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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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인천에서 산길걸어 서울가기

無碍人 2008. 12. 15. 18:13

 인천에서 산길로만 걸어서 서울 갈수 있을까 ?

 있다. 한번 시도 해보기로 한게 지난해 겨울 이였다.

 그리고 무슨 비밀 통로인양, 혼자서 심심하면 이길을 다녔는데...

 녹음 짙은 하절기에는 그래도 울창한 숲으로 꽤 괜찮은 등산로...

 그러나 낙엽진 요즘은 도시와 주변을 관망하기 적합해 디카를 들이대 봤다. 

 

 @ 가는방법

     부개역(09:50출) - 일신동 3군지원사령부 - 자이아파트 - 중앙병원 - 거마산 정상(10:00 4km) 

     - 와우고개(귀성부대 후문) -  성주산 - 하우고개 구름다리(10:50 8km) - 서울신학대학 - 소사역(12:00 12km)

     - 원미산 정상(12:30 14km) - 부천상록학교 뒤 - 부천 생태박물관 - 작동터널 - 와룡산(해발114m) 정상(14:00 19km)

        부개역에서 착용한 만보개가 서울 와룡산 정상에서 19.37 km를 표시했다.

        4시간 10분을 쉬임없이 걸었다. 보통 여름에 5시간씩 걸리던 길이다.


    

   자이아파트 뒤에보이는 산이 만월산

만월산의 유래

원통산→주안산→만월산으로 바뀌었다.

남동구 간석동에 있는 만월산(187.1m)는 옛 인천부 주안면(朱雁面)에 소재한 주안산(朱雁山)이다.

왜 주안산이라 했는가? 

이 산의 흙과 돌이 모두 붉은 빛이라 주(朱)자와 산의 형국이 기러기가 나는 것 같다하여 안(雁)자를 붙이어 주안산이라 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1861년에 간행된 고산자의「대동여지도」에는 한문 표기에「雁을 岸」 으로 바뀌어「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 주안산을 주산으로 한 지봉이 서해바닷가를 휘돌아 해안에 접하고 있었으니 朱岸山이라 함도 그리 잘못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러나 元積山을 元寂山으로 옛 지도에 표기되었듯이 우리가 불러 온 모든 이름은 우리의 낱말에서 비롯되어 온 것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니 한자를 논할 필요성은 없다고 본다.

이 만월산은 한일합방 후 인천지방의 지지조사에 의하면 「인천부 주안면 원통산(元通山, 上十井里 東尾)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1986년에 발간된「한국지명 총람」에 「원통산-선유산, 간석동과 만수동 경계에 있는 산, 높이 187m, 신선이 놀았다고 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옛부터 부평사람들은 주안산으로 부르지 않고 이산을「원통산」 으로 불러 왔으며「원통이 고개」는 원통산에 있는 고개로 지금의 시립묘지 입구인 십정동에서 약사사로 넘어가는 고개를 "원테이 고개"라고 불러왔는데, 지금은 그 서쪽에 큰 도로가 뚫리어 이를 "원테이고개"로 모두 부르고 진짜 "원테이고개"는 이름도 빼앗기고 약사사의 벚꽃 상춘객이나 다니는 한적한 소로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원통산을 선유이라 하여 신선이 놀았다고 하나 산 전체를 살펴보아도 그러한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곳의 옛 仁川郡 주안면(朱雁面)은 1914년 3월 1일에 시행한 부·군·읍·면 폐합 때 仁川郡 多所面과 합병하여 머리글자를 따서 多朱面이 되어 새로 생긴 부천군에 예속되었다. 1\

1899년 9월18일 경인철도가 개통되자 주안역 (朱安驛)이 지금의 간석역 자리에 있었다. 그 이름 주안면, 주안산의 주(朱)자와 바로 밑에 임진외란때 고전장인 안대평(安垈坪)의 안(安)자를 따서 「주안」이라 이름지었고 이 역이 그 후 주안염전이 활발해 지자 충훈리로 이전하여 주안역 그대로 불러왔다.

경인전철이 복선화되고 옛 주안면 근방이 도시화되어 옛 주안역 자리에 간석역이 다시 생겼다.

이 주안산이 원통산, 선유산 등으로 불러왔는데 이 산 중턱에 위치한 약사사(藥師寺)의 창건 내력을 살펴보면, 「東方滿月世界 藥師如來 淨瑠璃國」이라는 불국(佛國)을 건설하여 일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할 것을 서원하고 1932년 금강산「유점사」에서 수행하던 한보월(韓普月 : 현주지 陵海스님의 부친)스님과 은사이신 晦明스님께서 득도하여 중생교화처를 찾던 중 우연히 꿈에 현몽하셨던 산 모습과 똑같은 곳을 발견하고 본래 산이름인 주안산, 원통산을 「滿月山」이라 고치고 약사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 약사사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면 큰 바위밑에 옛 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고려말기에 창건한 사찰로 사세번창하여 늘 백명의 스님들이 수행하여 백인사(百人寺) 라 불러왔으며 이를 주안사(朱雁寺)로 개칭했는데 조선조 성종때 억불숭유정책에 희생의 비운을 맞아 승려는 뿔뿔이 흩어지고 절은 페허가 되어 사라졌다고 전하고 있다.

이 백인사 위의 바위를 「부적바위」라 불러오고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일본 중이 주안산의 정기를 죽이려고 이 바위에 부적을 붙였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이 부적바위 밑에 주안사 옛 절터가 있고 주안산 서쪽기슭에 향기나는「돌우물」이 있어 이물은 약수로 안질, 종기에 특효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아서 이 소문이 조정에 알려져 세종 26년(1444) 조정에서 사람을 보내 물맛, 향기, 약효등을 세밀하게 조사했었다고 전한다.

옛 주안사 절터에도 샘물이 있고 지금 약사사 앞의 돌우물은 샘물이 끊어져 페천이 된 것이 있고 간석초등학교 북쪽에 있는 샘물은 옛날 용이 올라간 곳이라 용천(龍泉)이라 불러와서 수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다 먹고 있다.

어느 것이 옛 돌우물인지 좀 더 연구를 거듭하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이 "주안산"을 부평사람들만이 "원통산"으로 불러 온 것이 아니라 옛고지도를 살펴본 즉, 거의 모두가 "원통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선 영조 36년(1760)에 발간된「여지도서」그 후의「광여도」,「지승」,「해동지도」,「경기지」 ,「기전읍지」와 근세인 「부평부지도」(1872), 「부평군읍지」(1899)에 모두 원통산(元通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김정호가 간행한 「대동여지도」(1861)와 철종 때 간행된 「청구도」(靑丘:옛날 중국에서 부른 우리나라의 별칭)에만 주안산(朱岸山)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원래의 산 이름은 원통산(元通山)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거마산 가는길 솔향내 물씬 풍기는 오솔길 연속

   거마산에서 바라본 인천 계양산 앞 시가지는 송내역주변 상동

   거마산 정상

   거마산은 말이 서 있는 형상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거마산에서 바라본 성주산

 성주산 (일명 와우산)
부천시 남단에 동서로 길게 뻗어 있는 부천의 주산이다. 성주산(聖柱山)이라고 표 기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부터 이며 그 이전에는 와우산 또는 댓골산이라고 불렸 다. 특히 하우고개가 있는 부분은 1918년 발행된 <<조선지지자료>>에는 화오현산이 라 고 표기되어 있다. 성주산은 부천시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시흥시 대야등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1917년에 측량한 지도에는 聖主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해발 200미터이다. 성주 산 이라고 한 이유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일제 때 도서관 심곡분관 자리에 1938년 일왕 에게 참배를 강요하던 소사면 신사가 세워졌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산 이름이 아닌 가 한다. 성수산은 일명 와우산(臥牛山)이라 한다. 이 산의 형세는, 현재는 시 청사나 멀리 고증건물에서 관찰해야 볼 수 있지만 도 시 화가 되기 이전인 1960년대 까지만 하여도 벌막 쪽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소가 앉 아 있는 형세를 한 눈에 보아 알 수가 있었다. 즉 지금의 상수도 탱크가 있는 고 언저리의 돌출부인 성무정(활터) 쪽 언덕, 즉 서 울신학대학이 있는 뒷편의 돌출부는 마치 소가 앞다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임을 엿볼 수 있고 주봉인 산정상이 소의 엉덩이 부분이 된 형태이며, 여기서 약간 동 쪽에하우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가 잘라 곳은 소의 허리부분에 해당된다 이곳에는 성주산약수 터가 있다. 한편 부천풀장을 찌르듯 돌출된 능선이 바로 소가 엎드려 있을 때 다리를 굽힌 현 상이다. 서쪽으로 길게 뻗쳐 있는 능선 줄기는 소의 꼬리로 보아 소가 누워있는 형 태 이다. 한편 깊은구지 쪽의 성주산은 댓골산으로 불렀다. 이곳의 서쪽에 1960년대까지 암 자가 있었는데 산동네로 불리고 있다.    

 

 

 

하우 고개
하우고개라 부르게 된데에는 산의 형태인 와우에서 유래된 것이란 설과 의성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산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에서 유래되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처음의 경우는 이산이 臥牛山이기 때문에 이산을 넘는 고개도 한자로 표기하였다. 이를 우리말로 풀이해 와우고개라 하였다가 와우가 하우로 변해 하우고개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두번째 경우는 옛날에는 시흥시 뱀내장에서 계양 황어장으로 닷새장을 오가는 장사꾼들이 주로 이 고개를 이용했다고 한다. 이 무렵에는 행인들을 터는 도둑떼가 득실거렸다고 하는데 장사꾼들은 그들이 무섭지만 이 고개 외에는 이용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없어 하는 수 없이 이 고개를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돌뱅이들은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산 밑 주막에 모여 떼 지어 고개를 넘었으며, 언제 어디서 도둑떼들의 기습이 있을지 몰라 사람과 소는 가파른 길을 바쁘게 걷다 보니 모두가 숨이 턱에 닿을 정도로 찼다. 강행군을 하여 고개마루에 올라서면 안도와 함께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오게 된다. 이 때 나오는 '하우 하우'하는 숨소리의 음을 따 하우고개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세번째 경우는 조선지지 자료에 이 고개를 화오고개으로 표기하고 있는데에서 이 산에 오동나무가 자라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 아닌가 하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하우고개 구름다리에서 본 부천시

   하우고개 구름다리에서본 인천 계양산

   하우고개 구름다리에서 본 소래산

   성주산 쉼터

 

여우 고개
여우고개는 한자로 여우고개라 한 것으로 보아 산의 형세가 소가 누어 있는 모양이므로 소와 같다하여 如牛고개라 했다는 설과 여우는 여위다 하여 변화된 것으로 보아 여윈고개 즉 좁고 작은 고개라는 뜻도 있는 것 같다. 이 고개는 狐峴(호현)이라 한다. 이는 이곳에 나무가 많고 후미진곳이어서 여우가 많이 출현 하였다 하여 붙여진 것으로 본다. 소사 지역의 촌로들 중에서도 여우를 보았다는 사람이 있고, 도로가 형성되기 전 이곳의 지형으로 보아 신빙성 있는 설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 방향을 잘잡아야 소사역으로 바로간다.

   좌회전도 아니고 우회전도 아니다.

   이정표 뒤 오솔길 따라 산정상 부위 군부대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서울 신학대학 교정으로 내려간다.

   성주산에서 본 원미산

   서울신학대 교정에서본 원미산

원미산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부평구 관아(현 인천광역시 부평구 계산동 소재)의 동헌에서 아침 해돋이 때의 산세는 그지없이 선연하고 아름다우며 해질녘 노을에 반사된 그푸르름이 단아하기가 비길데 없어 이후이산을 보면서 원미산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전해지나 정확한 근거는 없다고 한다.

  서울 신학대학

   원미산 연리지 그러나 아쉽게도 이나무는 지난해 뒤에있는 나무가 고사했다.

 

- 연리지와 연리목

 

가까이 자라는 두 나무가 맞닿은 채로 오랜 세월이 지나면 서로 합쳐져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을 연리(連理)라고 한다. 두 몸이 한 몸이 된다하여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과 흔히 비유하였다. 알기 쉽게 ‘사랑나무‘라고도 부른다.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지면 연리지(連理枝), 줄기가 이어지면 연리목(連理木)이다. 연리목은 가끔 만날 수 있으나 가지가 붙은 연리지는 매우 희귀하다. 가지는 다른 나무와 맞닿을 기회가 적을 뿐만 아니라 맞닿더라도 바람에 흔들려 버려 좀처럼 붙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편 땅속의 뿌리는 우리가 잘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이런 연리현상이 땅위의 줄기나 가지보다 훨씬 더 흔하게 일어난다. 좁은 공간에 서로 뒤엉켜 살다보니 맞닿을 기회가 많아서 이다. 연리근(連理根)이라고 불러야 하나 쓰지 않는 말이다. 베어버리고 남아있는 나무 등걸이 몇 년이 지나도 죽지 않고 그대로 살아있는 경우을 흔히 본다. 잘려지지 않은 옆의 나무와 뿌리가 연결되어 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이다.

- 과정


연리가 되는 과정은 이렇다. 가까이 심겨진 두 나무의 줄기나 가지는 자라는 동안 지름이 차츰 굵어져 맞닿게 된다. 양쪽 나무에서 각각 해마다 새로운 나이테를 만들므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서로를 심하게 압박한다. 우선 맞닿은 부분의 껍질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여 파괴되거나 안쪽으로 밀려나고 나면 맨살이 그대로 맞부딪친다. 남남으로 만난 둘 사이에는 사랑의 스킨십이 이루어지면서 물리적이 맞닿음이 아니라 생물학적인 결합을 준비한다. 먼저 지름생장의 근원인 부름켜가 조금씩 이어지고 나면, 다음은 양분을 공급하는 유세포(柔細胞)가 서로를 섞어버린다. 마지막으로 나머지의 보통 세포들이 공동으로 살아갈 공간을 잡아가면 두 몸이 한 몸이 되는 연리의 대장정은 막을 내린다. 고욤나무에 감나무 접을 붙이는 것과 같은 원리다. 이런 나무를 잘라보면 마치 쌍 가마를 보고 있는 듯 두 개의 나이테 두름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두 나무 세포의 이어짐은 적어도 10여 년이 넘게 걸리고 결국은 한 나무와 꼭 같아진다. 양분과 수분을 서로 주고받음은 물론이고 한쪽나무를 잘라버려도 광합성을 하는 다른 나무의 양분 공급을 받아 살아 갈 수 있다.
연리목은 인위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 4~5년 생 정도의 같은 종류의 어린 나무 두 그루를 구하여 한 걸음 정도 떨어지게 심고 뿌리가 완전히 내리기를 기다린다. 두 나무가 맞닿을 줄기 부분의 껍질을 약간 긁어내고 탄력 있는 튼튼한 비닐 끈으로 묶어두면 연리목이 만들어진다. 나무의 종류는 자귀나무나 음나무가 좋다. 자귀나무는 밤이 되면 마주 보고 벌려진 잎이 증산작용을 줄이기 위하여 닫아버리는 현상을 두고 의좋은 부부를 상징하며, 음나무는 사랑을 방해하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맨 왼쪽이 소래산 성주산 거마산

   오늘 내가 저능선을 지나서 왔다.

   원미산에서 본 소래산

   멀리보이는 큰산이 서울관악산, 원미산 정상 시계최고였다.

   원미산에서 본 계양산

   영상과 문화의도시 부천 하늘 높은줄 모르는 빌딩숲

 

   부천 자연생태공원내 식물원

 

 

   와룡산 정상에서본 목동 H타워

 

 와룡산(해발 114m)

구로구와 양천구 및 경기도 부천시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표고 80∼120m 가량의 봉우리들은 한남정맥의 한 줄기인 수원의 광교산과 백운산, 안산의 수리산, 인천의 소래산 지맥을 따라 부천 원미산에서 온수동 큰산과 궁동의 와룡산으로 이어지는 잔구성(殘丘性) 산지이다.

구로구 궁동의 진산(鎭山)인 표고 114m의 와룡산은 부천시 작동과 경계를 이룬다. 이 산과 그 좌우로 뻗어 있는 산등성이가 마치 용이 웅크리고 누워 있는 형국이라고 하여 와룡산이라고 하는데, 그 중간쯤인 궁동의 산을용의 허리라고 한다.

용의 허리에서 서쪽으로는 수렁고개가 원각사를 지나 우신중·고등학교 옆 건너편 산을 잇는 산등성이가 되고, 이어 남쪽으로 흘러 우신빌라에서 끝난다. 또 용의 허리에서 동쪽으로는 궁동과 신정3동과 경계를 이루는 산등성이가 계속 궁동과 개봉동과의 경계를 남쪽으로 뻗어 교통안전진흥공단 옆에서 끝난다.

궁동 남쪽 어귀의 동서 양쪽 산 끝 사이의 평지는 폭이 약 400m인데, 이 어귀에서 북부 끝 산꼭대기까지는 1.8km 가량 길게 뻗어 있고, 그 중간쯤의 동서 폭은 약 1km로 퍼져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전체가 마치 항아리를 엎어놓은 것 같은 모양이다. 즉 금계포란형(金鷄包卵型)의 산세이다.

풍수지리상으로 보면 와룡산의 동쪽 등성이가 좌청룡(左靑龍)으로 표고 108m의 청룡산과 그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 등성이는 우백호(右白虎)가 되는데 104m 봉우리에서 원각사를 안고 내려온 능선이 88.5m 90.5m 봉우리를 만들어 내백호(內白虎)를 이루고, 104m 봉우리에서 더 남하하여 103m 봉우리에서 내려온 95.5m의 도당산과 78.5m의 두리봉이 외백호(外白虎)가 된다.

마을 복판에 있는 궁동저수지(낚시터)까지 북쪽 산기슭에서 논 가운데로 길게 뻗은 산 1-6번지의 언덕이 곧 명당 혈()인 것이다. 이 곳에 선조의 일곱째 딸인 정선옹주(貞善翁主)와 부마인 길성군(吉成君) 권대임(權大任)을 비롯하여 안동권씨 일가 8기의 무덤이 있다. 아울러 궁동이란 지명도 선조가 정선옹주에게 이 일대를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주면서 비롯되었다. 이후 궁골의 서쪽에는 안동권씨 일가가 현재까지 17대째 계속 거주해 오고 있다.

한편 와룡산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청룡산 기슭은 전의(全義) 이씨의 사패지였다. 고려 개국공신 이도(李棹) 11세손인 정간(貞幹)과 문간(文幹)이 궁동 산 10번지 일대 약 30만평을 사패지로 하사받아 정착한 후 현재까지 20대째 이어오고 있다.

1960년 초에 궁동 와룡산 중턱에 원각사(圓覺寺)가 건립되었다. 이 절의 특징은 산령각 남쪽에 시멘트로 만든 관음보살상이 2단으로 된 연대(蓮臺) 위에 조성되어 있는 것이다.

1970년에는 궁동과 개봉동을 연결해 주는 높이 108m의 청룡산 중턱에 관음사(觀音寺)가 세워져 원각사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대웅전에 모신 미륵불상은 까만 기단과 흰 연대 위에 서 있는데, 빨간색으로 입술연지를 한 것이 특색이다. 이 원각사와 관음사의 배치를 그 진산인 와룡산과 청룡산의 위치와 대비하여, 풍수지리적으로 양과 음의 조화로 보기도 한다.

와룡산의 남서쪽으로 연이은 산줄기로 서울의 가장 서쪽에 있는 온수동과 부천시 역곡동·작동의 경계에 세 산봉우리가 나란히 서 있다. 세 봉우리 중 서북쪽에 있는 높이 122.7m의 제일 왼쪽 봉이 큰산으로 일명 까치산이라고도 한다. 까치산은 가운데 봉우리가 83m, 오른쪽 봉우리가 98m에 불과하여 연봉 중에서는 높은 느낌을 준다. 이 세 봉우리로 형성된 산을 흔히보름뫼라고 하는데 보름달이 떠오를 때 표고 98m의 오른쪽 봉우리에 제일 먼저 달이 걸리기 때문에 오른쪽 봉우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보름뫼 기슭의 마을을 안말 또는 보름매말이라고도 부른다.

이 큰산 동남 기슭을 온수골이라 하는데 이곳에는 진주유씨의 묘역이 있다. 조선 중종 때 영의정이었던 유순정(柳順汀)이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이 지역 30여만평을 사패지로 주었다. 이후 후손들이 정착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온수골 서북쪽 보름뫼 기슭으로 서웅전기주식회사 뒤쪽을 능안이라고 하는데 영등포기계공업단지가 형성된 곳이다. 능안은 왕릉이 있는 골짜기 안쪽이라는 뜻인데, 그 유래에 대하여 두 설이 있다. 하나는 왕실의 종친인 이양(李暘)의 일가와 함께 선영이 있기 때문에 붙여졌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온수동 약수터(능안약수터)가 있는 골짜기 일대로 고려 때 호족이 정착해 살면서 능이 생겼기 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능안의 고분을 파본 결과 석곽과 토기 등의 많은 유물들이 나왔다고 한다.

터골의 뒷산인 도당산과 두리봉은 산 모양이 둥그러워 동그란산이라 부르며, 표고 95.5m이다. 일명 벽산·시루봉이라고 한다. 모양이 마치 시루를 엎어놓은 것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이라고도 하고, 산사태 방지를 위해 시멘트 콘크리트로 둘러 박았다 하여 벽산이라고도 한다. 또 철길 옆이라 하여 철마산(鐵馬山)이라고도 한다. 도당산의 이름은 온수연립주택단지에서 궁동의 우신중고등학교와 두암빌라 쪽으로 넘어가는 삭새고개 마루턱에 도당(都堂)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두리봉은 78.5m 77m의 두 봉우리로 되어 있으며 보통 뒷산으로 부른다.

와룡산과 청룡산 능선을 비롯한 큰산·보름뫼·도당산·두리봉을 포함한 일대 구릉지대는 미시설 도시자연공원인 온수공원(溫水公園)으로 지정되어 있다. 와룡산 일대는 구로구 온수동 산 1-1번지 일대를 비롯한 85필지 1,097,530㎡와 양천구 신월동 산 85-4번지 외 145필지 1,003,471㎡를 대상으로 도시계획에 의해 1971 8 6일 건설부고시 제465호로 자연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1986 11 3일 건설부고시 제528호에 의해 최종 결정고시와 지적고시 되었다.

온수공원에는 온수동지구에 3, 신월동지구에 4개의 옹달샘이 있는 등 2 4개의 공원시설이 있다. 연인원 20 6천명이 이용하고 있다.

                                                                                                                                                                     

                                                                           


1 악장 (Allegro Moderato)
Daniil Shafran, Cello
F.Gottlieb, Piano
Recorded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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