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강화 나들길 2코스(호국돈대길) 본문
2010년 10월 21일 목요일 날씨 맑음 홀로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다.
자식이 군대를 다녀오고 이제 곁을 지킬까 했는데..내가 내엄니에게 그랬던것처럼 또 떠난다.
어쩌면 인간의 숙명, 아니...모든 생명있는 만물들의 숙명이 그러겠지만...그래도 헤어짐은 그만남이 약속되어 있어도
짠하고 가슴저리고....암튼 공항대합실에서 사라지는 아들녀석을 보고온지라...마음의 갈피를 잡기도 그렇고...예정에 없던
나들길 탐방에 나섰다. 땀이라도 뻘뻘 흘려야 이 심란한 마음 갈피를 잡을것같아...
녀석? 열심히해서 2년후 만날때 지금 모습그대로 한결 성숙한 사내가 되어 돌아오렴..
새벽 5시부터 부산을 떨어 아들을 데려다주고 집에오니 8시, 대충 카메라를 둘러메고 강화행버스에 탐승
10시30분 강화역사관 앞에서 도보여권에 출발도장 꾹누르고 시작이다.
오늘 탐방일정도 만만찮다. 총거리 17km 5시간 이상 소요될것같다.
탐방로가 염하를따라 강화외성을 걸으며 초지진으로 남하하는코스지만,다 알다시피 이코스는 그늘이 없다.
그래서 하절기 탐방은 좀 무리가 있지만 요즘은 걷기 참좋은코스다.
역사적으로 여기는 호국의길이다. 이강토를 지키기위해 우리 조상들은 여기에 수많은 젊음을바치고 이곳을 지켜낸곳이다.
그 선열들 개개인은 각각 자기가 가진 전부를 여기에 묻고 오늘 우리를 있게했다.
향쟁의 역사를 음미하면서도 봄과 가을 이곳의 풍광은 정말좋다.
특히 요즘 들판에 추수가 한참이고 가을햇살에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염하강의 가을 바다,강건너 뭍에서 물들어가는 가을 정취를
즐기는 것은 고난의 역사현장에서 느끼는 후세인의 사치와 같다.
그래도 오늘을사는 우리는 역사는 기억하고 이 아름다운 풍광은 보존하고 지키며 즐겨야 하지않을까??? 말안돼나?
역사관을 벗어나면 강화대교 아래로 이어지는 강화 외성은 연미정부터 초지진까지 23km에 이른다
이내 요즘 사람이 스테미너 식으로 즐겨먹는 더러미 장어촌이 나오고 더러미포구의 한적한 풍경은 뻘위에 묵여있는 두어척의
낡은배에서 여기가 슬로우 시티 아닌가 싶을정도로 조용하고 적막하다.
간간히 뻘에서 긴 장화를 갖추어 신은 조사들의 낚시하는 모습이 고즈넉하기만하다.
한시간여만에 깃발이 나부끼는 조선시대 어느날쯤으로 기억되는 용진진...용담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
오두돈대, 강화전성의 느티나무는 이미 가을이 절정이다. 전성 아래 소풍나온 여인들의 웃음소리...웃음소리 뒤로펼쳐지는 막걸리잔
기우는모습 ㅋ~ 이나라에서만 볼수있는 풍경이랴..
오두돈대에서 광성보가는길 강화외성 잔디위에 털푸덕 주저앉아, 지금 밀물이 시작되는지 염화강을 거슬러오르는 물길을 음미하며
거친 빵 한조각을 씹는다. 저 강물이 저리 뒤돌아 오듯 녀석도 거침없이 달려 오리라...
광성보에는 수많은 학생들이 운집해 있다.
아마 현장학습으로 역사 탐방에 나선 초등학생 중학생들같다.
여기저기 역사현장을 설명하는 선생님들 목소리를 뒤로하며, 신미양요때의 그긴박한 역사속으로 상상의 나래를 펴본다.
나라의 국운이 기우는 이시기, 우리 민초들은 어떻게 이시련의 시기를 버텨냈는지...몸을던져 여기 산화한 현장이라니...
건너 김포땅 덕포진에 자그만 무덤이 눈에 잡히는데 군초소가 옆에 있으니 이또한 엄연한 역사의 현장이다.
이곳 광성보와 덕포진을 일컬어 손돌목이라 한다. 조선인조때 손돌이라는 사공의 슬픈 충절이 서려있다하니...
위정자들은 자기 허물을 감추고 이렇게 또그 죽음마저 .....억울하고 분한 민초가 여기 또있으니...이게 우리들 역사라고...
덕진진에 이르러 길이 끊겨 애매하다. 매표소에 이르러 길을 물으니 이아가씨 더 애매하다.
덕진진안으로 길이 있다하나 사람들은 없다한다고..무슨 선문답..결론은 덕진진안으로는 길이 없고 해안도로따라 가야 하는데..
무지 애매한 답을한다. 왜일까??? 수많은 탐방객이 덕진진안에서 길을 찾다 못찾아 헤매었다는 증거랴...
잠깐 도로따라 내려가다 다시 해안의 외성길을 따라가면 초지포구 그리고 오늘 종착지 초지진이다.
초지진은 신미양요때 미국의 군함이 초토화 시킨 진지다. 미국이 ? 우리를 ? 그들도 한낯 제국의 군인들이였으니 자국의 이익을위해
언제든 ....양의 탈을 뒤집어쓴 양인일뿐...결국오늘에도....기억해야 할일이다.
온수사거리로 갈까하다 시간이 너무 늦으것같고, 초지대교에서 다리를 건너는 버스를타고 양촌면 양곡에서 인천행 버스로 환승하여....
1. 탐방코스
강화역사관-더러미포구-용진진-용당돈대-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보-용두돈대-덕진진-초지진
(총 17km,5시간 10분)
2. 탐방경로
08:30분 - 집출발
08:45분 - 부평역 90번 버스탑승
10:30분 - 강화역사관 풀발
여행안내소에서 도보여권에 도장 꾹욱눌러 받고 화장실 옆 외성길로 출발
20여분이면 더러미 장어촌,더러미포구에 이르고 1시간이면 용진진
11:30분 - 용진진
11:50분 - 용당돈대
용당돈대에서 화도돈대가는길은 해안의 아담한 숲길로 접어든다.
12:10분 - 화도돈대
돈대를 지나 화도수문이나오고 이수문은 조선시대부터 보수관리해오고 있다.
12:40분 - 오두돈대
오두돈대지나 강화전성에 이르면 느티나무에 가을이 깊었다.
13:10분 ~ 30분 - 오두돈대와 광성보중간 외성위 잔디밭 빵으로 점심
14:20분 - 광성보
신미순의총과 용두돈대가 있고 제법넓은 성안에는 감나무에 감이고즈넉하고,용두돈대에 이르면
건너김포 덕포진의 손돌묘가 보인다.
15:00분 - 덕진진
안으로 길이없고 해안도로 따라가다가 해안으로
15:40분 - 초지진
16:00분 - 초지대교 정류장에서 버스승차 양곡환승
@ 교통편
서울, 인천, 부천, 일산 등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 오실때 강화대교 건너 청소년수련관 앞에서 하차하시고
강화역사관으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초지진에서 강화역사관이나 강화읍터미널로 오실때 1번 순환버스를 이용하세요..
인천이나 서울로 갈때는 초지대교 입구나 온수사거리에서 버스탑승(수시있음)
3. 탐방개념도
앞으로 2년, 제발 건강하게 많이배우고 만 돌아오라...인~석아!!
강화역사관
강화외성
고려시대부터 외적을방어하기위해 연미정부터 초지진까지 23km걸쳐 매장되어있다.
고려 고종이 몽골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후 쌓았다.
조선시대에도 해안방어를 위해 계속축성되어 축성기법의 변화를 살펴볼수있다.
오두돈대주변은 영조18년(1742년) 벽돌로 쌓은 전축성이 남아있어 수원화성과 함께 전축성 연구사료로 중요하다.
더러미포구
갈대
억새
소풍나온 게
용진진
조선 효종7년(1656년)에 쌓았다.
이 진에서 가리산,좌강,용당등 3개돈대를 관리했다.
석축은 대부분 없어지고 무지개모양의 홍예문두개만 남아있어 복원하였다.
용진진전경
소풍나왔어요
염하강
용당돈대
조선 숙종5년(1679) 강화해안 방어를 위해 쌓은 49개돈대중 하나
염하강건너 김포통진 골프장
용당돈대에서 화도돈대가는오솔길
화도돈대
조선 숙종5년에 쌓은돈대,돈대 남쪽아래는 고려외성을 가로지르는 울길을 건너는 화도 수문이 있다.
순조3년(1803)에 세워진 비석으로 화도수문의 개축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조복양이 석문을설치하여 조수를막았고,영조대에 외성을 축조하면서 수문을 쌓았다는 기사등이 기록되어있다.
강화간척사업의 역사와 강화외성축조과정을 알수 있다.
화도수문
오두돈대
외적의 침입이나 척후활동을 사전에 관찰하고 대비할목적으로 접경지역이나 해안지역에 흙이나 돌로쌓은 소규모방ㅇ시설을 돈대라한다.
강화지역에는 숙종5년(1679)강화전해안을 하나의 방위체제로 운영하고자 돈대를 설치했다.
오두돈대는 지형이름에 나타나듯이자라의 머리와 같은지형에 설치되었으며평면형태는 원형으로 지름이 32m에 이른다.
돈대 동남쪽으로 오두정지와 강화전성이 있다.
강화전성
강화동쪽해안에 설치된 강화외성의 일부구간에 해당하며,고려고종때 흙으로 쌓아만든 토성을 조선 영조19년(1743)강화 유수 김시혁이 벽돌로
다시 쌓았다.축성방법은 갯벌위에 다듬이돌을놓고 그위에 벽돌을 쌓아만들었는데 현재 8~10단이 남아있으며 정조18(1794)때 쌓은 수원화성보다
50년이나 이른시기에 쌓은 것이다.
광성보
광성보는 덕진진, 초지진, 용해진, 문수산성 등과 더불어 강화해협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이다.
고려가 몽고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면서 1233년부터 1270년까지 강화외성을 쌓았는데, 이 성은 흙과 돌을 섞어서 쌓은 성으로
바다길을 따라 길게 만들어졌다. 광해군 때 다시 고쳐 쌓은 후 효종 9년(1658)에 광성보가 처음으로 설치되었다. 숙종 때 일부를 돌로 고쳐서 쌓았으며,
용두돈대, 오두돈대, 화도돈대, 광성돈대 등 소속 돈대가 만들어 졌다.
영조 21년(1745)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었는데 ‘안해루’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의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세한 무기로 용감히 싸우다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이 순국하였으며 문의 누각과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이 파괴되었다.
1976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의 쌍충비와 신미순의총 및 전적지를 수리하고 세운 강화전적지, 수리한 것을
기록한 비석 등이 건립되었다.
광성돈대
쌍충비
이 비는 조선 고종 8년(1871) 신미양요시 광성보 전투에서 순절한 어재연장군과 그의 아우 어재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어재연·어재순 이하 전 수비군은 열세한 병기로 미국 아세아 함대(미국의 남북전쟁을 우승으로 이끈 부대)의 해병대와 치열한 격전을 벌려 전 수비군이 장렬히
순국한 곳에 나라에서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이 전투에서 어재연장군 이하 전 수비군은 최후의 한명까지 포로 되기를 거부하고 의연히 전사(53인(사망)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은 포로되기를 거부하고 전부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함) 함으로서 외침에 줄기차게 항쟁하는 우리 민족의 살신 호국의 본보기를 보였던 숙연한 곳이다.
신미순의총
이 곳은 신미양요때 광성보 일대에서 미군과 격전하다가 전사한 용사들의 묘입니다.
당시 중군 어재연 장군과 아우 재순을 비롯한 군관과 사졸 53인의 전사자 중에서 어재연 형제의 시신은 고향으로 보내고 이름모를 51명의 시신을 7개의 묘에
합장하여 그 순절을 기리고 있는 것입니다.광성보 전투에서 조선군은 최후의 한명까지도 포로가 되기를 거부하고 비겁하게
물러서지 않았으며, 외침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우리 민족의 살신호국 정신을 보여준 곳이라 하겠습니다.
손돌목돈대
광성포대
조선후기 강화해안수비를 위해 설치된 방어시설
용두돈대
김포 덕포진 손돌묘
손돌목 전설
조선시대 인조로 추정되는 왕이, 강화도로 피신하게 되어 배를 타게 되었다.
손돌은 경험이 많은 뱃사공으로 왕의 배를 젓게 되었느데, 왕이 앞을 내다보니, 손돌은 위험하게 보이는 여울 쪽으로 노를 젓는 것이었다.
두려운 생각이 든 왕이 "여울물 쪽으로 가지 말라."고 하였지만, 손돌은 계속하여 위험한 여울 쪽으로 노를 저어갔다.
왕이 손돌을 의심하여 손돌을 죽이라고 명령하자, 손돌은 "여울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길이 강화도로 가는 안전한 길"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왕은 믿지 않았다.
손돌은 체념한 뒤 바가지 한 개를 올리면서 "만약, 배를 저어가다 뱃길을 잃게 되면, 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져 이 바가지를 쫓아가십시오." 라고 마지막 말을 한 뒤
처형되었다. 손돌이 처형되자, 초겨울의 북서풍이 세차게 불고, 배를 가눌 수 없게 되어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이 때 손돌이 남긴 바가지를 배 앞에 던지니 바가지는 배 앞에서 떠가는 것이었다.
왕이 탄 배는 바가지가 떠가는 대로 뱃길을 잡아 강화도에 도착하였고, 왕은 손돌의 사당과 비석을 세웠다.
손돌이 죽은 음력 10월 20일경에는 북서풍이 거세게 불어오는데 이를 손돌풍 이라 하며, 매년 음력 10월 20일에 손돌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손돌이 죽은 곳을 손돌목 이라고 한다. 광성보에 들어가면 손돌목돈대가 있다.
손돌목돈대 동쪽 아래에 있는 용두돈대로 가면, 용두돈대 앞의 염하가 손돌목이다.
손돌묘는 용두돈대 건너편의 덕포진에 있다.
들판에는 추수가 한창이다.
강화 쑥
덕진진
고려시대에 강화해협을 지키던 외성의 요충지이다. 병자호란 뒤 강화도를 보호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성·외성·돈대·진보 등의 12진보를 만들었는데
그 중의 하나이다. 효종 7년(1666) 국방력 강화를 위해 해군주둔지(수영)에 속해 있던 덕진진을 덕포로 옮겼으며, 숙종 5년(1679)에 용두돈대와 덕진돈대를
거느리고 덕진포대와 남장포대를 관할함으로써 강화해협에서 가장 강력한 포대로 알려져 있었고, 강화 12진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곳을 지키고 있었다.
1866년 병인양요 때는 양헌수의 군대가 덕진진을 거쳐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1871년 신미양요 때는 미국 함대와 가장 치열한
포격전을 벌인 곳이다. 그러나 초지진에 상륙한 미국군대에 의하여 점령당하였다. 이 때 건물에 몸을 숨겨서 적과 싸울수 있도록 쌓았던 낮은 담은 모두 파괴되었다.
1976년 성곽과 돈대를 고치고 남장포대도 고쳐 쌓았으며, 앞면 3칸·옆면 2칸의 문의 누각도 다시 세웠고, 당시의 대포를 복원하여 설치하였다.
초지대교
초지진
안산의 초지량에 수군의 만호영이 있었던 것에서 처음 비롯되었는데 1666년에 초지량영을 이곳으로 옮긴 뒤 ‘진’으로 승격되었다.
일본이 조선을 힘으로 개항시키기 위해서 파견했던 운양호의 침공은 고종 13년(1876)의 강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으로 이어져 일본침략의 문호가 개방되었다.
민족시련의 역사적 현장이었던 이곳은 호국정신의 교육장이 되도록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의 대포를 진열하였다.
'이 또한 지나가리 > 강화지맥(完)'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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