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강화 나들길 1코스(심도역사문화길)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강화지맥(完)

강화 나들길 1코스(심도역사문화길)

無碍人 2010. 10. 6. 08:32

2010년 9월30일 목요일 날씨 쾌청 나홀로

 

날씨는 활동하기 좋은계절로 접어들고 있다.

대간종주를 많이 해야 하지만 생업의 문제도 있고 대간종주는 산고의 고통처럼 체력적인 부담이 많다.

또한 무엇보다 내가 즐기는 대간길이 자꾸 줄어드는 이상한 강박관념도 아끼면서 가는 대간길이다...

그래서 가까운 정맥이나 지맥길을 갈까 생각도 했는데, 내가 사는 인천에 속한 강화 나들길을 종주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강화는 인천광역시에 속해 있어 아이들이 어려서 많이 다녔고, 지난번 강화지맥종주도 한바 있어 교통편은 그리

문제 될게없고, 생업중에도 짬짜미 시간을 낼수 있으니 대간종주 중간 중간 다녀오려고 시작했다. 

부평에서 버스로 강화 터미널에 도착하여 터미널안에 있는 여행안내소에서 나들길 지도와 도보여행여권을 받아

길을나섰다. 아 ~ 참  "도보여행여권"에 대해서 언급해야 겠다.

나들길 종주를 원하는 사람에게 나들길 8코스 전부를 종주하면서 출발지에서 도장을 받고 도착지에서 확인받는

일종의 인증인셈인데 여행안내소에서 달라는 사람에게만 준다.

8코스 전부를 종주하기를 원하면 반드시 강화 터미널에서 도보여행여권을 받아서 출발하는것도 의미가 있다.

1코스는 "심도역사문화길" 다소 어려운 용어인것같은데 그의미가 궁금하다 나들길 중간중간"심도드는길"이라는

이정표도 있고 참어렵다는 생각에 찾아보았다.

그랬더니 내 무지한 역사의식이 문제 였다 이겁니다.

한때 나라의 수도였던 강화는 ‘심도(沁都)’라고도 불렸다 하니 이 간단한 진리를 몰라 "심도드는길"이 뭐꼬 하며

내내 머리아파했으니....아~ 이 무지 ....

아무튼 1코스는 강화 터미널에서 오읍약수까지는 강화읍내 문화유적지를 탐방하는코스로 곳곳에서 역사의 향기를

느끼며 소박한 왕궁의 모습을 즐기며 아직도 남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지금 느끼기 부족함이 없는길이다.

고려부터 조선말까지 슬픈역사의 현장 같아 비감한 느낌도 든다. 

화려할거라고는 전혀 없는 몽고 침략으로 수도를 버리고 이섬에 있었을 왕과 그신하들은 이섬 심도에서 무슨

생각으로 무슨 걱정을 하며...

또한 한낯 시골 나무꾼에 불과한 강화도령은 어느날갑자기 왕자수업을 받으면서 어떤 느낌이였을까?

세상의 거센파도가 밀려오는 선말 이나라 관료들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국제정세에 이섬에서 어떤 역할을...

슬픈역사를 간직한 섬이지만 또한 구국의 역사를 태동한 섬이기도하다.

자신들의 신념에 따라 순교한 종교인이 있는가 하면, 나라에 몸바쳐 봉사한 인재가 많은곳이기도하다. 

오읍약수를 지나 대월초교에서는 약간 알바를 하기도 했지만 이내 복귀하여 연미정에 이르고 연미정에서는

청과의 굴욕적인 강화조약의 슬픈역사보다는 남북을 가르는 북녘의  민둥산 산하가 더 가슴저리게한다.

연미정부터 옥계방죽을지나 옥림리 삼거리까지는 그늘없는 농로길이지만 가을들판의 황금물결과 옥계방죽의

물고기노는 모습, 이제 보기힘든  제비들의 군무가 장관이다.

천주교 갑곳성지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순교한 이들의 넋을기리는 기도도량이 있어 종교와 무관하게

그분들들의 숭고한 정신에 머리를 숙여 애도하며 경건한자세를 갖게된다.

갑곳성지 정문을 내려서면 바로 오늘종착지 강화역사관이 있는 갑곳돈대다.

 

1. 탐방코스

   강화터미널-동문-성공화강화성당-용흥궁-고려궁지-북관제묘-강화향교-은수물-북문-북장대-오읍약수

   -연미정-옥계방죽-갑곳성지-강화역사관(총 18km,6시간소요)

 

2. 탐방경로

   07:30분 - 부평역 강화버스(90번) 승차

   09:40분 - 강화 터미널도착

                 터미널내 여행안내소에서 지도와 도보여행여권 수령

   10:00분 - 터미널출발

                터미널에서 풍물시장 인삼센터 삼거리에서 시내쪽으로 도로따라 가다보면 우체구에서 우측으로

                언덕길 넘어서면 동문

   10:20분 - 동문 (忘漢樓)

                 동문 좌측 아스팔트길에서 우측으로 돌아 올라가면 원불교

                원불교

                 월불교 옆 느티나무좌측으로 리본 따라 내려다 다시 우측으로 리본따라가면 성공회성당

                용흥궁

                 성공회 성당정문 맞은편이 용흥궁 궁둘러보고 용흥공원직진하면 고려궁지

                고려궁지

                 입장료 900원을내고 궁지둘러본후 북관묘방향으로 화살표 리본 안내판을 따라가면 이내 북관제묘

                북관제묘

                 문은 닫혀 있고 답장너머로 아담한 내부를 들여다 볼수 있으나 비가새는지 천막을 씌워놓아 복원이 시급한듯

                 길과 전봇대등에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면 이내 한옥마을 말이 한옥마을이지 전통 방식은 아닌듯 여기저기

                 시멘트 담장이 눈에 거슬리고 다만 좁은 골목길은 옛스러움이 남아있는듯...

                한옥마을

                 한옥마을에서 강화여고방향으로 가면 향교가 나오고 향교지나 은수물 약수터

               강화 향교

   11:30분 - 은수물

                 은수물약수터를 지나 강화여고 기숙사부지 지나 야산(강화산성길)으로 접어들고 여기부터 오읍약수까지 1시간

                 정도는 숲길

                북문-북장대-오읍약수터

   12:20분 - 오읍약수터  

                 오읍약수터에서 목을추기고 돌따라 대월초등학교 옆 강화 씨름장 안쪽으로 나들길 연결

                 여기서 화살표를 놓쳐 도로따라 고개를 넘어가는 바람에 20여분 알바

                 씨름장지나 호젓한 산길을가면 우측에 황형장군묘가 있고 좌측으로 대산리 고인돌군 지역인데 이곳 강화북부에서는

                 황형장군이 연미정과도 깊은 인연이 있는것 같아 그의 묘소를 찾아보기로 하고 탐방로에 있는위치에서 우측 숲길을 살펴보니

                 10여미터 길없는 숲아래  황형장군 묘와 장무사라는 전각이 위치하고 있어 둘러봄

                대월초등학교

                황형장군묘

   13:40분 - 연미정

                 황형장군묘를 내려갔다 다시 탐방로로 복귀하여 한참을 가면 마을이 나오고 이마을에서 연미정을 바라보며 농로길을 한참

                 가면 연미정 연미정에서는 북녘의 산하와 건너 문수산 염하강을 내려다 볼수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연미정 바로 아래를 조망하는것도 운치가 있다.

                 연미정에서 제법 긴 휴식과 간단한 점심을 때우고 돌따라가면 옥계방죽이 나오고 수로따라 30여분 두번째다리 지나면 삼거리

                 삼거리우측길 따라가면 두번째삼거리 좌측 지나 바로 좌측 산길 1시간여가면 슾지지나 공장지대만나고 공장지대 좌측도로

                 따라 강화대교 아래로 직진하면 갑곳성지   

   14:30분 - 옥계방죽

                공장지대

                갑곳성지

                 강화대교 아래로 직진하여 성지안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오면 강화역사관

   16:00분 - 강화역사관

                  입장료 1300원을 내고 갑곳돈대를 가서 염하강을 바라보고 강화대교를 조망하면 오늘 탐방 완료

                  여행안내소에 들러 확인도장 필수 ㅋㅋㅋ

 

@교통편

   서울 인천 일산 부천 김포 등에서 강화행버스 수시 터미널 하차

   강화 역사관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모든 시외버스 탑승

 

3. 탐방개념도

 

 

 도보여행여권

 출발지에서 확인도장받고 도착지에서 꾸욱~

 강화터미널

 동문

강화산성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방어시설이자, 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려 원종 11년(1270) 개경으로 수도를 다시 옮기면서 몽골과 강화조약의 조건으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조선 전기에 내성이었던 강화성을 축소하여 다시 지었다. 1637년 병자호란 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당하였고, 숙종 3년(1677)에 성을 보수하면서 모두 돌로 쌓고 넓혀 지었다.
남문인 안파루·북문인 진송루·서문인 첨화루와 동문인 망한루가 남아있으며, 비밀통로인 암문 4개 그리고 수문이 2개 남아있다. 높은 곳에서 망을 보기 위한 장대와

성위에서 몸을 감추기 위한 여장 등의 방어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 부분은 없어졌으나, 남북쪽 산자락은 잘 보존되어 있다.
조선 후기 병인양요·신미양요와 일본 침략에 의한 강화조약을 체결한 수많은 외세침략의 역사적인 현장이다.

 우측 원불교

 성공회 강화성당길

 성공회성당

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

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회 강화성당은 서쪽에 출입문을 배치하여 서구 형태를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배(船)모양을 본 떠 뱃머리인 서쪽에는 외삼문 및

 내삼문과 동종을 배치하고, 중앙에는 성당을 두었다. 후미에는 사제관을 배치하여 특이한 양식을 보여주며 우리나라 건축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는 유적이다.

 용흥궁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지붕을 받치면서 장식을 겸하는 공포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다.
용흥궁은 청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궁궐담장을 넘는능소화

 능소화

옛날에는 양반집에만 심는 귀한꽃 요즈음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꽃 임금님눈에 들어 하룻밤을 보낸 후 후궁들의 시기로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임금을 기다림으로 평생을 살았다는...궁녀를 묻은 자리에서 피어난, 이꽃은 귀를 활짝 열어 님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는 듯, 나팔처럼 활짝 피었다는 슬픈

전설의 꽃 ,궁궐의 꽃, 능소화의 슬픈 전설이 꽃을 ‘구중궁궐의 꽃’이라칭하는 이유가 있습니다.옛날 옛날 복숭아 빛 같은 뺨에자태가 고운 ‘소화’라는

어여쁜 궁녀가 있었답니다.임금의 눈에 띄어 하룻밤 사이에 빈의 자리에 앉아궁궐의 어느 곳에 처소가 마련되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그 이후로 빈의 처소에

한번도찾아 오지를 않았다고 합니다.
빈이 여우같은 심성을 가졌더라면 온갖 방법을 다하여 임금을 불러들였건만 아마 그녀는 그렇지 못했나 봅니다.
빈의 자리에 오른 여인네가 한 둘이 아니었기에 그들의 시샘과 음모로그녀는 떠밀려 궁궐의 가장 깊은 곳에 기거 하게 되었는데 빈은 그런 음모를 모르는

채마냥 임금이 찾아 오기만을 기다렸다.혹시나 임금이 자기 처소에 가까이 왔는데 돌아가지는 않았는가 싶어 담장을 서성이며 기다리고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장을 너머너머 쳐다보며 안타까이 기다림의 세월이흘러가고 있었답니다.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불행한 여인은상사병으로 세상을 뜨게 되었습니다.
권세를 누렸던 빈이었다면 초상도 거창했겠지만 잊혀진 구중궁궐의 한 여인은초상조차도 치루어 지지 않은채 담장가에 묻혀'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
한 그녀의 유언을 시녀들은 그대로 시행했습니다 더운 여름이 시작되고온갖 새들이 꽃을 찾아 모여드는 때 빈의 처소 담장에는조금이라도 더 멀리 밖을 보려고 높게
발자국 소리를 들으려고 꽃잎을 넓게 벌린 꽃이 피었으니 그것이 능소화입니다.
덩굴로 크는 아름다운 꽃이지요.아무튼 능소화는 세월이 흐를수록더 많이 담장을 휘어감고 밖으로 얼굴을 내미는데그 꽃잎의 모습이 정말 귀를 활짝 열어

놓은 듯 하다.한이 많은 탓일까요 아니면 한 명의 지아비 외에는 만지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을까 꽃 모습에 반해 꽃을 따다 가지고 놀면, 꽃의 충이 눈에 들어가

실명을 한다니 조심해야 합니다.장미는 그 가시가 있어더욱 아름답듯이 능소화는 독이 있어더 만지고 싶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강화 고려궁지는 고려시대 대몽항전의 중심지였고 그 이후에는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행궁등의 시설이 이곳에 많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에 중요한 시설이었던 외규장각이 이 곳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구한말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은괴 19상자와 함께 약탈했습니다.

 북관제묘

관제묘는 아시다시피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관우 운장의 위패를 모신 사당입니다.

중앙에는 관우를 좌우에는 관우와 같이 죽은 양아들 관평과 충실한 심복장수 주창의 위패를 둔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관우의 사당이 있을까? 관우는 중국상인들이 자신의 수호신으로 삼고있는 신이기도 하고... 

관우사당이 우리나라에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시기입니다.. 원병으로 온 명나라 군대를 따라 들어온 것이지요..

그들의 수호신인 관우의 사당을 세우기 시작했고..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조선에서도 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인식으로는 미신나부랑이 취급했다고 합니다..

그런대....  명이 무너지고 청이 들어서고....   조선을 둘러싼 외교정세가 급변하게 됩니다...

이 혼란기 나라룰 추스리기 위해서 ...그리고 자존심을 세운 조선은 명이 망한 다음 중화를 이은것은 조선이라는 이론이나오기 시작합니다...

송시열이 중심이되서...

조선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강화를 요새화 하는 작업에 더욱 박차를 가합니다....  임금님의 근위대격인 어영청 병사들까지 동원해서 강화에 돈대를 축조할

정도니까요 이때에 국가에 충성스러운 충신의 표상이 필요하게 되었고그 충신의 표상을관우로 지목하여 대대적으로 관제묘를 세우게 됩니다.. 

서울에 있는 동묘도 이때 대대적으로 중수를 하게 됩니다....

북관제묘는 고종때 육지에서 자재를 실어다가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는 외세가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하는 위기국면인 상황이었습니다.. 국가가 위란에 처할때 구국의 영웅이 필요했고..

그 구국의 영웅, 죽더라고 변치않을 충신의 표상이 필요했고...다시금 관우가 빛을 발하게 됩니다...

양이들이 쳐들어올때 최전방이 되는 곳.... 강화에 관제묘를 세우게 되는 배경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 하살표가 나들길 안내지기 입니다.

 한옥마을 고즈넉한 골목

 강화향교

성현들에게 제사지내고 지방민의 교육을 위해 세웠던 국립교육기관으로 고려 인종 5년(1127) 세웠다.

그 뒤 여러 차례 옮기고 복원하였는데, 지금 있는 위치는 영조 7년(1731) 유수 유척기가 옮긴 것이다.
남아있는 건물로는 제사공간인 대성전과 동무·서무,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비롯해 여러 부속 건물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원받아 제사와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으나, 교육기능은 사라지고 지금은 제사의 기능만 남아있다.

 은수물

 그런데 이사진은 슈퍼스타가 나타났다.

 모든 아이와 학부모가 스타 한명에게 집중됐는데....

 

 그 스타는 바로 이친구 정예준

 전남 순천 평화초등학교 학생

 오카리나를 코로불고 있다 동요한곡을 멋지게 불고 서비스로 새소리 강아지소리까지...

 하도 신기하여 다시 청해서 들었다.

 재주 많은 멋쟁이 예준이 친구 홧팅

 은수물을 지나면 이런 산성길

 북문

  강화산성

  고려산

 

 북장대에서본 북녘의 산하

 늘 느끼는 느낌이지만 속상하다. 인민은 굶기고 산은 헐벗고...

 오읍약수

 성곽을 따라 오르다 북장대에서 길을 꺾어 오읍약수터로 내려간다. 이 약수터에는 애절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피난 온 고려인들은 서둘러 산성을 쌓았는데

날이 가물어 갈증으로 큰 고통을 받았다. 정성 들여 기우제를 올렸고 마침 벼락 하나가 성벽 근처로 떨어졌다. 그 곳의 바위가 깨졌고 맑은 물이 솟아나 있었다.

쫓겨 온 고려인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절하고 간절했는지 하늘이 울고 땅이 울고 산이 울고 임금이 울고 더불어 백성이 울었다하여 ‘다섯 오’에 ‘울 읍’자를 써

오읍(五泣)약수라 불렀다. 이렇듯 이 근처에 오면 고려는 늘 슬프다.

 

 대월초등학교

 

  황형

  조선 생몰년 : 1459년(세조 5)~1520년(중종 15) 자 : 언평(彦平) 시 호 : 장무(莊武) 본 관 : 창원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삼포왜란 당시 방어사로 왜적을

대파한 인물. 1480년(성종 11) 무과에 급제한데 이어, 1486년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평안도우후를 지내고 유원과 혜산진의 첨절제사로 나갔다.

그 뒤 훈련원도정·의주목사·회령부사·함경도병마절도사·평안도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첨지중추부사에 올랐다.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유담년(柳聃年)과 함께 각각 경상좌·우도방어사로 임명되어 왜적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특히 제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삼포의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도총관·지훈련원사를 거쳐, 1512년 평안도 변방에서 야인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로 나가 이를 진압하였으며,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가을이 깊어가고...

 

 

 연미정

자연경관을 보며 풍류를 즐기거나 학문을 공부하던 정자이다.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며 민간인 통제구역이지만 지금은 개방되어있다.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합수지점

 멀리 송악이 ???

 염하강거너 문수산 건너 보구곳리는 한남정맥 끝지점

 

 

 

 옥계방죽

 

 

 

 어렸을적 보았던 제비

 

 

 

 고라니

산을 다니면서 수없이 이친구들과 만났지만 이친구처럼 나를 살피는녀석은 없었다.

내가 네컷의 사진을 찍도록 나를 살피더니 두녀석이 눈을 한번 주고받더니 출행랑

금년에 태어난 새끼인듯 포동포동 살찐 두 고라니 형제

중국과 한국이 원산이다. 주로 홀로 살아가며, 늪·들판·산기슭에서 지낸다. 놀라면 마치 토끼처럼 뛴다. 어깨 높이는 약 50㎝이며, 거칠고 두꺼운 모피의

상부는 황갈색이고, 하부는 흰색이다. 수컷의 경우 뿔은 없으나 입에서 삐죽 튀어나와 구부러진 송곳니가 있다. 한국에 서식하는 아종(H. i. argyropus)은

얼굴의 상부가 회갈색이나 적갈색이다.

 

 갑곳성지

  강화도는 한국 천주교회 창립 초기인 1795년부터 천주교와 연관을 맺고 있었다. 조선에 최초의 선교사로 입국한 중국인 주문모(周文謨)신부가

철종(哲宗)의 조모(祖母)인 송(宋)씨(은언군의 처)와 며느리 신(申)씨를 각각 마리아로 세례를 준 것이 조정에 알려지게 되면서 1801년(辛酉迫害)에

그 둘은 순교하게 된다. 그런데 이를 계기로 1786년(정조10년)부터 자식 상계군(常溪君)의 역모죄로 강화에 귀향하여 살던 은언군(恩彦君-철종의 조부)

이 강화부(관청리 형방 - 천주교 강화성당 부근)에 배소되어 처형된다. 또한 신유박해의 순교자요 백서(帛書)를 쓴 황사영의 탄생지가 이곳 대묘동

(강화읍 월곳리)에 있어 한국 천주교회 창립시기부터 인연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화도가 천주교와 또 다른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839년 기해교난을 겪으면서였다. 그동안 천주교 신앙 유입시 이용되던 부경사행로(赴京使行路)의

이용이 여의치 않게 되고, 의주, 변문의 국경 경비와 기찰(譏察)이 심해지자 신자들은 육로로 이어지던 중국 선교사들과의 접촉 반업을 바꾸어 해로를

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강화도와 황해도 연안의 뱃길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후 한강을 이용한 해로의 지리적 비중이 커지면서 황해도 지역의 천주교

신앙 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하였다.

 특별히 김대건 신부는 선교사를 입국시키는 해로를 개척하기 위해 서울 마포를 떠나 이곳 강화 갑곶 앞바다를 지나 연평도, 백령도를 거쳐 순위도

등산진에서 1846년 6월에 체포된다. 따라서 강화도 갑곶 해안은 김대건 신부의 마지막 해로 여행지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뒤 이 강화 갑곶해안은 베르뇌

장 주교, 쁘띠니꼴라 신부, 쁘르띠에 신부, 페롱 권신부 등의 선교사들이 한경 해로로 입경하기 위해서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같이 선교사들이 지나쳐가기만 하던 강화도에 첫발을 내딘 이는 프랑스 선교사 리델(F. 꺙디, 李福明)신부였다. 그러나 그의 목적은 선교가 아니라, 1866년 10월

프랑스가 강화도를 점령(병인양요 丙寅洋擾)할 당시 그들의 통역 및 뱃길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리델 신부는 선교

자유 획득을 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 병인양요는 대원군에 의해 전개되었던 천주교 탄압의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한 사건이 되었다. 이 천주교 박해의 과정에서 9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살해되었고, 체포를 면한 리델 등 세 분의 선교사들이 청나라로 탈출했다. 리델 등은 자신의 동료들이 직면했던 상황을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에게

호소했고, 이 과정에서 조선에 대한 무력적 침략의 방법을 통한 응징이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과는 달리 이는 교회에 대한 대대적 박해로 이어졌는데, 이는 프랑스 함선의 침략이 조전인 내응자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일로 판단했고,

 그 내응자로 천주교도들을 지목했기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

(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梟首刑)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박순집

(朴順集)의 형, 50세 된 참조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하였으며, 1870년에는 김포 통진 출신 권 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삼아 1871년 군함을 앞세우고 강화도 해역을 침범한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난 후 대원군은

더욱 심하게 천주교를 박해하게 된다. 미국 군함이 물러간 후 고종은 철저하게 천주교인을 잡아 처벌하라는 교서를 내리게 되는데 이때 미국 함대에 왕래

했던 박상손(朴常孫),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등이 제일 먼저 잡혀 이곳 갑곶진두(갑곶나루터)에서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탱자나무

 탱자나무의 북방한계를 증명하는 나무, 운향과(芸香科 Rutaceae)에 속하는 낙엽관목.

키는 3m 정도 자라며, 줄기와 가지 곳곳에 커다랗고 뾰족한 가시들이 달려 있다. 잎은 어긋나며 3장의 잔잎으로 이루어진 겹잎으로 조금 두껍다.
잔잎의 가장자리에는 조그만 톱니들이 있으며 잎자루 양쪽으로 날개가 달려 있다. 꽃은 지름이 3~5㎝로 잎이 나오기 전인 봄에 가지 끝 또는 잎겨드랑이에서
1~2송이씩 하얗게 핀다. 꽃잎과 꽃받침잎은 모두 5장이며, 수술은 많다. 지름이 3~5㎝ 정도인 열매는 노란색의 장과(漿果)로 익는데, 향기는 좋지만 날것으로
먹지 못하며, 겉에는 털이 많이 나 있다. 덜 익은 열매를 2~3조각으로 잘라 말린 것은 지실(枳實), 열매 껍질을 말린 것은 지각(枳殼)이라 하여 건위제·이뇨제로
쓰는데, 지각은 관장제(寬腸劑)로, 지실은 습진 치료제로도 사용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울타리용으로 많이 심고, 감귤의 대목(臺木)으로도 심는다. 중국이 원산지로 알려져 있으며 아주 오래전에 한국에 들어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한국에서도 자생해왔다고 주장한다. 경기도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의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8호, 강화군 화도면 사기리의 탱자나무는
천연기념물 제7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는데, 이들 나무는 모두 강화도를 지키기 위해 심은 울타리용으로서 그중 일부가 남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강화역사관

갑곳돈대

 이 돈대는 고려 조정이 고종 19년(1232)부터 원종 11년 (1270)까지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몽고와 줄기차게 싸울 때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 던 중요한

요새였다.조선 인조22년(1644)에 설치된 제물진(갑곶진)에 소속된 이 돈대는 숙종 5년 (1679)에 축조 되었다. 고종 3년(1866) 9월 7일 병인양요시 프랑스

극동함대가 6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곳으로 상륙하여 강화산성, 문수산성등을 점령하였다. 같은 해 10월13일 프랑스군은 삼랑성(정족산성) 전투에서 양헌수

장군의 부대에 패해 패주하였다. 이때 강화성 안에 있던 강화동종을 가져가려 하였다가 무거워 가져가지 못하고 성내에 있던 외규장각 도서 등을 약탈하고

조선궁전 건물은 불을 질러 소실되었다.

돈대 안에는 조선시대의 대포가 전시되어 있는데 일명 홍이포라고 부른다. 이 대포는사정거리 700m의 대포로써 포를 쏘는 원리는 포구로 화약을 장진하고 다시

포알을 넣은 다음 포 뒷쪽 윗 구멍의 심지에 불을 붙여 넣는다. 그러면 그 안에서 화약의 폭발과 함께 그 힘에 의해서 포알이 날아가게 되어있으며 포알은 폭발하지

않으므로 살상 능력은 그 당시 서양대포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위력이 약하다 하겠다.

돈대 안에 있는 이섭정은 고려시대에 몽고와의 협약을 이루려할때 교섭이 우리측에 이롭게되기를 염원하여 지은 팔각의 정자로 그후 조선 태조 7년(1398)에

강화부사 이성이 복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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