산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백두대간으로 보는 개념이다. 이 경우의 백두대간은 기둥줄기와, 이에 부속된 기맥(기脈) 또는 지맥(支脈)을 모두 포함하게 된다. 백두대간에서 정간·정맥이 갈라져 나가듯이 정간과 정맥에서도 수많은 갈래가 나뉘어 뻗으며, 백두대간에서도 정간·정맥 이외의 수많은 갈래가 뻗어나간다. 마치 큰 나무의 기둥줄기에서 굵은 가지가 뻗어나가고, 가지마다 곁가지가 있고, 기둥줄기에서도 곁가지가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나무에서 굵은 줄기만을 잘라내고 기둥줄기에 붙은 곁줄기와 곁가지를 모두 남겨둔 모양으로 비유할 수 있다.
『산경표』는 이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에 산과 고개 이름 464개를 수록하고 있으며, 정맥에 준하는 규모를 가진 산줄기와 함께 수많은 갈래가 포함되어 있어, 단일한 산줄기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③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 - 중심 산줄기
백두산을 뿌리로 하여 원산~낭림산~두류산~분수령~금강산~오대산~태백산~속리산~장안산~지리산에 이르면서 한 번도 물줄기에 의해 잘리지 않고 이어져 내리는 큰 산줄기를 일컫는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단일한 산줄기로서 ‘백두대간’이라는 고유명사를 가지게 되는 ‘연속된 산지체계’이다. 정간과 정맥은 물론 작은 갈래까지 모두 제외한, ‘산지 분류체계의 중심(척량, 등뼈) 산줄기’로서 대표성을 가지게 된다.
『산경표』는 백두산에서 지리산에 이르는 이 백두대간의 산과 고개를 123개 항목(이름은 124개)으로 표현하고 있다. 나무에서 모든 줄기와 곁가지를 잘라내고 남은 기둥줄기에 비유할 수 있다. 이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에서 백두대간의 지리적·공간적 실체와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난다.
④ 가장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 - 종주 산행의 노선, 분수계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지도상의 거리로 약 1,625km에 달하며, 남한의 지리산에서 진부령까지 약 690km에 이르는 장대한 산줄기라고 알려진 개념이다. 그런데,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이 개념의 백두대간은 가장 좁은 의미를 갖는다. 이 경우의 백두대간은 ‘연속된 산지체계(mountain system)’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산지의 ‘정상부 능선(稜線, ridge line)’을 따라 걷는 ‘종주 산행 노선(trail)’과 그 길이를 일컫는 것이다.
흔히 산악인들이 ‘백두대간을 종주한다’고 하는 것은 ‘분수령’(分水嶺)이 아닌 ‘분수령의 정상부 능선(마루금, ridge line)’, 곧 분수계(分水界, divide line) 또는 분수 능선(分水稜線)을 산행 노선으로 삼는 ‘산행 유형’의 하나이다. 백두대간의 존재가 처음 알려지기 시작하던 시기에 한국대학산악연맹 소속 대학생들이 그 실체를 확인하는 의미에서 종주 답사한 이후, 그 보고서를 연맹 회보에 실은 것을 계기로 산악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지고, 산행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종적(縱的)인 개념만 가질 뿐 횡적(橫的)인 개념을 내포하지 않으며, 넓이(area)나 규모(입체, mass)를 생각할 수 없어 산지(山地, mountain zone, mountain land, upland)의 지리적 범위를 설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1. 2 백두대간의 실체
‘백두대간’과 ‘백두대간 종주 노선’은 그 개념을 서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산과 등산로를 동일시할 수 없듯이, 설악산과 설악산의 특정 등산로를 동일시할 수 없듯이, 백두대간이라는 산줄기와 백두대간의 종주 노선은 서로 동일시할 수 없는 존재이다. 백두대간을 ‘점(點)과 점을 연결하는 선(線, line)’으로 이해하려 하면 그 지리적·공간적 실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지도에 산을 나타낼 때 산의 정상부(peak)에 ▲기호와 함께 산 이름을 표기한다고 하여 그 삼각점(peak point)만을 산으로 볼 수는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고갯마루에 고개(pass) 이름을 표기한다고 하여 그 고갯마루를 고개로 인식하는 것은 잘못이다. 산과 고개는 산등성이의 정상부에 있는 특정 지점(point)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평지로부터 출발하여 그 사면(斜面)을 오르고 정상이나 고갯마루를 지나 반대편 사면을 통하여 다시 평지에 내려서는 전구간을 뜻한다. 곧 종(縱)으로 늘어선 산지에서는 그것을 횡(橫)으로 가로지르는 길[路]이 고개이다. 그리고 ‘능선’(稜線)이라는 말도 사면(斜面)을 포함하는 ‘산릉’(山稜, 산등성이, ridge)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고 그 ‘정상부 능선(산날, 마루금, ridge line)’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백두대간의 개념과 지리적 범위를 이해하려면 우선 이러한 사실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백두대간은 ‘산-고개-산-고개-산-고개……’로 이루어진 ‘연속된 산지체계’이다. 백두대간은 남북으로 길이를 가지면서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하며, 동서로 폭(width)을 가지면서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수없이 반복하는 연속된 산지체계(mountain system)이다. 지도에서는 넓어졌다 좁아지기를 반복하는 면(面)과 면의 연결 구조로서 장대한 띠[帶, belt] 모양[帶狀]을 이루며, 지상에서는 넓고 높은 공간적 규모(입체, mass, body)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백두대간의 본질적 속성이다. 백두대간의 실체는 ‘지대’(地帶, zone)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백두대간이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線)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설악산의 경우 ‘미시령~황철봉~저항령~마등령~공룡능선~대청봉~끝청봉~한계령……의 정점을 잇는 능선’으로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산경표』는 이 구간을 ‘미시파령(미시령)~설악산~오색령(한계령)……’으로 기록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백두산 전체 …… 미시령 전구간, 설악산 전체, 한계령 전구간 …… 오대산 전체 …… 지리산 전체’로 이루어진 ‘연속된 산지체계’이지, 결코 특정 산의 특정 산릉(山稜, ridge)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며, 특정 능선(ridge line)으로 이루어진 산행 노선(trail)도 아니며, 선(line) 자체는 더욱 아니다.
어느 산의 주봉(主峰)이나 정점(頂點)이 백두대간이나 정맥의 주능선(마루금, ridge line)에서 벗어나 있는 것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를 『산경표』의 오류 또는 부정확한 사례로 지적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산경(山經)의 구조를 잘못 이해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산경표』의 산줄기 구조는 어느 산의 주봉(主峰)이나 정점(頂點)이나 주능선(主稜線)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산 전체를 포함하는 구조이다. 어느 산 하단의 아주 짧은 한 구간만이라도 그 줄기에 포함되어 물을 가르는 분수령(分水嶺) 역할을 하고 있으면 그 산 전체를 거쳐가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하기 때문에 개별(특정) 산의 주향(走向)은 정간·정맥의 주향과 항상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대간·정간·정맥은 개별 산의 특성을 뛰어 넘어 ‘산지의 연속된 체계’로서 큰 물줄기의 분수령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은 ‘분수령(分水嶺) 역할을 담당하는 산지의 연속된 체계’이다. ‘산’이란 ‘주변의 평지보다 우뚝하게 높이 솟아 있는 지형’을 말하며, 그러한 지형이 연속되어 있어 물의 흐름을 양쪽으로 갈라놓는 역할을 할 때 그 연속된 산지를 ‘분수령’(분수 산줄기)이라고 한다. 이에 비하여 ‘분수계’(分水界, divide, divide line)란 분수령(분수릉) 정상부의 무수한 지점(point)과 지점을 연결하는 선(line)으로서,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경계선을 의미한다. 따라서 대간·정간·정맥(great mountain chain, mountain range, mountains) 체계와 분수계(divide line)를 동일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분수계’는 대간·정간·정맥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의 하나일 뿐이다. 백두대간은 합당하고도 온당한 지리적(geographical) 범위(domain, zone)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거대한 자연환경의 장(場, field)이며, 생태의 장이며, 스스로 살아있는 자연이다.
2. 『산경표』(山經表)란
2. 1 우리나라 산의 족보
‘산경’(山經)이란 산의 경과(經過), 즉 산의 흐름을 천(직물)의 날줄(날실)에 비유한 말이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이다.
백두산(白頭山)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기둥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하고, 이 기둥줄기로부터 뻗어나간 2차적 산줄기를 정간·정맥으로 분류하고 이름을 붙여,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대간·1정간·13정맥으로 체계화하였으며, 이 줄기에서 갈라져 나간 크고 작은 갈래의 산·고개·일반 지명을 산줄기별로 분류·나열하여 도표로 만들었다. 편집체제를 마치 족보와 같이 하였는데, 백두산을 1세 할아버지로 친다면 지리산은 123세 손이며 가장 길게 뻗어나간 줄기의 마지막 자손은 전남 광양의 백운산으로서 171세 손이 된다. 『산경표』는 한 마디로 우리나라 산의 족보이다.
『산경표』(山經表)는 『해동도리보』(海東道里譜), 『기봉방역지』(箕封方域誌), 『산리고』(山里攷, 이상 서울대학교 규장각), 『여지편람』(輿地便覽)(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해동산경』(海東山經, 국립중앙도서관)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된 책의 일부로서 □정리표□(程里表, 道里表)와 함께 전해온다. 모두가 한문으로 된 필사본이며, 필자와 연대를 밝히지 않았고 서문이나 발문도 싣지 않고 있다.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가 단행본으로 펴낸 『산경표』(山經表)는 한문본이기는 하지만 활자화되어 있어 비교적 읽기가 쉬운 편이다. 조선광문회는 육당 최남선이 주축이 되어 우리 고전(古典)의 보존과 보급을 통해 민족문화를 선양할 목적으로 1910년 12월 만들어진 단체이다. 이 조선광문회가 최성우(崔誠愚) 소장본을 바탕으로 1913년 2월 간행한 활자본 『산경표』를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라고 부른다.(<그림 1> 참조) 잡지만한 크기(28.7×18.3㎝)이며, 102쪽(원문에는 頁[혈]이라 표기)으로 되어 있다. 산·고개·일반 지명 1,580개 항목을 싣고 있는데, 누락 사항 등을 정리하면 산 1,139개, 고개 411개, 일반 지명 61개 등 모두 1,611개 항목이 된다. 후에 이 책을 영인하여 발간한 것도 있고, 최근에는 한글로 옮긴 책도 나왔다.
▼ <그림 1> 조선광문회본 『산경표』 1쪽
2. 2 산줄기 15개 - 1대간, 1정간, 13정맥
이제 정간과 정맥이 무엇인지 이름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대간은 백두대간,
1정간은 장백정간,
13정맥은 낙남정맥, 청북정맥, 청남정맥, 해서정맥, 임진북예성남정맥, 한북정맥, 한남금북정맥, 한남정맥, 금북정맥, 낙동정맥,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다.
정간(正幹)과 정맥(正脈)이란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간 2차적인 산줄기로서 백두대간보다 규모와 세력이 작기는 하지만 큰 강을 구획하는 산줄기들이다. 이 산줄기들에 의해 두만강,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의 수계(水系) 또는 그 유역(流域)이 결정된다.
『산경표』에서 백두대간을 비롯한 15개 산줄기를 분류한 원리 또는 원칙은 ‘산을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는 지극한 상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이것이 우리나라의 산천(관)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원리요 원칙이 된다. 산줄기를 분류한 원리와 이름을 붙인 원칙도 이에 따랐다. 한강 북쪽의 산줄기는 한북정맥, 남쪽의 산줄기는 한남정맥이다. 분수령이나 유역릉을 가리킬 때의 대간·정간·정맥은 각각의 본줄기만을 의미하는 좁은 의미의 대간·정간·정맥이다. 이때의 백두대간은 정간?정맥과 기둥줄기에 딸린 수많은 갈래를 제외하는 개념이며, 정간·정맥 또한 그 부속 산지인 갈래를 제외하는 개념이다. 이 좁은 의미의 산줄기 15개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림 2>, <그림 3>, <그림 4> 참조)
① 백두대간(白頭大幹) :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남쪽으로 무산의 허항령과 갑산의 보다회산을 지나 길주의 원산(圓山)에 이르며, 이곳에서 동쪽 장백산을 통해 장백정간을 갈라놓는다. 갑산의 황토령, 북청의 후치령, 함흥 북쪽의 황초령을 지나 영원의 낭림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을 흘려놓는다. 정평의 상검산을 거쳐 영흥의 철옹산까지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양덕의 오강산을 거치고, 문천의 두류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해서정맥을 내려놓는다. 덕원의 마식령, 안변의 백학산을 넘어 평강의 분수령에 이르며, 이곳에서 남쪽으로 한북정맥을 흐르게 한다. 북상하여 안변 남쪽 철령을 지나고, 고성의 온정령을 지나 금강산에 이른다. 남쪽으로 간성의 진부령, 인제의 미시령, 양양의 설악산, 강릉의 오대산과 대관령, 삼척의 백복령과 두타산을 지나 태백산에 이르며, 그 북쪽에서 낙동정맥을 남쪽으로 보낸다. 서남쪽으로 풍기의 소백산을 지나 순흥의 죽령, 문경의 조령, 보은의 속리산에 다다라 서쪽으로 한남금북정맥을 놓아보낸다. 남쪽으로 황간의 추풍령, 지례의 삼도봉, 무주의 덕유산, 장수의 육십령을 거쳐 장안산에 이르고, 여기서 서쪽으로 금남호남정맥을 출발하게 한다. 안의의 백운산과 운봉의 여원치를 거쳐 지리산에 이르러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며, 남은 기운을 취령을 거쳐 낙남정맥(정간)으로 흐르게 한다. 한 번도 물줄기에 의해 잘리지 않고 이어내려 오면서 양쪽으로 물을 가르고 산줄기를 흐르게 하는 중심 산줄기이다.
② 장백정간(長白正幹) : 백두대간의 원산(圓山)에서 장백산을 거쳐 동북쪽으로 뻗어 함북 경성의 거문령, 부령의 정탐령, 회령의 엄명산, 종성의 녹야현, 경흥의 백악산을 지나 두만강 하구 남쪽 서수라곶산에서 멈춘다. 함경북도를 서남쪽에서 동북쪽으로 가로지르는 이 산줄기 서북쪽의 물은 두만강으로, 동남쪽의 물은 동해로 흐른다.
▲ <그림 3> 백지도를 이용한 산경도(현진상)
▲ <그림 4> 나무에 비유한 대간·정간·정맥(월간 산 1994. 3.)
③ 낙남정맥(洛南正脈) : 백두대간의 끝 지리산에서 취령을 거쳐 동남쪽으로 흐르면서 경남 곤양의 소곡산, 사천의 팔음산, 고성의 무량산에 이르고, 동북쪽으로 진해의 여항산, 창원의 청룡산과 불모산을 지나 김해의 분산(盆山)까지 흐른다. 낙동강 남쪽을 에워싸는 산줄기이다. 그 서쪽의 물은 섬진강으로, 남쪽의 물은 남해로 흐른다. 장서각본 『산경표』에는 낙남정간(洛南正幹)으로 표기되어 있다.
④ 청북정맥(淸北正脈) :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을 거쳐 서쪽으로 뻗으면서 평북 강계 남쪽의 적유령과 구현, 운산의 월은령, 삭주의 온정령과 천마산, 철산의 백운산, 용천의 용골산을 지나 신의주 남쪽 미곶산에 이른다. 청천강 북쪽, 압록강 남쪽 산줄기이다. 고려 덕종 때(1032~1034년) 축조한 천리장성은 이 청북정맥의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것이다.
⑤ 청남정맥(淸南正脈) :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영원의 지막산을 거쳐 서남쪽으로 흘러 평북 희천의 묘향산에 이른 후, 계속 서남쪽으로 평남 덕천의 장안산, 개천의 백운산, 안주의 마두산, 숙천의 함박산, 자산의 황룡산, 순안의 자모산과 법흥산, 영유의 미두산, 증산의 국령산, 함종의 호두산, 용강의 봉곡산과 오석산을 거쳐 삼화의 증악산까지 뻗는다. 청천강 남쪽, 대동강 북쪽 산줄기이다.
⑥ 해서정맥(海西正脈) :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강원도 이천의 개련산(開蓮山)까지 흐르고(『산경표』에는 이 구간에 대한 명칭이 없으나 산줄기의 연속성을 고려하여 해서정맥에 포함한다.), 이곳에서 황해도 곡산의 덕업산과 증격산을 거쳐 북상하다가, 서쪽으로 수안의 언진산과 천자산, 남쪽으로 서흥의 오봉산과 황룡산, 평산의 멸악산과 성불산을 지나고, 다시 서쪽으로 해주의 창금산과 북숭산, 신천의 천봉산, 송화의 달마산, 장연의 불타산을 지나 장산(곶)까지 뻗는다. 대동강 남쪽, 예성강 북쪽 산줄기이다.
⑦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 해서정맥의 개련산에서 남쪽으로 황해도 신계의 기달산으로 갈라져 나와 서남쪽으로 흐르면서 화개산과 학봉산을 지나고, 금천의 수룡산과 성거산을 거쳐 경기도 개성의 천마산과 송악산을 지나 풍덕의 백룡산에 이른다. 이름 그대로 임진강 북쪽, 예성강 남쪽 산줄기이다.
⑧ 한북정맥(漢北正脈) :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강원도 평강의 백빙산으로 갈라져 나와 김화의 오신산, 불정산, 대성산, 경기도 포천의 운악산, 양주의 홍복산, 도봉산, 삼각산(북한산), 노고산을 지나고, 고양의 견달산을 거쳐 교하의 장명산에 이른다. 한강 북쪽, 임진강 남쪽을 흐르는 산줄기이다.
⑨ 낙동정맥(洛東正脈) : 태백산에서 서남쪽 소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태백산 북쪽에서 벗어나, 경북 울진의 백병산과 평해의 백암산, 영덕의 용두산, 청송의 주방산(주왕산)을 지나고, 줄기차게 남쪽으로만 달려 경주의 단석산, 청도의 운문산, 언양의 가지산, 양산의 취서산, 동래의 금정산을 지나 엄광산에서 멎는다. 낙동강 동쪽 산줄기이며, 그 동쪽의 물은 모두 동해로 흐른다.
⑩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 백두대간의 속리산에서 시작해 회유치를 지나 충북 보은의 피반령, 청주의 상령산, 괴산의 보광산, 음성의 보현산, 경기도 죽산의 칠현산에 이르러 북으로 한남정맥을, 남으로 금북정맥을 갈라놓는다.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을 합친 이름이며, 한강 남쪽, 금강 북쪽 산줄기이다.
⑪ 한남정맥(漢南正脈) : 한남금북정맥의 칠현산에서 경기도 안성의 백운산을 거쳐 북으로 용인의 보개산, 수원의 광교산을 지나 안양의 수리산에 이르고, 다시 서북쪽으로 인천의 소래산과 주안산에 이르고, 서북쪽으로 김포의 북성산과 가현산을 지나 통진의 문수산에 이른다. 한강 남쪽 산줄기이다. 그 서쪽의 물은 서해로, 남쪽의 물은 진위천과 안성천으로 흐른다.
⑫ 금북정맥(錦北正脈) : 경기도 죽산의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안성의 청룡산을 거쳐 충남 직산의 성거산, 천안의 차령, 온양의 광덕산, 청양의 사자산과 백월산에 이르고, 북쪽으로 보령의 오서산, 덕산의 수덕산, 해미의 가야산을 지나 서산의 성왕산에 이르고, 서쪽으로 팔봉산을 지나 태안의 지령산에 이른다. 금강 북쪽 산줄기이다. 그 북쪽의 물은 무한천과 삽교천, 곡교천, 그리고 서해로 흐른다.
⑬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 백두대간의 장안산(영취산)에서 전북 남원의 수분현, 장수의 팔공산을 거쳐 진안의 마이산에 이르고, 주줄산 쪽으로 금남정맥을, 웅치 쪽으로 호남정맥을 갈라놓는다.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을 합친 이름이며, 금강 남쪽, 섬진강 북쪽 산줄기이다.
⑭ 금남정맥(錦南正脈) : 금남호남정맥의 마이산에서 서북쪽 주줄산을 거쳐, 충남 금산의 병산과 대둔산, 공주의 계룡산을 거쳐 부여의 부소산에 이른다. 금강 남쪽 산줄기이다.
⑮ 호남정맥(湖南正脈) : 진안의 마이산에서 웅치를 거쳐 서남쪽으로 태인의 묵방산, 정읍의 내장산, 동남쪽으로 장성의 백암산, 남쪽으로 담양의 금성산, 광주의 무등산, 능주의 천운산과 화악산, 장흥의 사자산에 이르고, 동쪽으로 보성의 주월산, 순천의 조계산을 지나 광양의 백운산에 이른다. 크게 디귿(ㄷ)자 모양을 이루면서 안쪽(동쪽)으로 섬진강을 에두르며, 바깥쪽(서쪽)으로는 만경강, 동진강, 영산강, 탐진강을 흐르게 한다.
이 산줄기 분류체계를 간단하게 도표로 만들어 보이면 다음 <표 1>과 같다.
『산경표』의 산줄기 이름은 산 이름을 사용한 것이 2개(백두대간, 장백정간), 지방 이름을 사용한 것이 2개(해서정맥, 호남정맥)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강 이름을 사용하였다. 눈에 보이는 지형을 중심으로 물줄기와 연계하여 분류한 것으로서, 다음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백두산을 국토의 출발지로 인식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는 영토의식을 확립하였다.
둘째, 산줄기를 1대간 - 1정간 - 13정맥으로 위계(位階)를 두어 분류하고 이름을 붙였다. 장백정간 외에 낙남정맥을 낙남정간(洛南正幹)으로 표기한 사본이 있는데, 이에 대한 견해가 다양하다. 2정간을 우리나라 산줄기의 종지(宗枝, 직계손)로 보고 나머지 12정맥을 파지(派枝, 지차손)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왕·3정승·6판서 등의 서열 의식과 비슷한 맥락으로 보는 견해, 한의학의 12정경·15낙맥·기경8맥 등과 같이 당시 사람들이 인체와 자연을 동일선상에서 해석하던 전통과 관련시키는 견해, 정간과 정맥은 산줄기의 격(格)이나 규모 또는 이름을 붙이게 된 동기와는 관련이 없으므로 이것들의 의미를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견해 등이다.
셋째, 산의 흐름을 줄기[幹]와 갈래[派]로 파악하되 반드시 하천의 수계(水系)를 기준으로 하였다. 산줄기의 흐름이 물줄기에 의해 끊기지 않고, 강과 강이 산줄기에 의해 구분된다. 산줄기는 산에서 산으로만 이어지고 물을 만나는 곳에서 멈추며, 물줄기는 양쪽의 두 줄기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 모으며 큰 강을 이루고 결국은 바다에 닿는다.
다음으로, 『산경표』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한 몇 가지를 부연 설명해 둔다.
첫째, 『산경표』의 산줄기들이 모두 강의 하구까지 연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금남정맥은 명실상부한 ‘금강 남쪽 분수령’이 되지 못한다. 어느 구간을 줄기로 보고 어느 구간을 갈래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산세를 중요시하는 시각과 분수령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시각이 있을 수 있는데, 『산경표』에는 이 두 가지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산줄기의 세력으로 보아 정맥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이름을 갖지 못한 구간이 있다.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개련산에 이르는 구간은 해서정맥에 포함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오대산에서 태기산을 거쳐 양평의 마현산에 이르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을 구획하는 구간을 가칭하여 한중정맥, 한강기맥, 계방지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양수(兩水)정맥이라고 부르는 것을 고려해 볼 만하다. 남한강과 북한강 두 물줄기[兩水]를 나누는 분수령이며, 두[兩] 물[水]이 만나는 곳이 양수리(兩水里, 두물머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것이다. 북한은 오대산 두로봉에서 원주의 황학산에 이르는 구간을 계방산줄기라고 명명하고 있다.
셋째, 산줄기의 끝 부분, 즉 마지막 산에 관한 사항이다. <표 1>에서 조금 작은 글씨로 (괄호) 안에 넣어 표기한 지명들은 산의 줄기나 갈래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광량진(鎭)과 안흥진은 군대의 진영(鎭營), 풍덕치(治)는 풍덕부(府)의 치소(治所), 해옹암(巖, 해옹지험은 오류)과 조룡대(臺, 조룡산은 오류)는 바위섬, 몰운대(臺)는 해안의 기암괴석이다. 이런 지명들은 어느 산 지표상(地表上)의 한 지점, 또는 어느 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지표물(指標物)로 보아야 한다. 낙동정맥의 경우 엄광산~몰운대를 잇는 구간이 끝까지 분수령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몰운대를 정맥의 끝으로 보는 것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정맥의 마지막 산은 엄광산으로 보고 몰운대는 산의 세력이 다하여 바다를 만나는 한 지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몰운대는 신라 이전에는 섬이었다는 설(기록)도 있다.
넷째, 산 이름과 행정구역 명칭은 모두 옛 이름이며, 산의 흐름을 기술하면서 때로는 상세히 적기도 했고 때로는 과감하게 생략하기도 했다는 점 등이다.
2. 3 『산경표』는 언제 누가 만들었나
『산경표』는 1770년(영조 46)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1800(순조 즉위)년 경에 누군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산경표』를 1769년 신경준이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이다. 신경준은 『산경표』의 원전이 된 「여지고」를 집필한 것은 사실이지만 『산경표』를 직접 만든 것으로는 볼 수 없다.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산경표』가 1770년에 편찬된 『문헌비고』를 직접 거론하고 있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산경표』는 『문헌비고』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는데, 신경준이 자신의 오류를 지적하는 글을 자신의 또 다른 책에 썼다고 볼 수는 없다.
둘째, 『산경표』는 ‘영종 45년’이라는 연대를 사용하고 있다. ‘영종’(英宗)은 ‘영조’(英祖)의 원 묘호(廟號)이며 영종 45년은 서기 1769년이다. 영조는 재위 52년(1776)에 타계하였으므로 조선조 21대 임금을 ‘영종’으로 부르거나 기록할 수 있었던 시기는 1776년 이후이다. 그러므로 『산경표』는 1769년에 출현할 수 없는 책이다.
셋째, 『산경표』는 1776년에 개칭된 평안도 초산(楚山)과 1800년에 개칭된 함경도 이원(利原)이라는 지명을 사용하고 있고, 같은 1800년에 개칭된 충청도의 노성(魯城)을 종전의 이성(尼城)으로 표기하고 있다. 또 『여지편람』(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의 곤책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에는 1795(정조 19)년에 개칭된 시흥(始興), 1796년에 완공된 수원의 화성(華城), 1800년에 개칭된 노성(魯城)이라는 지명도 사용하고 있다.
넷째, 『산경표』의 산줄기와 갈래는 「여지고」의 「산천 총설1」과 전면적으로 일치하며, 일부 인용문은 원문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확인된다. 「여지고」의 「산천 총설1」에는 백두대간을 비롯한 산줄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을 뿐이지, 산줄기의 분류체계는 이미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다섯째, 『산경표』는 「산천 총설1」 원문의 지명이 중복된 것을 알고 수록하지 않은 흔적이 있고, 원문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하고 그대로 반영하기도 하였으며, 후에 『증보문헌비고』(1908)에 증보된 사항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과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생존 시기를 비교해 보면 『산경표』를 만든 사람은 신경준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산경표』를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3.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과 기록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뻗어내린 큰 산줄기’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백두대간이라는 명칭에는 백두산을 국토 산천의 출발지로 보는 시각이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 신화의 출발지이며, 신성한 산의 대표이며, 영토의 중심이었다. 백두산은 고조선 왕조의 시발지이며, 고구려의 영토이며, 발해의 영토였다. 발해가 우리 민족이 세운 국가였다는 점에서, 당시까지 백두산은 분명 우리 영토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조(남북국) 시대라고 일컫는 시각에서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어나간 여러 개의 산줄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그런 의미에서 백두대간의 지리적 영역을 확장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칠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의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오직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만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어 있고, 그 중에서도 현실적으로는 남한 구간만을 대상으로 지칭해야 하는 정치적 한계에 부딪히게 되기도 한다.
이제, 우리 민족에게 백두산이 어떠한 존재인지, 국토의 출발지로 인식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는 언제부터 사용되었고, 어떻게 구체화되었으며, 국토지리를 파악함에 있어 산의 흐름이 모두 이어져 있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언제부터인지, 『산경표』는 어떻게 출현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3. 1 백두산에 대한 인식
백두산은 태백산(太白山), 장백산(長白山), 불함산(不咸山)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편에 실린 단군신화의 배경인 태백산이 백두산이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백두산을 신성시한 것은 고조선 시대부터였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인들에게 하늘 높이 솟은 백두산은 신성한 존재였으며 숭앙의 대상이었다. 통치자는 국민을 설득하고 통합할 수 있는 상징적 존재로 백두산을 내세웠고, 관료(官僚)와 사가(史家)들은 나라를 세운 인물을 신성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통치자의 탄생을 백두산과 관련짓기도 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세계」(高麗世系)에는, 고려 제18대 의종(毅宗) 때 학자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編年通錄, 전하지 않음)에서, 조사(祖師) 도선(道詵, 827~898)이 곡령(鵠嶺, 개성의 옛 이름)에 와서 이르기를 “이 땅의 지맥은 북방[壬方] 백두산으로부터 물[水]의 근원[根]이요 나무[木]의 줄기[幹]가 되어 내려와서 마두명당(馬頭明堂)이 되었으며…… 명년에는 반드시 슬기로운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에게 왕건(王建)이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다.”라고 했다는 왕건의 탄생 설화를 인용하고 있고,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志)에는 같은 내용을 고려 제31대 공민왕 때의 학자 김구용(金九容)의 『주관육익』(周官六翼)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고려는 918년 건국하여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였지만, 발해의 멸망(926)으로 여진(말갈)에게 내어준 북방 영토는 회복하지 못했다. 따라서 고려 시대에는 백두산이 우리의 영토 안에 포함되지 않았고, 조선 세종 때 압록강 유역의 4군과 두만강 유역의 6진을 설치하여 행정력을 미치게 하고 국경을 확보함에 따라 영토 내의 명실상부한 민족의 산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후기의 학자들이 도선의 말을 빌어 태조 왕건이 백두산의 정기를 받아 탄생했다고 기록했다는 사실은, 우선 왕건을 신성화하는 한편,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을 표방한 고려가 북방 영토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고, 영토 회복에 대한 당위성과 그 실천 의지를 버리지 않고 있었음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수록한 『고려사』와 『세종실록』 「지리지」가 조선 시대에 편찬된 정사(正史)임을 상기해 보면, 조선조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북방 영토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2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
우리나라의 지리를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로 나타낸 것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공민왕 6년(1357) 사천소감(司天少監) 우필흥(于必興)이 왕에게 상소한 글에서 찾을 수 있다.
“『옥룡기』(玉龍記, 도선의 비기, 전하지 않음)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물[水]의 근원[根]이요 나무[木]의 줄기[幹]와 같은 땅이라……’ 하였습니다.”라고 하여, 직접 이름을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지세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난다고 한 내용은 ‘백두대간’과 같다. 이 내용은 조선 명종 때의 학자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도 인용되어 있다.
그리고 1425년(세종 7)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지세를 살펴보면 장백산(백두산)이 만리를 뻗어 기복(起伏)을 이루어 마천령, 마운령, 철령, 금강산, 오대산, 치악산이 되고, 경상도 경계에 이르러 멈추어 태백산과 소백산이 되었다. 빙 돌아서 속리산, 지리산이 되었으나 바다가 곁에 있어 넘지를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이익(李瀷, 1681~1763)이다. 그는 『성호사설』 권1 「천지문」(天地門) 편의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 아래 본문에서 ‘백두대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곧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 철령으로부터 태백산 소백산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닿도록 높이 치솟았으니 이것이 곧 정간(正幹)이다. …… 그 왼쪽 줄기는 동해를 끼고서 뭉쳐 있는데, 하나의 큰 바다와 백두대간(白頭大幹)은 그 시종을 같이 하였다. …… 대개 한 줄기 곧은 대간(大幹)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태백산에서 중봉을 이루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 백두정간이라고 이름지은 것이 뜻이 있어서인 듯하다. ……”라고 하였다.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쓴 『택리지』(擇里志, 1751)의 「산수」(山水) 편에는 ‘백두대맥’(白頭大脈), ‘백두남맥’(白頭南脈), ‘대간’(大幹) 등의 표현이 보이고, 당시까지 부분적으로 논의되던 것과 달리 전국에 걸친 산줄기의 흐름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대동수경』(大東水經, 1814, 순조 14년)에서 백두산을 두고 “팔도의 모든 산이 다 이 산에서 일어났으니 이 산은 곧 우리나라 산악의 조종(祖宗)이다.”라고 하였고, ‘백산대간’(白山大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3. 3 지리지(地理誌)의 산천 인식체계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지리지로는『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1425, 세종 7년),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 1432, 세종 14년, 전하지 않음), 『세종실록』(世宗實錄, 1545, 단종 2년) 「지리지」(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1, 성종 12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중종 25년),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1765, 영조 연간),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1770, 영조 46년)의 「여지고」(輿地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1908, 순종 융희 2년)의 「여지고」 등을 꼽을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비롯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도 내맥(來脈), 산맥(山脈), 정맥(正脈), 대맥(大脈) 등 산줄기를 나타내는 용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함길도(함경도) 길주목(吉州牧)의 대산(大山)을 ‘백두산(白頭山)의 내맥(來脈)’으로 표현하고 있고, 『정조실록』(正祖實錄)에는 국왕이 광릉(光陵)에 전배(展拜)하고 돌아오는 길에 축석령에 이르러 “이 축석령(祝石嶺)은 백두산의 정간룡(正幹龍)이요, 한양으로 들어서는 골짜기이다.”라고 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전국의 군현(郡縣)을 대상으로 모든 산의 맥(脈)을 파악하고자 한 것은 실학의 전성기인 영조(英祖:1694~1776, 재위:1724~1776) 때라고 판단된다. 1757년 홍양한(洪良漢)의 건의로 왕명에 따라 홍문관에서 편찬한 『여지도서』는 전국의 각 군현(295郡縣)과 영(17營)·진(1鎭)에서 직접 작성한 채색지도와 지지를 모아 엮은 것으로, 수필(手筆) 원본 55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1765년 경 완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책은 모든 군현의 「산천」(山川) 조에 어느 산에서 어느 산을 거쳐 어느 산으로 흘러가는지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내맥(來脈), 대맥(大脈), 주맥(主脈), 낙맥(落脈), 후맥(後脈), 산맥(山脈), 대간맥(大幹脈) 등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관찰과 기록은 백두산에서 이어지는 산줄기와 갈래의 흐름을 상세히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암(旅庵)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의 『산수고』와 1770년(영조 47)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담당한 「여지고」에는 산줄기의 이름은 붙어 있지 않지만, 산의 줄기와 갈래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다. 「여지고」에는 우리나라에서 대표되는 산과 강을 각각 12종산(宗山)과 12종강(宗江)으로 나누어 다음 <표 2>와 같이 기술하고 있고, ‘산(山)은 삼각산을 우선으로 하고 물[水]은 한강을 우선으로 하였으니 경도(京都, 수도 한성)를 높인 것’이라 하였다. 신경준은 백두산을 국토의 출발지로 보는 한편, 국왕이 거주하는 수도를 국토의 중심으로 보는 지리 인식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표 2> 12종산(宗山)과 12종강(宗江)
12종산 |
12종강 |
||
1. 삼 각 산 |
7. 금 강 산 |
1. 한 강(1) |
7. 낙 동 강 |
2. 백 두 산 |
8. 오 대 산 |
2. 예 성 강 |
8. 대 동 강 |
3. 원 산 |
9. 태 백 산 |
3. 대 진 (2) |
9. 청 천 강 |
4. 낭 림 산 |
10. 속 리 산 |
4. 금 강 |
10. 용 흥 강 |
5. 두 류 산 |
11. 장 안 산 |
5. 사 호 강(영산강) |
11. 압 록 강 |
6. 분 수 령 |
12. 지 리 산 |
6. 섬 강(선진강) |
12. 두 만 강 |
비고
(1) 임진강은 한강 대단락에서 다루고 있고, 두 강이 합류하여 서해에 이르는 구간을 조강(祖江)이라
하였다.
(2) 진위천(안성천은 그 지류), 무한천(삽교천은 그 지류), 곡교천이 합류하여 아산만을 거쳐 서해에
이르는 구간.
(3) 함경남도 영흥의 철옹산에서 발원하여 동해로 흐르며, 비류천은 그 지류임. 동해로 흐르는 여러
개의 짧은 강 중에서 유독 용흥강을 12종강에 포함시킨 것은 *본궁이 있는 영흥을 높이기 위한 것
으로 보인다.
* 본궁 : 이태조 위로 5대조의 신위를 제사하던 함흥 본궁과, 환조·태조의 신위와 이태조의 화상을
모시던 영흥 본궁이 있다.
『산경표』는 이 「여지고」 중의 「산천 총설1」을 족보식으로 도표화한 것이며, 이로써 현재 전하는 『산경표』의 백두대간의 모습이 그 이름과 함께 비로소 구체화된 것이다. 『산경표』의 산줄기는 「산천 총설1」의 그것과 몇 곳에서 경로를 달리하고 있지만, 어느 것을 줄기[幹]로 보고 어느 것을 갈래[派]로 볼 것인가 하는 시각을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동일한 구조(그림)가 된다.
산줄기를 맥으로 인식하던 전통적 지리관은 개화기 이후에도 그 맥을 잇고 있었다. 1899년 현채(玄采)의 『대한지지』(*大韓地誌), 1906년 정연호의 『최신고등대한지지』(*最新高等大韓地誌), 1908년 장지연(張志淵)의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乾), 같은 해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같은 해 안종화(安鍾和) ·유근(柳瑾)의 『초등대한지지』(初等大韓地誌), 1913년 남궁 준(南宮濬)의 『조선전지』(朝鮮全誌), 같은 해에 조선광문회가 발간한 『산경표』(山經表) 등은 일본의 식민 통치가 본격화되던 시기에도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줄기의 존재를 논했다. 그러나 일부 서적(앞의 *표시 도서)은 구한국 정부에 의해 ‘학부 불인가 교재용 도서’로서 사용을 금지 당했고, 식민 통치를 거치는 동안 서구에서 수입된 지리학과 지질학에 의한 산맥 이론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전통 지리관의 맥은 단절되고 말았다.
3. 4 지도의 산줄기 표현
산줄기를 모두 연결하여 파악한 것은 지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제작된 세계지도로서는 가장 오래된 권근(權近, 1352~1409)·김사형(金士衡)·이회(李회)·이무(李茂)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1402년, 일본 류코쿠[龍谷]대학) 중 이회(李회)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우리나라 부분’에서 백두대간 등 주요 산줄기를 이어서 표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5> 참조)
또 우리나라 전도로서 가장 오래된 양성지(梁誠之, 1415~1482)·정척(鄭陟, 1390~1475)의 「동국지도」(東國地圖, 팔도지도, 1463, 국립중앙도서관), 같은 유형에 속하는 이이(李頤)의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1557년 경, 국보 제248호, 국사편찬위원회, <그림 6> 참조), 같은 유형으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만든[模寫] 「동국여지지도」(東國輿之地圖, 1710년 경), 처음으로 백리척(百里尺)을 사용하고 조선 후기 지도사에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상기(鄭尙驥, 1678~1752)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이를 토대로 1757년 경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전도」(朝鮮全圖, 동국대전도, 국립중앙박물관)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북피아양계만리일람지도」(西北彼我兩界萬里一覽之圖)의 중국 부분에는 ‘곤륜산으로부터 북쪽 사막을 지나 백산대맥으로 향한다’(自崑崙山歷北漠向白山大脉)고 기록하여, 곤륜산과 백두산이 맥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고, 다른 부분에도 ‘대맥’(大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부분의 금강산 아래쪽에는 ‘남쪽으로 대맥이 이어진다’(南去大脉)는 표현이 보이고, 분수령 남쪽 철령 북쪽의 산줄기 부분에는 ‘한도대맥’(漢都大脉)이라는 표현이 보인다. 한도대맥(漢都大脉)은 『산경표』의 한북정맥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천하산천맥락도」(天下山川?絡圖<古地圖帖>)에는 중국 지역의 산천 맥락을 북조대간(北條大幹), 중조대간(中條大幹), 중조소간(中條小幹), 남조대간(南條大幹), 남조소간(南條小幹) 등으로 구분 표기하였는데, 곤륜산에서 출발하여 백두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를 북조대간으로 표기하고 있고, 남조간룡(南條?龍)이라는 용어도 보인다.
▲<그림 5>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 중 우리나라 부분(1402년)
▲ <그림 6> 「조선방역지도」(朝鮮方域之圖, 이이[李頤], 1557년 경)
▲ <그림 7> 「대동여지도」(김정호, 1861년)
김정호는 「청구도」(靑丘圖, 1834년) 범례에서 ‘산줄기와 물줄기는 땅의 근골과 혈맥(山脊水派爲地面之筋骨血脉)’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산줄기를 모두 연결하여 표현하고 물줄기는 수계별로 연결 표현하는 산경 및 수경 개념은 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1861)에 더욱 체계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의 고지도 중에서 정확성과 독창성이 가장 탁월한 지도일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을 가장 잘 표현한 지도이기도 하다. 『산경표』처럼 산줄기 이름을 부여하지는 않았지만 산줄기를 모두 하나로 연결하여 표현하면서, 높이나 넓이 등 규모에 상관하지 않고 물줄기를 가르는 분수령 역할의 정도에 따라, 대간 - 정간·정맥 - 지맥 - 기타 작은 갈래 등 4가지로 차등(위계)화하여, 과장하거나 과감하게 축소하여 표현하였다.(<그림 7> 참조)
그 후 우리나라는 대한제국 시절 <양지아문>에서 1899년 최초의 현대식 지도인 <대한전도(大韓全圖)>를 발간했고, 1909년부터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1 : 50,000 지도가 작성되었다. 이로써 백두대간과 산경의 개념은 지도에서조차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보는 일정한 틀이 바뀌는 것을 두고 패러다임의 전환(paradigm shift) 또는 변환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 지리관이 사라진 것은 패러다임의 전환이나 변환이 아니라 상실이었다. 곧 나라 사랑의 상실이었다.
4. 백두대간의 복원과 보전
4. 1 백두대간은 어떻게 다시 알려졌나
『산경표』와 백두대간은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던 이우형(李祐炯)에 의해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산악인으로서 지도를 제작하던 이우형은 「대동여지도」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수많은 의문점 가운데서도 김포평야 일대에 뚜렷한 산줄기를 그려놓은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80년 그는 우연히 인사동의 어느 고서점 주인과 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1913년 조선광문회가 발간한 『산경표』를 손에 잡게 되었고, 「대동여지도」와 『산경표』를 비교·연구하면서 현지를 답사한 결과, 김포평야를 가로지르고 있는 한강 남쪽 유역릉이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대동여지도」의 산줄기와 『산경표』의 한남정맥이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 두 가지가 모두 전통적 ‘산수경의 원리’를 따르고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1985년 「대동여지도」를 원본과 똑같은 크기로 복간하고, 「대동여지도 - 동여도 주기 첨가, (3/2)축소판」(1990), 『대동여지도의 독도』(1990), 『우리 땅의 산과 산줄기고(考)』(1993) 등을 발간했다. 백두대간의 존재에 대한 전파 과정과 『산경표』 관련 연구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86년 1월 언론매체로는 처음으로 월간 <스포츠레저>에 이우형의 권유에 의해 백두대간이라는 용어가 등장했고, 같은 해 7월 24일자 <조선일보>에 「국내 산맥 이름 일제가 바꿨다」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시기부터 대간·정간·정맥의 개념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1988년 한국대학산악연맹이 발행하는 연회보 『엑셀시오』에 백두대간을 특집으로 실었다. 1부 「백두대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박기성의 글과, 2부 「백두대간을 가다」라는 종주기였는데, 대학교 산악부 회원들의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1990년 이후에는 산행 전문 월간지뿐만 아니라 주요 일간지와 주간지에도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기가 경쟁적으로 연재되었다. 단행본으로 된 개인 종주기는 물론, 북한쪽 백두대간에 대한 가상 종주기(2001)도 발간되었다.
○1990년 박용수는 월간 <사람과 산>에 「왜곡된 산맥 이름의 수수께끼를 푼다」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영인한 『산경표』를 발간했다. 「산경표의 한 연구」(부제:원전, 간행시기 등 서지학적 검토를 중심으로)라는 해제를 붙였고, 일반인들이 『산경표』의 본 모습을 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성신여자대학교 지리학과 양보경 교수는 「신경준의 『산수고』와 『산경표』」(월간 『토지연구』, 1992. 3.)를 발표했고, 「조선시대의 자연 인식 체계」(『한국사 시민강좌』 제14집, 1994.), 「조선시대의 백두대간 개념의 형성」(『진단학보』<震檀學報>, 제83호, 1997. 6.) 등 관련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논문은 우리나라 역사지리에 대한 깊은 이해와 폭넓은 안목을 제공해 준다.
○1993년 조석필은 『산경표를 위하여』를 발간했다. 1부 「산경표 이야기」는 매우 쉽고 간단하게 『산경표』와 그 원리를 설명했다. 2부 「호남정맥 보고」는 직접 호남정맥을 종주한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실었다. 1997년에는 『태백산맥은 없다』를 출간했는데, 책 뒤에 조선광문회본 『산경표』를 복사해 붙였고, 『산경표』와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을 결정적으로 끌어올렸다.
○1996년 박민(朴玟)은 「우리나라 산맥의 분류체계 및 명칭의 변천」(고려대학교 대학원)이라는 석사학위 논문을 제출했다. 이 논문은 『산경표』나 백두대간을 직접 연구 대상으로 삼은 것은 아니지만, 백두대간체계로부터 현행 산맥체계에 이르는 변천 과정과 우리나라 산맥 이론에 대한 문제점을 거론하고 있어 관련 자료로 자주 거론되고 있다.
○2000년 12월 현진상은 『한글 산경표』를 발간했다. 한문 활자본 조선광문회 『산경표』를 한글화한 것 외에,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 「여지고 산천」의 비교·분석」이라는 연구 논문, 그리고 각종 색인을 함께 실었다. 그는 두 문헌의 비교?분석을 통하여 현전 『산경표』의 오류와 누락을 보정하고, 그 차이를 동일한 지면에 비교해 보이면서, 『산경표』는 『동국문헌비고』 중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위와 같이 백두대간과 『산경표』는 1980년 이후 일부 산악인들을 중심으로 연구되었다. 초기에는 주로 백두대간이라는 낯선 이름과 함께 『산경표』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노력으로 출발했고, 백두대간과 정맥 종주기가 연재되면서 산악인들 사이에 널리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현재 남한 구간의 백두대간과 정맥의 종주 답사는 완료된 상태이며, 산행의 새로운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러한 활동은 대간과 정맥의 주능선(마루금)을 지도 위에 표기하고 그 능선을 따라 종주 답사한 보고서 겸 안내서를 발행함으로써 그 실체를 확인하고 훼손 상태를 고발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산경표』 전체를 보는 시각으로부터 점차 벗어나 대간·정간·정맥으로 한정시키고, 그 개념을 종주 노선이라는 선적 개념으로 고정시키는 한편, 상업주의적 경쟁으로 이어지게 하는 부작용도 초래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산악인뿐만 아니라 일부 지리학자와 시민단체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다각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정부가 대간·정간·정맥의 실체를 인정할 것과, 국립지리원 발행 지도에 수록해야 한다는 의견, 백두대간과 『산경표』를 교과서에 수록하자는 제안, 환경보전운동 차원에서 백두대간을 보호·보전해야 한다는 주장, 이를 위한 법률안 제출 등 각계각층의 요구가 표출되었고, 1995년부터는 정부 기관에서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4. 2 백두대간을 복원하라는 말은
백두대간을 복원하고 또 보전하자는 것은, 백두대간과 정간·정맥을 가로지르고 있는 모든 도로를 무조건 폐쇄하고 산줄기를 복원하라는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맥 등을 공식 용어로 먼저 채택하는 것으로 전통 지리관의 회복을 선언하고, 지도와 교과서, 그리고 모든 공사(公私) 문서에 사용할 것을 주장하고 요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리고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복원 및 보전을 우선으로 계획하고, 개발제한구역(green belt)의 설정과 관리, 수자원(水資源)의 확보 등을 위한 인간의 활동이 친환경적으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방법론으로 산경의 원리를 이해하는 안목을 가지고 생각할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을 보전하자는 말은 백두대간뿐만 아니라 정간·정맥과 그 부속 산지와 하천을 함께 보호·보전해야 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국토를 이해한다는 것은 국토의 지형과 지세를 이해한다는 것이다. 국토의 지형과 지세를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토 전체를 바라볼 수 있는 과학적 체계가 필요하다.
백두대간과 정간·정맥은 이 땅의 지형과 지세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과학적 체계이다. 백두대간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곧 산경의 원리를 깨닫는다는 것이며, 산경의 원리란 이 땅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과학적으로 체계화되어 있는 우리의 전통 지리관이다.
백두대간은 옛부터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불러오던 이름이므로 백두대간이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 선조들은 산줄기를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 각종 지리정보를 가장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달할 수 있는 길이므로 우리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야 한다. 땅 이름은 여러 천년을 두고 불러내려 온 것이며 산줄기에 대한 인식과 그 이름도 그만큼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은 이미 230년 전에 산줄기 분류체계를 확립했고, 200년 전에 산줄기 이름을 명명한 『산경표』를 만들어 후세에 전하고 있었으니, 그 전통적 지리관의 맥을 잇고 그 산줄기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통일을 준비해야 하는 이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확립한 가장 명확한 지리 인식체계를 모르고 산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며, 정보화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게 이것을 가르치지 못한다면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후손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 될 것이다. 마땅히 우리 아이들의 교과서와 지도에 백두대간·장백정간·낙남정맥을 실어주고 그 인식체계를 가르쳐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 고유의 지리관을 회복하고 그 학문적 정체성을 재정립해야만 한다.
백두대간과 정맥과 강줄기를 그려 넣은 산경도(山經圖)를 들여다보면 전국의 산과 강이 한 눈에 들어오고, 고구려·백제·신라 3국의 지도가 저절로 나타난다. 진흥왕 순수비가 왜 마운령과 황초령에 세워졌는지, 천리장성이 왜 그러한 선으로 축조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저절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그리고 방언, 민요, 가옥 구조, 식생활, 풍습 및 식생의 분포, 철 따라 남하하는 단풍, 꽃이 피고 지는 선은 모두 이 대간·정간·정맥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지도를 통하여 역사와 문화와 풍습과 식생과 기후를 이해하는 것은 지리학의 출발이요 목표라 할 수 있다. 지형적 특성에 따라 생활 양식과 문화가 다름을 알며, 기후와 풍토에 따라 적응하고 발전한 그 지방 특유의 생활 모습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나라의 땅과 그 위에 터잡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는 지름길이라 할 것이다.
자동차나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면서 비가 내리는 지역과 내리지 않는 지역을 동시에 통과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지역과 내리지 않는 지역의 경계는 무심코 지나쳤던 작은 고개였다는 것을 산맥체계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은 대간·정간·정맥, 곧 ‘산경’을 이해하면 저절로 풀리는 자연의 법칙이다.
백두대간을 이해하고 산경의 원리를 깨닫고 나면 환경보호론자가 된다. 어느 산에 올라 떨어뜨린 작은 과일 껍질이나 휴지조각 하나가 능선의 어느 편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더러워지는 강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북한은 1996년 지리학 분야에 남아 있는 일제 잔재청산 차원에서,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백두대간 개념에 따라 정리하고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수록했다. 북한 국가과학원이 확정한 척량 산줄기는 백두산에서 시작해 두류산~철령~태백산~지리산을 거쳐 경남 하동의 구재봉에 이르는 총연장 1,470km의 ‘백두대산줄기’이다. 이 백두대산줄기를 백두산줄기, 부전령산줄기, 북대봉산줄기, 마식령산줄기, 철령산줄기, 태백산줄기, 소백산줄기, 지리산줄기의 8개 구간으로 구분하고, 이를 중추로 뻗은 마천령산줄기, 함경산줄기, 만탑산줄기 등 106개 가지산줄기로 정리했다.
4. 3 보호·보전의 필요성
백두대간은 국토의 중심축이며, 14개 정간·정맥의 모태이며, 모든 강의 발원지이다. 백두대간으로부터 뻗어 형성되는 정간·정맥은 강의 분수령이며, 대간·정간·정맥은 우리 민족이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온 터전이요 자연환경의 기반이다.
우리나라의 자연하천은 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온전히 받아 모아 바다에 이르는 통로를 제공하고 있다. 자연하천은 적당한 폭과 깊이를 가지고, 천천히 구불구불 흘러내리면서 스스로 정화하는 능력을 유지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인공적인 힘이 가해지면서 산과 물이 동시에 죽어가고 있다. 물의 원천인 산을 훼손하면 하천은 자연히 훼손된다. 물 부족 현상을 막으려면 댐을 건설하기에 앞서 산을 보호해야 한다. 산허리를 잘라 도로를 내고 높은 곳을 깎아 낮은 곳을 메우고 포장을 해 버리면 물이 산에 머무는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강은 일시에 많은 물을 하류로 흘려 보내야 하므로 홍수와 범람은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토사의 유입이 늘어나면서 강바닥은 높아지고, 강둑을 직선화하여 높이 쌓고 다리를 건설하기를 거듭하면서, 강바닥이 주위의 평야보다 높아지는, 이른바 천정천(天井川)의 범위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결국 산을 깎아 강을 메운 꼴이 되고 홍수가 빠져나간 하천은 모두가 건천(乾川)으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자연현상은 어느 것 하나 독립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지상의 모든 현상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철저한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것을 이해하고 적응하며 대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인간의 지혜이다.
치산치수(治山治水)의 기본은 산과 물을 동시에 보호·보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자연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오는 위험에 대비하고 재앙을 적극적으로 방지해야 하지만, 편리를 추구하는 일에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
4. 4 백두대간의 실태
백두대간은 북한의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를 지나 남한 지역으로 들어선다.
남한 지역의 경우에는 강원도의 12개 시·군을 포함하여 6개도 32개 시·군을 통과한다. 강원도(고성군, 인제군, 속초시, 양양군, 홍천군, 강릉시, 평창군, 정선군, 동해시, 삼척시, 태백시, 영월군), 경북(봉화군, 영주시, 예천군, 문경시, 상주시, 김천시), 충북(단양군, 제천시, 충주시, 괴산군, 보은군, 영동군), 경남(거창군, 함양군, 산청군, 하동군), 전북(무주군, 장수군, 남원시), 전남(구례군) 등이다.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에는 국립공원 7개(설악산, 오대산, 소백산, 월악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와 도립공원 2개(태백산, 문경 새재)가 자리잡고 있고, 천연보호림,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천연기념물 보호구역 등으로 지정된 곳들이 있다. 녹색연합 보고서에 의하면 백두대간 능선부 주변에는 다수의 희귀식물을 포함하여 120과 1,326종의 식물이 서식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산지와 골짜기에는 반달가슴곰, 산양, 노루, 담비, 삵괭이, 수달, 오소리, 너구리, 족제비, 멧돼지, 노루, 고라니, 산토끼, 다람쥐, 하늘다람쥐, 청설모 등 포유류뿐만 아니라, 조류, 양서류, 파충류, 어류, 곤충 등 각종 야생동물들이 살아가고 있다.
2000년 현재 백두대간에는 차량 통행이 가능한 도로 72개소가 있는 것으로 조사(녹색연합) 되었는데, 그 중 포장도로가 47개소이고 비포장 도로가 25개소이다. 그 밖에 광산, 각종 댐, 스키장, 골프장, 케이블카, 온천지구, 군사시설, 송전탑, 공원묘지, 목장 등으로도 개발?이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지리산 식수 댐과 양수 댐, 세석평전의 군사시설, 성삼재 케이블카 계획, 고기리 농업용수 댐, 덕유산 무주리조트의 골프장과 스키장, 영동 화학무기 처리장, 추풍령 채석장, 속리산 용화지구의 온천 휴양지, 장성봉 광업소, 대야산 채석장, 희양산 레저단지, 태백산 전투기 폭격훈련장, 창죽동 공원묘지, 대관령 목장, 자병산 석회석 광산, 점봉산 양수발전 댐, 고루포기산 고압 송전탑, 대관령 풍력발전단지 등등 각종 개발 행위로 인하여 자연환경과 생태계는 이미 훼손되었거나 훼손을 우려할 급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백두대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전 가치가 높은 생태계의 보고이다. 나무와 풀이 군락을 이루고, 이곳에 터잡아 살거나 이곳을 이동 통로로 삼는 크고 작은 동물들이 숨쉬는 공간이다. 종(種)의 다양성(多樣性)과 대등성(對等性)은 동시에 인정되어야 하며, 모든 생태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인간인 우리가 국토와 겨레와 나라의 단일성과 일체성을 추구하듯이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생활 공간은 보장되어야 한다. 또한 그들의 터전인 흙과 돌과 물도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있도록 보호해야만 한다. 백두대간은 거대한 자연의 장(場)으로, 그리고 생태축으로 거듭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요 통로이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의 훼손을 막고 생태적으로 관리하고 보전하는 것은 국토 전체의 생태계를 관리하고 보전하는 첫걸음이 된다.
백두대간이 훼손되면 이 나라의 자연생태계와 자연환경은 보호와 보전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백두대간과 정간·정맥과 그 부속산지를 훼손하는 것은 이 땅이 생명의 장(場)임을 망각하는 일이다.
4. 5 보호·보전을 위한 노력
산림청은 정부 기관 중에서는 처음으로 백두대간에 관심을 가지고 1996년 3월 『백두대간 관련 문헌집』을 발간했고, 「백두대간의 개념정립과 실태조사 연구」(1997. 2.), 「백두대간 실태조사 및 합리적인 보전방안 연구」(1997. 12.) 등을 대한지리학회에 의뢰하여 보고서로 발행했다. 1999년 12월에는 녹색연합과 공동으로 「백두대간 산림실태에 관한 조사 연구」 보고서를 발행했다. 2002년 「산지관리법」 제정안을 마련하고, 주요 산줄기의 능선부로서 산림생태계 보전에 필요한 지역과 산사태 등 자연재해의 우려가 있는 지역을 ‘산지전용 제한지역’으로 지정해 개발을 엄격히 제한하기로 했다. 또 현재 시장·군수가 가지고 있는 채광 및 채석 허가권을 산림청장의 권한 사항으로 상향 조정하고 허가 요건도 강화하기로 했다.
환경부는 1998년 지리산 성삼재 남쪽 시암재와, 강원도 양양과 홍천을 잇는 구룡령에 야생동물 이동통로를 설치하는 등 생태계 연결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2000년에는 「백두대간의 효율적 관리방안 연구」를 3개년 용역사업으로 국토연구원에 의뢰하였다.
1999년 4월 국토연구원은 녹색연합과 공동으로 <백두대간의 개념 복원과 관리방향 모색을 위한 심포지움>을 개최했고, 2000년 환경부의 용역사업으로 「백두대간의 효율적 관리방안 연구」에 착수하여, 1차년도(2000)에 「관리범위의 설정」, 2차년도에 「관리방안의 설정」, 3차년도에는 「관리제도의 개선」을 연차별 연구 과제로 책정하여 진행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효율적 관리방안」의 골자는 백두대간의 관리범위를 핵심구역·완충구역·전이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한다는 것이다. 백두대간 주능선을 중심으로 좌우 300m와 국립공원 지역이 대체로 핵심구역으로 지정될 전망인데, 이 구역 안에서는 어떠한 개발도 허용하지 않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이미 훼손된 지역은 복원하기로 했다. 완충구역은 비교적 양호한 생태를 유지하고 있는, 핵심구역 주변 지역으로서, 이곳에서도 생태계 보전을 위주로 관리하되 철저한 대책 수립을 전제로 제한적 개발을 허용하게 된다. 전이구역은 개발 압력이 크거나 개발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서 핵심구역과 완충구역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개발을 허용하지만 그 규모는 최소화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앞 절에서 밝힌 백두대간의 식생 현황과 개발로 인한 훼손 현황 등은 단지 능선부를 중심으로 파악한 것에 불과함은 물론, 보전 대책 또한 능선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범위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실태 파악과 함께 그 보전 대책을 시급히 마련해야만 한다.
백두대간 종주(완주)자가 1만 명을 넘어섰고 이에 참여하는 사람이 200만 명에 이른다는 보도가 있었다. 백두대간의 보호와 보전을 위해서는 종주 산행도 다소 제한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산의 등산로와는 달리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노선은 단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종주의 의미와 산행 방법을 다양화하는 방안, 지역별 구간별 계절별 입산 제한 등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백두대간의 보호와 보전을 위해 노력하는 시민운동단체 중 전국 규모의 조직을 가진 단체, 지역 단위 단체, 그리고 대표적인 개인 홈페이지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전국 규모의 시민운동단체
·녹색연합 http://www.greenkorea.org
·환경운동연합 http://www.kfem.or.kr
·불교환경연대 http://www.buddhaeco.org
□ 지역 단위의 시민운동단체(가칭 백두대간보전단체협의회를 결성 중인 단체)
·백두대간보전시민연대 http://www.baekdudaegan.org
·백두대간보전회 http://www.baekdudaegan.or.kr
·설악녹색연합 http://www.sanyang.net
·문경시민연대 http://www.mgpower.org
·야생동물연합 http://www.wildkorea.net
·지리산생명연대 http://www.savejirisan.org
·지리산자연환경생태보존회 http://www.koreanbear.com
□ 개인 홈페이지
·백두대간 첫마당 http://www.angangi.com
5. 산맥(山脈)이란
5. 1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태백산맥, 소백산맥, 노령산맥 등은 무엇이며 정맥과 산맥은 어떻게 다른가?
현재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우고 있는 산맥 이론은 지질구조와 지체구조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이 이론은 일본인 지질학자 고또 분지로(小籐文次郞)의 논문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또 분지로는 1900년과 1902년 두 차례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14개월 간 전국을 답사하면서 지형과 지질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일본에서 세 차례에 걸쳐 논문으로 발표했다.
1901년 「조선 남부의 지세」(朝鮮南部の地勢), 1902년 「조선 북부의 지세」(朝鮮北部の地勢), 그리고 1903년 이들을 종합하여 체계화한 「조선산악론」(朝鮮山嶽論,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을 『동경제국대학 이과대학 기요』에 발표한 것이 그것이다. 그는 근대 서구의 지리학과 지질학의 기반 위에서 당시 조선의 지형과 지질을 연구하고, 지질구조구와 지체구조를 바탕으로 요동방향·중국방향·한국방향 3개 산계(山系)의 36개 산맥으로 구분하였다. 오늘날의 「산맥도」와는 많이 다르지만, 그의 이론이 현행 우리나라 산맥체계와 명칭의 시초가 되었다.
1904년 일본인 지리학자 야쓰 쇼에이(矢津昌永)는 일본 동경에서 간행한 『한국지리』(韓國地理)에서 고또 분지로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이를 14개 산맥으로 간략히 하여 「한국 구조의 산계」(韓國構造の山系)라는 이름으로 실었고, 이것이 우리나라 산맥 분류체계와 명칭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06년 국내에서 간행된 당시의 지리 교과서로서 『고등소학대한지지』(대동서관)의 서두에는 “본국(本國)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하지 못하여 산맥의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므로 이 책은 일본 전문대가 야쓰 쇼에이(失洋昌永) 씨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하고 그 편집대의를 밝히고 있으며, 산맥에 관한 내용은 야쓰 쇼에이의 『한국지리』와 동일하다. 그 후 그의 이론은 우리나라 산맥론의 주류를 이루어 다소 변형을 거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오늘날 우리 교과서에 수록된 산맥도는 1906년 일본에서 간행된 『실업실찬지리』의 「조선산맥도」와 가장 유사하다.(<그림 8>, <그림 9> 참조)
▲<그림 8> 현대지도를 이용한 산맥도
▲ <그림 9> 백지도를 이용한 산맥도
5. 2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차이
백두대간과 정간·정맥은 우리나라 산의 외형적 구조, 곧 생긴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다. 땅 위에 실제로 존재하는 산을 그리되 반드시 물줄기와 연계하여 그렸다. 어느 산에서 시작하여 어느 산을 거쳐 어느 산에서 끝나는지가 분명하다.
산맥은 땅 속의 지질구조와 지체구조를 기준으로 그렸다. 나이(형성 시기)가 같고 출신(형성 요인)과 성분(토양과 암석)이 같은 산열(山列, 山系)을 찾은 것이므로 산맥은 강에 의해 여러 차례 끊기고,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다. 어느 산에서 시작하여 어느 산을 거쳐 어느 산에서 끝나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현재의 산맥체계는 지리학의 한 분야인 지형학에 의해 분류된 것이 아니라, 지질학의 한 분야인 구조지질론에 의해 성립된 것이다. 땅 위에 드러난 자연의 모습이 아니라, 땅을 이루고 있는 토양과 암석이 언제 어떤 요인에 의해 형성되었는지를 조사하고 그 지질구조선을 기본으로 하여 산맥을 분류한 것이다. 지질구조를 중심으로 파악한 산맥은 ‘같은 시기에 같은 요인에 의해 형성된 산들을 선상(線狀)으로 연결한 것’이므로 산맥과 산맥이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할 필요가 없고, 산과 산이 하천에 의해 단절되는 것 또한 문제삼지 않는다.
이러한 산맥체계는 전통적 산천 인식체계의 단절을 가져왔다. 오늘날의 산맥체계는 우리의 국토를 하나의 뿌리를 가진 유기체적인 존재로 바라보던 것에서 떠나, 서로 이질적인 기원과 성격을 가진 개체들의 집합으로 바라보도록 하였다. 원산과 강화를 잇는 추가령구조곡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지질구조는 서로 이질적이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은 마천령산맥, 함경산맥(부전령산맥)의 일부, 낭림산맥,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으로 조각나고, 백두산은 아무런 중요한 의미도 가지지 못하는 보통의 산이 되어 버렸다.
국토를 산과 물이 어우러진 산수(山水)라고 표현하고, 물에 의해 산을 분별하고 산줄기에 의해 강줄기가 나뉘는 원리를 터득했던 우리 선조들은 대자연과 인간이 하나되어 살아야 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였다. 그 숭고한 자연관, 산수관, 국토관이 사라지고 인간이 이용하고 개발하고 정복하고 파괴하는 것을 일삼는 ‘인간 : 자연’으로 대응·대결하는 구도로 변모해 온 것은, 땅이 생명의 장(場, field)이면서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유기체적인 존재임을 망각하고, 오직 어떤 토양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는지에 관심을 돌리는 분석적·계량적 사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5. 3 그렇다면 산맥은 버려야 하나
결론부터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다. 지질구조도나 산맥도가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유용한 정보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현행 지리 교과서의 산맥은 학문적으로 재검증하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산맥’과 ‘정맥’은 그 개념이 다르고, 분류 방법과 목적과 쓰임새가 다르다. 같은 교실 안에 있는 학생들을 남녀로 구분할 수도 있고, 성씨별로 구분할 수도 있으며, 키가 크고 작음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고, 몸무게에 따라 구분할 수도 있는 것처럼, ‘산맥’과 ‘정맥’은 산을 어떤 기준에 의해 어떻게 분류했는가 하는 점이 다르다. 지상의 어떤 사물과 현상을 과학적으로 분류하고 설명하기 위한 방법은 목적과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겠고, 어느 것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리교육 현실은 여러 가지 분류 방법을 설명하지 않았고, ‘산맥’을 가르치면서도 그것이 지질구조선이라는 사실조차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다.
‘산맥’(山脈)은 사전에 따라, ‘여러 산악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 또는 ‘산지에서 산봉우리가 선상(線狀)이나 대상(帶狀)으로 길게 연속되어 있는 지형’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런데, 태백산맥이라고 할 때의 ‘산맥’(mountain range)은 지형의 형성 과정을 지각변동(화산운동, 조산운동, 조륙운동, 지괴운동 등), 형성 시기 등과 관련지어 이해하려 한, 성인(成因, 형성 요인)에 따른 구조지질학적 분류체계라는 점에서 정간·정맥과 개념적으로 구분해야 한다.
지체구조론과 구조지질학은 개별 학문으로 분화되기 이전이거나, 지질지리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때에는 지리학의 한 분야이겠으나, 엄격히 말하면 지질학, 넓게는 지구과학(지질학, 지구물리학, 지구화학, 해양지질학; 천문학, 기상학, 해양학) 쪽에서 다루는 분야이다. 그러나 지리학에서도 지표상의 여러 가지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특히 지형학에서는 인접 학문인 지질학의 용어와 개념을 동일하게 사용한다. 지리학과 지질학에서 말하는 산맥은 ‘같은 시기에 같은 요인에 의해 형성된 긴 선상(線狀)의 산지’이지 반드시 단절되지 않고 ‘연속되어 있는 산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산맥이라는 용어를 지체구조(우리나라의 경우 육괴, 퇴적분지, 지향사 등으로 설명)와 지질구조(단층, 습곡, 부정합, 절리 등)의 형성 요인과 그 현상(現狀)을 설명하는 데 사용하면서도 태백산맥이라는 명칭에는 그 성인(成因)을 나타내는 뜻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것은 바로 학생들이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산맥이라는 용어와 그 보편적 의미는 예로부터 변함이 없으나, 태백산맥의 ‘산맥’이라는 말이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 지리학(geography)의 용어로 자리잡으면서, [①사전적 의미의 산맥 = ②전통적 의미의 산맥(연속된 산줄기) ≠ ③성인(成因)에 따른 분류체계의 산맥]에서 ③의 개념을 획득함으로써 ‘산맥’이라는 용어의 의미영역을 따로 점유(占有)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의 지리교육은 ③의 개념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은 채 ‘산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가르침으로써 ②의 개념은 사라지고, 이를 배우는 사람에게는 ①의 개념을 가지고 ③의 용어를 받아들여야 하는 관념적 오류가 발생한 것이다.
서양의 지리학(geography)이 땅(land, earth)을 기술(write, describe)하는 학문(study, research)이라면 동양의 지리학(地理學)은 땅(地)의 이치(理)를 밝히는 학문(學問)이라 할 수 있다. 서양의 지질지리학자들은 일찍부터 지형 형성의 주된 요인으로서 영력(營力, process. 그 내용을 내적·외적인 작용·변동·활동 등으로 설명함)을 중시하고, 지형윤회설, 지체구조론(대륙표리설, 해저확장설, 판구조론) 등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이론들은 ‘지형을 형성하고 변화시키는 힘이 어떠한 것인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지형이 형성되었는지’를 자연과학적인 방법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고, 다분히 분석적이고 계량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지형윤회설에 의하더라도 그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 산지와 준평원으로 이루어진 지극히 안정된 지표(地表), 곧 그러한 지형 위에 역사가 영위되었기에, ‘땅의 모양은 어떠한지, 어디가 살기에 적합한지, 어떻게 조화되고 적응하고 사용해야 하는지’를 인문과학적으로 접근하였다. 지역(region)별 관찰 결과를 국가적으로 종합하여 거시적이며 총체적이며 유기체적인 지리관을 확립한 것이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리를 지리학적으로, 지형학적으로, 지역지리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산맥’이 부적합하다는 사실이다. ‘일본인이 만든 산맥체계’라는 사실만으로 이를 배격하자는 것도 아니며, ‘우리 것’이기 때문에 ‘산경’만이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이런 지리관, 이런 훌륭한 분류체계가 있었다. 이것만은 되살려 인식하고, 사용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후세에 전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들이 가졌던 숭고한 자연관, 산수관, 국토관을 되살리자는 것이다. ‘산경’은 학문적 체계성과 과학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고 실생활에서도 대단히 유용하기 때문이다.
현행 산맥체계는 반드시 학문적 검증을 다시 받아야 하고, 지리 교과서에서 다룰 것인지 지구과학 교과서에서 다룰 것인지도 재검토되어야 한다. 고또 분지로(小籐文次郞)가 설정한 지체구조와 지질구조구가 그 뒤에 조사된 것과 일치하는지, 그가 분류한 산맥체계를 가지고 산맥의 형성 요인을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것이 우리나라 산줄기를 제대로 파악하고 그 특성을 반영한 것인지, 일제의 침략 의도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그 뒤에라도 충분히 검증했어야 하며, 우리나라 전통 지리학에 대한 연구와 고증이 이루어졌어야 했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6. 백두대간 돌아보기
지금까지 백두대간의 개념과 실체는 어떤 것인지, 『산경표』란 무엇인지, 역사적으로 백두산과 백두대간은 우리에게 어떻게 인식되어 왔는지, 백두대간의 복원과 보호?보전은 왜 필요한지, 그리고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의 차이를 알아보았다. 정리하는 의미로 지금까지 논의한 것들을 돌아보기로 하자.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비롯된 큰 산줄기’라는 뜻이며,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 이르기까지 물줄기에 의해 한 번도 잘리지 않고 연속되어 국토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산줄기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백두대간은 1770년에 편찬된 『동국문헌비고』 중 신경준이 집필한 「여지고」의 「산천」을 보고 1800년 경에 누군가 만든 『산경표』에 의해 구체화되었으나, 일제 침략기를 거치면서 이 땅에서 사라졌던 우리의 전통적 지리 인식체계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가능케 했던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체계이다.
백두대간의 존재는 1913년 조선광문회가 발간한 『산경표』가 1980년 「대동여지도」를 연구하던 이우형에 의해 발견되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이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흐르다가 어디서 끝나는지를 족보 형식으로 도표화(圖表化)한 책으로서, 우리나라의 산줄기를 1대간·1정간·13정맥으로 분류하고 있다.
백두대간은 국토를 남북으로 내닫는 대동맥이며, 동해로 흐르는 물과 서해로 흐르는 물을 갈라놓는 대분수령이며, 14개 정간·정맥의 모태이며, 모든 강의 발원지이며, 한반도 산지 분류체계의 상징이며, 한민족의 인문·사회·문화·역사의 기반이며, 자연환경과 생태계의 중심축을 이루는 대표 산줄기이다.
백두대간은 선(線)이 아니라 연속된 산지체계이며, 곧 국토 전체이다. 백두대간에 대한 인식은 <종주 산행의 노선> 또는 <분수계(分水界)>라는 <가장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 <좁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중심 산줄기>를 뜻하며,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중심 산줄기와 그 부속 산지>를 뜻하며, <가장 넓은 의미의 백두대간>은 <전통적 국토지리 인식체계>로서 <국토 전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에 대한 개념이 명확히 정립되어야만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국토의 단일성과 일체성에 대한 인식을 되살릴 수 있고, 동북아의 중심이 되는 백두산의 상징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어나간 여러 개의 산줄기를 생각해 볼 수 있고, 고대의 영토 개념에 대한 재조명 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백두대간의 지리적 특성, 식생 현황, 생물학적 특성, 또는 그 훼손 정도를 파악하거나, 복원·보호·보전 계획을 수립하는 일은 그 능선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넓고 높은 공간적 규모(입체)를 가지고 있는 지리적·공간적 실체를 먼저 인식함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백두대간은 합당하고도 온당한 지리적 범위를 점유하고 있는 존재이다. 거대한 자연환경의 장(場)이며, 생태의 장이며, 스스로 살아있는 자연이다.
백두대간은 복원되어야 한다. 우리의 전통 지리관은 회복되어야 하며, 그 명칭과 함께 실체에 대한 인식을 되살려야 하며, 지도와 교과서에 실어 우리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길이 이 땅에 살아가야 할 우리의 후세들을 위하여 보호·보전되고, 영존(永存) 영속(永續)되어야 한다. 국토와 겨레와 나라의 단일성과 그 일체성이 되살아나야 한다. 모든 동식물의 생태계는 연결되어야 하고, 그들의 터전인 흙과 돌과 물이 보호되어야 하며, 건강한 식생이 되살아나야 하며, 생태축으로 거듭나야만 한다. 이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야 할 국토 사랑의 길, 겨레 사랑의 길, 나라 사랑의 길이다.
추기(追記) : 이 글은 졸고 『한글 산경표』에서 가려 뽑고, 그 후의 연구 성과를 종합한 것입니다.
고(故) 이우형 선생님·양보경 교수님·박민 님의 글, 그 밖에도 많은 문헌을 참고했음을 밝힙니다.
글의 성격상 일일이 각주를 달지 못했음을 해량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백두대간 첫마당 안강 님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2002. 11. 현진상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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