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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늠내3길 늠내옛길 종주

無碍人 2010. 8. 16. 14:31

2010년 8월16일 월요일 구름 약간비 찜통더위 홀로종주

 

계속되는 폭염과 불순한 날씨는 나의 대간길을 계속잡고 있다.

어차피 폭염의 날씨에는 무리일것같고 그렇다고 내몸은 빈둥되는것을 용납못하니 주말농장 가을채소 파종도

어느정도는 끝나고, 비번날 마땅한 산행길을 잡지못하고있다.

서울시계종주를 하려고 자료를 모우고 있는데 이 코스도 대간이나 정맥길과 같아 폭염에는 너무 체력소모가

많을것같아 가을쯤으로 예상하고 준비하고 있다.물론 가을에는 대간길도 많이 올려놔야하고...

땜방 산행에 딱 적격인 늠내길 카드를 오늘 꺼내들었다.

원래는 2길인 갯골길을 가야하나 갯골길은 그늘이 없어 폭염에는 피하고 3길인 옛길산행에 나섰다.

늠내길이 내가 사는곳에 가까이 있어 어떤 방식으로든 이구간을 여러번 스쳐지났지만 늠내길을 잇는다는

의미로 지도한장 달랑들고 집을 나섰다.

부천남부역에서 31-3번버스로 상대야동 버스정류장 꼬꼬상회앞에 하차하여 퉁명스럽지만 인정많은 꼬꼬상회

아저씨의 길안내를 받아 건너편 추어탕집 옆으로 마루금을 찾아나섰다.

마루금이 시작되는 초입에 시흥시청에서 늠내옛길 지도와 안내판을 설치해두어 쉽게 마루금에 올라섰지만

늠내길 표시는 계속설치되어 길안내를 하고 있지만,지도는 여기가 마지막이며 처음이다.

몇군데 더설치했으면 싶은데....

20여분이면 여우고개 생태통로에 이르고 다시 20여분이면 하우고개 구름다리에 이른다.

이하우고개에서 한남정맥과,부천인천 시계종주길이 겹치지만 이내 늠내길만의 길로 갈라져서 6부능선을 따라

성주산을 벗어나면 이내 소내골(소래터널위)소내골에서 인천대공원 후문쪽 만의골 도로따라가다가 가능골로 접어들어

김재로묘갈림길 이정표에서 계란마을 약수터를 내려서면 늠내길도 반환점을 돌아선다.

이내 소산서원에 이르고 명재상 하연가 인물들의 생애를 더듬다 보면 , 내상상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고 한가문에서

한세기에 이렇게 많은 인물이 낳다니 하씨가문의 영광이며 부럽기도 하다.

곧 청룡약수터에 이르고 10여분 오르면 소래산 마애불이다. 여기서 소래산과 이별하고 상대야동 외곽순환도로 옆으로

하산하면 하우고개에서 넘어오는길에 이르고 100여m 더 내려가면 39번국도와 만나는 대야삼거리에 이르며, 바로 여기가

출발지점인 꼬꼬상회앞 출발점에 이르러 늠내길 종주를 마치게 된다.

 

1. 산행코스

   꼬꼬상회-소래청-여우고개-하우고개-소내골(소래터널)-인천대공원후문길(만의골길)-가능골-계란마을약수터

   -소산서원-신천약수터-소암천교-청룡약수터-마애불-꼬꼬상회(11km,3시간30분)

 

2. 산행경로

   08:00분 - 집출발

                 부천남부역 건너편 경원여개버스종점에서 31-3번버스환승 상대야동 정류장하차

   08:50분 - 꼬꼬상회출발

                 꼬꼬상화 건너편 추어탕집 옆길로 들어서면 늠내 안내지도와 안내표시

                 이내 외곽도로 하단지나 옆으로 오르면 묘지지나 좌측으로 마루금연결 

                 소래청

   09:20분 - 여우고개 생태통로

                 쉼터 지나 삼거리에서 완전히좌측 하우고개 이정표방향으로 내려가야 하우고개

   09:40분 - 하우고개 구름다리

                 구름다리지나 오르막을 올라서면 성주산 등산로와 이별하고 6~7부능선따라 늠내길은

                 소내골로 이어진다.

   10:10분 - 소내골(외곽도로 터널위

               소래산방향과 반대로 우측으로 휘어 바로 좌측으로 하산하면 인천대공원 후문도로(만의골)

   10:20분 - 만의골도로

                도로따라 10여분 가면 소래산 등산로 입구 가능골

   10:40분 - 계란마을 약수터

   11:10분 - 소산서원

              명재상 경재 하연일가의선영

              신천약수터

              소암천교

   11:50분 - 청룡약수터

   12:00분 - 마애불

                마애불 지나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하산하면 외곽도로 옆으로 나오며 이내 대야삼거리 꼬꼬상회

   12:20분 - 꼬꼬상회앞 버스정류장에서 61번버스탑승

   13:10분 - 집도착

 

@ 교통편

   국철 1호선 부천 남부역 경원여객 환승

   부천 남부역 경원여객 터미널에서 탑승 10분 소요.

                      <일반버스 : 31, 31-3, 31-5, 31-7, 38, 61번>

                       <마을버스 : 015 번>

 

3. 산행개념도

 대야삼거리 꼬꼬상회앞

 

 꼬꼬상회 건너편 추어탕집 옆

 여우고개 직전 쉼터

 

 여우고개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어 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하여 如牛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 하여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여윈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도 있는 것 같다. 이 고개는 狐峴(호현)이라 한다.

이는 이곳에 나무가 많고 후미진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 하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본다. 소사 지역의 촌로들 중에서도

여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도로가 형성되기 전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신빙성 있는 설이라고 할 수 있다. 

 하우고개

하우고개라 부르게 된데에는 산의 형태인 와우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과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는 이산이 臥牛山이기 때문에 이산을 넘는 고개도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해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와우가 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옛날에는 시흥시 뱀내장에서 계양 황어장으로 닷새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행인들을 터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하는데 장사꾼들은 그들이 무섭지만 이 고개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이 고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돌뱅이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밑 주막에 모여 떼 지어 고개를 넘었으며, 언제 어디서 도둑떼들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사람과 소는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 강행군을 하여 고개마루에 올라서면 안도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 때 나오는 '하우 하우'하는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세번째 경우는 조선지지 자료에 이 고개를 화오고개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에서 이 산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하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성주산에서본 소래산

 만의골 길따라 가다가 좌측 가능골

 소래산

'소래'란 지명은 첫째 지형이 소라처럼 생겼다는 설과 둘째 냇가에 숲이 많다 즉 솔내(松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셋째 지형이 좁다 즉 솔다 → 좁다 등의 이유 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로는 신라 무열왕 7년(660)에

당나 라 소정방이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군사를 친히 이끌고 백제를 공략하기 위하 여 중국 산동성의 래주(萊州)를 출발하여

덕적도를 거쳐 이 산에 머물렀다고 한 다. 그뒤부터 소정방의 '소(蘇)' 자와 래주의 '래(萊)' 자를 합쳐 '소래산'으로 불리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휴일이면 인근의 인천, 부천 시민까지도 찾아와 즐길 정도로 자연경관이 빼어난 소래산은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약간의 짬만

낸다면 쌓인 피로와 긴장을 기분좋게 풀어줄 휴식처로 시민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육안으로도 서울 시가지와 서해바다가 선명하게 내려다보인다.

 가능골 입구

 

 계란마을 약수터 쉼터

 

 계란마을 약수터

계란마을 ?

조선 세종 재위시 영의정을 지낸 하연의 묘가 있는 곳.

지관이 명당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계란을 갖다 놓았더니 다음날 새벽에 병아리 울음소리가 들려 이곳이

명당임을 확인하고 묘를 썼다고 전해 내려온다.

또 다른 유례로는 하연의 아들 하우명의 묘 부근에 절과 마을이 있어 "절안골"이라 부르다가 점차 음이 변하여

계란마을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소산서원

1455년(세조 1)에 소산재로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1963년에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힘을 모아 다시 세웠고,

1995년에 중건하면서 소산서원(蘇山書院)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진양 하씨(晋陽河氏) 문효공파 종중에서 소유와 관리를 맡고 있다.
하우명은 영의정을 역임한 하연(河演)의 아들로서 사헌부 감찰, 동지중추부사를 지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 이후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였다. 또한 이름난 효자로서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셨으며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3년 동안의 시묘살이를

하면서 명복을 빌었다.

 

하연의 묘

본관은 진주. 자는 연량(淵亮). 호는 경재(敬齋)·신희(新稀). 부윤을 지낸 하자종(河自宗)의 아들이다.
1376년(고려 우왕 2)에 태어나 일찍이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하였다. 1396년(조선 태조 5) 문과에 급제한 후

예문춘추관 수찬관이 되었다. 이어 집의, 동부대언, 예조판서를 지냈다. 1423년(세종 5) 대사헌으로 있을 때에는 조계종 등

불교 5종파를 선(禪)·교(敎) 양종, 36본산으로 통합하고, 혁파된 사원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로 환수시켰다. 1425년(세종 7)에

경상도관찰사가 되었고, 이후 예조참판과 평안도관찰사가 되었으나 한때 천안에 유배당하기도 하였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1431년에 대제학이 되고 형조판서·좌참찬 등 고위관직을 지내고 의정부에 들어가 이조의 일을 맡아보았다. 1445년 좌찬성이 되었고

이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449년 영의정에 올랐다. 의정부에 들어간 지 20여 년간 법을 잘 지켜 승평수문(昇平守文)의

재상으로 일컬어졌다. 또 1451년(문종 1)에는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왕이 대자암(大慈庵)을 중수하려 하자 이에 반대 상소를

올리고 벼슬에서 물러났다. 1453년(단종 1) 별세하였다.
정몽주의 문인으로서 학문의 정도를 지키고자 노력했으며, 시문이 예스럽고 필법이 굳세어 하륜(河崙)이 경탄하여 마지않았다.

조선의 숭유배불정책에 충실하여 사찰과 승려에 관한 제도 확립에 앞장섰다.
편서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진양연고
서원(宗川書院)과 (晋陽聯藁)』가 있다.
태종은 그의 간관으로서의 태도가 의연함을 보고 손을 잡아주며 치하하였다고 하며, 1445년(세종 27)에 좌찬성이 되었을 때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을 받았다. 사후 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경상남도 진주종천

경상남도 합천신천서원(新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하우명의묘 

선생의 휘는 우명(友明)이요, 호는 연당(連塘)이다.아버님 문효공의 세분 아드님 중 막내로1431년에 서울 돈의문 밖에서

태어나셨다. 1493년10월15일에 돌아가시니 향년 80세의 천수를누린 셈이었다.만년에 아버님의 산소가 계시는 소래산

밑에 사셨기로 돌아가시자 소래산 남쪽 언덕에 묻히셨다.

생전에 문효공께서 문종(文宗)이 세자(世子)로 계실 때 그 분의 스승으로 계셨기로 은고(恩敲)가 깊어 세자께서 일찍부터

연당을 사랑하시어 특별히 돌보시어 연당공의 벼슬이 여러번 승진을 거듭하여 가정대부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돌아가신 뒤에 아버님 문효공의 영정과 함께 공의 유상을 모셨으나 불행하게도 승사손(承孫)에 죄가 있어 그 집안이 화를

입었으므로 1608년 영정을 합천으로 옮기고 1615년 겨울에 예조에 품신하여 정문을 옮기는 명을 얻어 사당을 타진당(妥眞堂)

이라 하였다.공은 이름난 효자로 여러 기록에 적힌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삼강행실에는 어머니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더니 작고함에 시묘를 하되 몸소 땔나무를 해다가 제사를 받들고 상을 마치고는

영당(影堂)을 짓고 철 따라 나는 음식물을 먼저 올리니 그 효성이 순독하다는 소문이 널리 알려져 나라에서 효자문을 세우고

호역(戶役)을 면해 주었다.

선생은 1504년 이래 합천 야로의 신천서원(新川書院)에 배향되셨고, 배위 순천박씨와의 사이에 4남1녀를 두셨다.

장남 철석(哲石)은 호가 학암이요, 호군(護軍)이며, 차남 철행(哲行)은 옥과(玉果)현감을 지 냈고, 삼남 철년(哲年)은

내금위(內禁衛)에 속했고, 사남 철원(哲原)은 문과에 올라 벼슬이 한때 병조참판에 이르렀다.재직중 좋지 못한 일로

평안도 북방으로 좌천되어 살았으므로 그 곳에 후손들이 살고 있음이 확인되고 있다  여서는 서명원(徐命源)이다.

 하제명.하중호묘

 

 소암천교

  청룡약수터

  마애불

  소래산중턱의 병풍바위(장군바위)암벽에 선각되어 있다. 머리에는 연화문의 화려한보관을 쓰고 있는데,위가 좁은 원통형으로

  안에 당초문이 장식되어있다.

  원통형의 관을쓴 보살은 고려시대에와서 많이 나타나는 형상인데,그것을 당초문으로장식한예는 아직 보고된바 없었다.

  얼굴은 둥근형상에 눈코입이 부리부리 할정도로 큼직하게 표현되어있고,양쪽 귀는 유난히길게 늘어져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둘러져있어 자못 근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얼굴에 표현주의적인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고려시대 불상의 특징이다.

  양쪽 어깨에 걸쳐있는 천의는 동체를 휘감았는데,가슴밑에는 결대가있고,그 밑으로 큼직한활과같이  굽은 형상을그리면서

  흘러내린 주름이 발목까지 유려하게 흘러내렸다.

  수인은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내장하였으며,왼손은 오른팔꿈치 부근에 상장하였다.

  발은 연화대좌위에 양쪽으로 벌린자세를 취하여 발가락 표현이 매우 섬세하다.

 대야동 와곽도로옆  늠내길 종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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