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강화나들길 5코스 (고비고개길) 본문
2011년 8월 26일 화요일 맑고 무더움 홀로탐방
부평에서 강화터미널 가는 90번버스는 이제 직행버스가 아니다.
수도권이 대부분 그렇듯이 모든곳이 도시화되어 강화가는내내 타고 내리고 타고 내리고 시내버스다.
길가의 코스모스가 한들거리고 간간히 들판에 벼익는 모습이 지루함을 달래긴 하지만 참을성 없는 내몸의 피가 역류하는듯한 지리함이 인내의
한계에 다달을즈음 버스는 강화 터미널에 나를 내려놓았다.(10:00)
터미널에서 남문가는길은 이정표가 없다. 30년 이상 인천에 살며 사는 햇수만큼 강화를 들락거렸지만 터미널에서 남문가는길을 모른다는것은
어찌보면 수치고 내가 그만큼 쾌락을 쫒으며 살았다고...오직 먹고 마시고 즐기는 유원지로서 강화만 내게 존재 했음이랴...
터미널 주차장관리인에게 남문가는길을 물으니 강화사람 특유의 퉁명한 목소리로"절로가서 절로가면 큰길나오고 큰길나오면 쭈욱..."불친절한듯
하지만 가르쳐줄것은 다가르쳐준다."절로 절로"했지만 알아들을것은 다 알아듣고 이내 江都 南門에 이른다.(10:10)
강도남문은 강화읍을 에워싸고있는 강화산성의 남쪽문이다.
고려때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되어 江都라 부르며 39년의 항몽의 역사현장은 산산히 부셔지고 고려산넘어 고비고개길이 있는 지금의 내가면 고천리일원에 沁州라는
행정구역으로 존재하다가 세종때에 지금의 강화읍으로 다시 옮겼으니.....강화의 별칭인 沁都라는 지명도 심주시절의 것이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으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 이江都라불리는 강화섬이다.
남문에서 동부화재 대리점 골목으로 나오면 강화대로에 이르고 대로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면 연무당 옛터에이르고 이곳에 석수문이있고 길건너 서문이있다.
서문에 이르는 강화대로는 5일장이서는 2일과 7일은 시골시장 구경하기에 그만이나 오늘은 장날이 아니라 장구경은 못했지만 김장채소 파종기를 맞아 여기저기
가게마다 무우 배추 순무모종이 가득하고 이미 금추가 되어버리 고추말리는 장면도 여기저기 그대로 시골 풍경이다.
어느 마른 고추가게에 들러 준농부가 된 내가 마른고추 한근에 얼마냐고 물었더니 태양초 한관(3.75kg)에 20만원이란다.
머리를 급히돌려 계산해보니 400g 한근에 2만원이 넘는다. 고추가 금추가 된것은맞다. 근디 이런 우기에 저분은 태양초를 어찌 말렸다나?
괜히 심통이 난다.
연무당은 강화부의 군사를 훈련하는곳으로 병자년에 한.일 수호조약을(강화도조약) 맺은곳으로 운양호의 위협에 굴복한 치욕의 역사현장이다.
석수문은 고비골에서 내려온 물이 강화내성으로 흘러드는 동락천의 수위를 조절하던 수문이고 길 건너에 서문이있다
서문의 첨화루 천장벽화의 호랑이는 어느쪽으로 바라봐도 보는이와 눈을 마주하고 노려본다.재미있는 천장화다.(10:40)
길은 좌측으로 꺽여 이내 국화리 저수지로 거슬러 올라 고비고개 방향으로 그늘 없는 뙤약볕을 걸어야한다.
오늘 같은 폭염에는 체력소모가 많다. 저수지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이마를 간지럽히기는 하지만 역부족이다. 무지 덮다.
많은비가 내렸음에도 저수지 수문에서 내려오는 물은 2급수이하인듯 물비린내가 심하고 썩 상쾌하지는 않다.
이 조그만 저수지의 가두어진 물도 저렇게 썩는데 4대강의 요소요소에 물막이공사를 하여 물을 가두면 오염은 불보듯 뻔한데....
국화리 저수지의 데크는 강화군에서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데 물관리에는 좀 신경을 써야할것같다. 특별한 오염원이 없는데도 1급수를 유지 못한다면...(11:10)
청련사 입구에서 길은 갈리지만 600m거리에 있는 청련사를 그냥갈수는 없다.
고려산에는 크고 작은 연못이 다섯곳이 있었다. 이는 불교가 들어온 4세기 이전에 축조되어 큰 연못은 하늘에 제사지내는 재단으로 사용되고 작은 연못은
군사훈련에 말에게 물을 먹이던 곳으로 사용되었다.
고구려 장수왕 4년 인도의 천축조사가 이곳 고려산에서 가람터를 찾던중 연못에 피어있던 5가지 색상의 연꽃을 따서 불심으로 날려 꽃이 떨어진곳의색깔에 따라
백색 연꽃은 백련사 적색은 적석사 황색은 황련사,청색이 떨어진곳은 조사가 원하는 곳이 아니어서 원하던곳에는 원통암를 짓고,청색이 떨어진곳에 청련사를
지었으니 지금의 청련사는 바로위 원통암과 청련사가 합하여 청련사라한다.
청련사로 오르는 가파른 언덕길은 지난 우기에 소실되어 복구공사가 한참이다.
깊은산속에 포크레인 굉음이 귀를 아프게하고 청련사 큰법당에 졸고있던 진도개 한마리가 짧게 컹하고 한벗짓더니 이내 졸음에들고,법당앞 느티나무와
은행나무가 절의 역사만큼 깊게 뿌리를 박고있다.원통암에 오르려는데 보살님한분이 스님이공부하는곳이라고....이내 발길을 돌리는데 포크레인 굉음이...
스님공부가 걱정된다.
법당앞 쉼터에서 땀을식히고 망중한을 즐겨볼까싶은데...공사판 소음도 소음이고 일하시는 분들의 노고에 괜히 미안해져 이내 하산길로 접어들고..(11:40)
고비고개는 내가쪽 나뭇꾼들이 나무를 하여 나뭇짐을지고 읍내에 내다팔기위해 넘었다는 고갯길이다. 어찌 나무꾼만 이길을 이용햇으랴...내가쪽 풍부한 해산물과
농산물 봇짐이 이길을 이용했을게고 무려 200여년동안 고을읍성이 내가에 있었으니 염하를건너온 한양의 물물이 다시 고비고개를넘어 읍성으로...
이고비고개는 강도의 동서를 잇는 가장빠른 길이었을게다.국화리 학생 야영장에 이르는 고비고갯길은 금방이라도 나무꾼이 장작한짐을지고 소금장수가
소금가마를 지고 모퉁이를 돌아설것같은 길이다.
국화리 청소년야영장 극기훈련장에서 나들길은 좌측으로 이어지지만 300m지점에 있는 홍릉을 그냥지나칠수는 없다.
잘다듬어진 산길따라 30여분이면 왕복이가능한 홍릉은 벌초기를 맞아 깔끔하게 벌초가되어 오르는길에 풀내음이 상큼하다.
오르는길에 만녕재라는 3칸자리 건물이있는데 홍릉의 재실이다.(12:20)
홍른주인인 고려고종(1192~1259)은 재임시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이 컸다.
고종3년(1216)거란족 침입을 김취려.조충등이 막아냈고 고종18년(1231)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다음해 강화도로 도읍을옮겨 江都라하고 39년간의 몽고에 항거를
시작한왕이다. 문화적으로도 주목할만한 시기인데 몽고군 침입으로 부인사 대장경이 불타자 고종23년(1236)부터 고종38년(1251)까지 16년간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을 판각하여 지금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팔만대장경이다.
고종은 계속된몽고군의 침입을 막아내고 강화를 이룩하려고 태자원종을 몽고에 보내고 고종46년(1259) 뜻을이루지 못하고 이곳강도에서 승하하여 개경으로
옮겨가지못하고 이곳에 묻혔다. 결코 화려하거나 웅장하지는 않지만 위엄이있고 소박한 왕릉이다.
홍릉에서 학생야영장 극기훈련코스로 하산하여 좌측으로 오르면 고려산과 혈구산고갯마루인 고비고개 정상에 이르고 이내 계곡길(고비고개길)로내려가면
내가면고천리에 이르는데 이곳이 심주이다.(13:20)
이곳은 강화부의 행정관서가 조선 세종때 지금의 강화읍으로 옮겨갈때까지 200여년간 있었던곳으로 강화를 沁都라 부르게 된곳이기도 하고 마을뒤 야산에 고천리
고인돌군이있다. 고천리고인돌군은 고려산 적석사 산행시 다녀왔으니 그냥지나가기로했다.
지금의 고천리는 주로 한우를키우는 축사가있거나 순무와 노랑고구마를 생산하고 벼농사도 많이하는 전형적인 강화농토가 잘보전된지역이다.
고천리마을을 관통하여 호젓한 시골 마을길을 한시간반여 걸으면 이내 오상리고인돌군에 이른다(14:00)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을 고인돌이라 부르는데,주로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있다.
우리나라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세워 지상에 돌방을 만들고 그위에 거대한 덮개를 올려놓는 탁자식과,땅속에 돌방을만들고 받침돌을 세운뒤 그위에 덮개를
올려놓는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며 이곳의 지석묘는 탁자식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1기의 지석묘가있는데 개념없는 아줌마 두분이 고인돌위에서 큰대자로 누웠다 내가 들어서니 부랴부랴 일어난다.
30대초반으로보이는 아줌씨들 고인돌위에서 식사와 막걸리도 한잔씩 하신모양인데 내집식당으로 착각하신모양이다.
"아줌씨들? 여기는 당신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무덤이라구요...?"
나들길은 지석묘 뒤로해서 내가저수지로 나갈수도있고 마을입구로해서 내가저수지로 접근할수도있다.
내가저수지는 강화에서 길상저수지 다음으로 큰 저수지다. 요즘은 내가저수지를 고려저수지라 부른다.
한때는 호수의 오염이 심각하였으나, 강화군에서 특별관리하여 현재는 깨끗한 저수지로 옛 명성을 되찾았다. 특히 저수지의 밤낚시 등불은 강화팔경의 하나로
불릴정도로 색다른 정취를 느낄 수 있다. 그러나 나들길에서 내가저수지는 도로따라 걸어야하는 국화리저수지와는 전혀 다른 난코스다.
저수지 물막이댐위로 통행이 통제되어 댐아래 도로따라걷는길이 먼지와 땡볕에 만만찮다.
저수지 아래 도로따라가면 내가면 소재지에이르고 재수좋으면 내가시장을 구경 할수도 있다 내가장날도 강화읍장날과 같은 2,7일이다.
내가면사무소 지나 우측으로 10여분 오르면 덕산산림욕장(15:00)에이르고 산림욕장뒤로 호젓한 임도따라 고개를 넘으면 외포리 포구와 석모도가 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일몰을 만난다면 금상첨화겠지만 일몰이 아니더라도 외포리와 석모도를 잇는 페리호,그리고 페리호를 따르는 갈매기 옹기종기 남아있는 포구의
지붕낮은 집 모두 시간 여행하기는 그만이다.
이내곶창굿당에 이르는데(15:40) 곶창굿당은 임경업장군을 기리는 굿당으로 임경업장군이 이곳과 무슨 인연이있었는지모르지만 예전에는 풍어를 비는 의미가
강했지만 지금은 풍어와 풍농을빈다고한다.2~3년간격으로 열리고 음력2월에 3일을 매일 굿을하며 오후4시에는 굿을중단하고 모두모여 밤을샌다고한다.
굿당을 지나 포구의 지붕낮은 골목길을내려가면 오늘 나들길 종점 외포리에 이르고(15:50) 포구는 항상 관광객이 줄을서고 이곳에서 각종해산물과농산물을 구입할수
있으나 이곳도 시골의 순수성은 이미상실하고 잘못하면 저질 중국산이나 바가지를 쓰기쉽다.
16시에 출발하는 강화읍 37번버스가 있었으나 10분후에 도착하는 2번 화도버스를타고 화도에서 초지대교를건너는 버스로환승 양곡에서 부평으로 가리라 하고
2번버스를 기다려 정류소 안내멘트가 2번버스가 곧도착한다고하여 기다리는데 ...아뿔사 이 2번버스는 정류소에 들르지않고 정류장밖에서 서는듯 싶더니 이내
출행랑이다. 이 2번버스는 순환버스라 정류장에 안들르고 바로 해안도로로 간다나.....그래서 40여분 더 기다려 강화읍으로 나와 부평귀가...
종주막판에 이무슨 낭패람....그래서 20:00에 귀가 집에오는데만 4시간이다....헐 ~
1. 탐방코스
강화터미널-남문-서문-국화리저수지-국화리학생야영장-홍릉-고비고개길-고천리마을회관-성광수도원-오상리고인돌군-내가저수지
내가 주민센타-덕산야영장-곶창굿당-외포리(5시간50분,20.2km)
2. 탐방경로
08:00분 - 부평출발
10:00분 - 강화터미널
남문
강화대로
10:40분 - 서문
연무대터 석수문지나 강화고등학교 앞을지나면 국화리저수지
국화리저수지 데크를 거슬러오르면 청련사 입구 갈림길
11:10분 - 국화리 청련사입구
청련사까지 600m 마을중앙으로 직진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11:30분 - 청련사
청련사에서 마을로 되돌아와 마을초입에서 좌측으로가면 단독가옥이있고 마당앞을지나 좌측으로 산길
주인장이 자주겪는일인지 지나가라고 텃밭에서 일하시면서 손짓을하신다.
12:00분 - 국화리 학생야영장
12:20분 - 홍릉
야영장에서 직진하면 재실이보이고 재실지나 300m쯤오르면 홍릉
다시야영장으로 내려와 극기훈련장 좌측으로 나들길 연결
12:50분 - 고비고개 정상
좌측 혈구산 우측 고려산 직진 오상리고분군 5.2km
13:20분 - 고비고개길(고천리 마을회관)
성광수도원
14:00분 - 오상리고인돌군
길좌측 11기의 지석묘
마을로직진하여 마을입구에서 좌측내가저수지방향으로가도되고 지석묘지나 산길로가면 내가저수지가기전 마을서오는길과만남
내가저수지에서 우측도로따라 내가저수지 뚝방 밑도롤가면 내가 주민센타 주민센타지나우측 도로따라가면 덕산산림욕장
15:00분 - 덕산산림욕장
산림욕장 운동시설뒤 좌측으로 임도따라가면 좌우에 팔각정쉼터가 있고 고갯마루에서 우측은 전망대 직진하여 우측으로가면
외포리곶창굿당에 이른다.
15:40분 - 곶창굿당
15:50분 - 외포리 버스정류장
버스두대를놓치고 17시에 버스탑승
17:30분 - 강화터미널
20:00분 - 부평도착
3. 탐방개념도
@ 교통편
부평에서 90번버스로 강화행
외포리에서 강화터미널 버스 40~50분 간격
강화순환버스 1번과 2번있는데 2번을타야 화도로갈수있고 화도에서 초지대교를 건너는 버스 다양
1,2번모두 터미널을가지만 순환버스라 1시간반정도소요,일반노선버스는 20분정도
강도남문(안파루)
강화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연무당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현장
원래는 강화부의 군사훈련장
석수문
강화읍의 중심부를 흐르는 동락천 위에 설치하였던 수문이다. 조선 숙종 37년(1711)에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연결하여 처음 설치하였으나, 광무 4년(1900)에
갑곶 나루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개천 어구에 옮겼다. 그 뒤 1977년에 다시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다. 길이는 18.2m이고 높이는 2.7m, 너비는 4.7m이다.
무지개 모양의 수문이 3개이며, 화강암을 다듬어 쌓았다.
서문(첨화루)
서문천장 호랑이 어느쪽에서도 나와 눈을 마주한다.
국화리저수지에서 내려오는 물인데 2급수이하인것같다.
오염원이 없는데 고인물은 썩는다고...
국화저수지
강화읍
고려산
청련사
원통암(원래 연꽃이 떨어진자리)
금방 나무꾼이 나무한짐지고 나타날듯...
학생야영장
만녕재(홍릉의재실)
고려고종홍릉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가장 높은 곳에는 왕릉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며, 무덤 주위에는 난간으로 두른 돌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무덤의 4모서리에는 짐승을 조각한 돌이 1개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사람 모양의 돌조각 2구가 남아있다. 최근에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능을 보호하는 돌을 설치하였다.
고비고개고갯마루
혈구산
고천리
고비고개길
고천리에서본 고려산
성광수도원
오상리고인돌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인돌군 중 하나로, 고려산(해발 436m) 서쪽 낙조봉 끝자락에 12기의 북방식 고인돌이 분포한다. 이중
크기가 가장 크고 위쪽에 위치한 고인돌이 인천시도기념물 제16호로 지정된 내가고인돌이다.
내가고인돌은 고임돌과 덮개돌이 잘 갖추어져 내부가 막혀 있는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석실 구조를 정확히 알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원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덮개돌의 크기는 길이 3.7m, 너비 3.35m, 두께 0.5m이며, 고인돌의 묘실 구조는 ㅍ자 형태이고, 크기는 대, 중, 소형으로 구분된다.
오상리 고인돌군은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이 고루 분포해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으며, 또한 대롱옥, 반달돌칼, 화살촉 등 매우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고려저수지(내가저수지)
덕산산림욕장
곶창굿당
외포리
외포리 지붕낮은집과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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