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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방방곡곡 여행기

전등사 뒤지기

無碍人 2009. 4. 29. 09:33

2009년 4월 23일 목요일 날씨 맑음

 

지맥구간 종주중 삼랑성을 그냥 지나칠수 없어 유유자적....

이제 막 봄볕에 깨어나고 있는 삼랑성은 고려시대 어느날 인듯 고즈넉하다.

역사의 숨결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 아닌가 싶다.

 

 

  서문에서 정족산 사고터 가는길

 

 

 

 

 

정족산사고(鼎足山史庫)

  임진왜란(1592)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춘추관, 충주.성주.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에 보관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효종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사고가  건립되어 이안봉안되어 1910년 일제에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 사고의 실록과  규장각의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 학무관 분실에 이장 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1년 전후 훼손되어 빈터만에 주춧돌만 보존되어 오다가 1999년 복원되었다.

 정족산 가궐지(鼎足山 假闕址)

   고려 고종46년(1259) 풍수도참가 백승헌의 진언에의해 건립된 가궐(假闕)터이다

   당시 백승헌이 낭장으로 있을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 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했을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단에 제사를 하면 친조문제가 해결되고 그주위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것이라

   진언하였다 전한다. 건물은 몽골군 진입으로 소실 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 왕이 거쳐

   하지 않을때는 평상시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놔 두었다 한다.

 

  종각

 

 약사전(藥師殿) 보물479호

   약사전은 중생의 병을 고쳐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법당이다.

   [대웅전약사전개와중수기(大雄殿藥師殿個瓦重修記)]에 조선 고종 13년(1876)

   대웅전과 함께 기와를 바꾸었다는 기록이 보일뿐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수 없지만

   건축양식이 대웅전과 비슷하여 조선 중기 건물로 짐작하고 있다.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지붕의 옆면에서 볼때 여덟(八)자 모양과 비슷한

   팔작 지붕이다.

   건물내부의 천장은 우물(井)자 모양이며 주위는 호려한 연꽃무늬와 덩쿨무늬를 그려놓았다.

 

 전등사 대웅전(傳燈寺 大雄殿) 보물 178호

  조선 광해군13년(1621)에 다시지은 정면3칸 측면3칸의 목조건물로,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인 공포가 기둥위뿐만 아니라 기둥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부분을 둥글게처리하여 안정감을 주었으며, 네모서리 기둥 윗부분에는 벌거벗은

  여인상을 조각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것은 절을 짓던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친 여인을 조각한것으로 나쁜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하기위해 추녀를 받치게 하였다한다.

  대웅전 내부에는 삼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천장은 용,극락조, 연꽃등으로 화려하게 채색하였고

  부처를 모신 불당과 당집 또한 화려하다. 

  추녀를 받치고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 경내로 들어서는 입구에 세운 누각식 건물이다.

  전등사 대조루가 언제 지어졌는지 알수 없으나, 고려말 대학자 목은(牧殷)이색(李穡)의

  [전통사시]에서 대조루를 읊은 시구가 있는것으로 보아 고려말에는 이미 대조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932년 사찰안의 건물을 수리하면서 대조루도 다시 지었다. 

 

 전등사 윤장대(輪裝臺)

  윤장대란 불교경전을 넣은 책장에 축을 달아 돌릴수 있는 것으로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경전을

  읽은 것과 같은 공덕이 있다 한다.

  전등사 윤장대는 보물 684호를 똑같이 재현한 것이다.

  윤장대를 세운이유는 부처님 법이 널리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 지세를 고르게 해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들고 태평성대를 이루어 달라는 염원이 들어 있다.

  삼랑성 안에는 이같은 고목이 많다.

  정족산성(삼랑성)

  양헌수장군 승전비

  1866년 병인양요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을 기리는

  비로 앞면에는 순무천총 양공 헌수승전비(巡撫千總梁公憲洙勝戰碑)

  라고 새겨져있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14년(1848)에 무과에 급제한후

  벼슬을 지내다가 1866년에는 병인양요시 프란스군을 패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인물이다.

  승전비에는 양헌수를 비롯한 367명이 프랑스군대를 맞아 활약한 당시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삼랑성 북문


 삼랑성(三郞城)

    일명 정족산성(鼎足山城)이라 한다.

    성을 쌓은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단군이 세 아들에게 성을 쌓게하고

    이름을 삼랑성이라 했다는 기록이[고려사]에 보인다.

    처음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 이었는데 삼국시대에 이르러 그 위에

    막돌을 맞추어 가며 쌓았고 성체 안에는 막돌을 채운 튼튼한 석상으로

    축조 되었으며,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보강되었다.

    성안에는 전등사는 물론고려시대에는 가궐(假闕),조선시대에는

    사고와 선원보각이 있었다.

    병인양요때(1866년)양현수 장군이 프랑스 군을 물리쳐 이곳에 보관된

    [조선 왕조실록]과 왕실 족보인[선원보]를 지켜낸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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