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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1코스(계양산둘레길)

無碍人 2014. 12. 8. 13:15

2014년 12월8일 월요일 밤새 살짝 눈 맑음 나홀로

 

인천 둘레길 1코스 계양산 둘레길이다.

간밤에 진눈개비가 좀 내려 길은 미끄럽지만 대부분 구간이  한번쯤은 지나간 익숙한 코스라 잘 아는 길이다.

계양산에 들면 언제나 그시대 먼 온조와 비루의 나라로 시간 여행을 하는 착각에 빠져 든다.

국내성을 떠나 비루가 이곳에 이르렀을때 이곳의 풍경은 어땠을까?

지금 아파트 숲이된 저 도시의 공간은 원시림 가득하고 해안선은 저 도시 깊숙이 까지 들어와 낙원을 만들고,계양산 호랑이는 지나는

비루 일행을 살피며....그 상염에 잠기다 연무정을 오르고,1500여년전 갈등의 현장에서 백성을 동원해 성을 쌓고 누구를 위한 싸움인지

알지도 못한 헐벗은 민초들은 이산마루 어딘가에서 저 골짜기 어느 바위틈에서 이름없이 사라져 간  전장터가 여기 일까?

인천 둘레길 로고가 그려진 안내판이 둘레길임을 상기 시키고,누군가와 함께 걸으며 방향을 가르키는 마스코트,닻을 형상화 한 방향 표시,

둘레길임을 알리는 리본등이 출발부터 친절하다.

금새 네갈래 길이된 '하느재'에 이르고 이고개 넘어 무당골은 부평의 여러 마을 사람들이 철마다 찾아와 마을의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도당굿을 하던 곳이라 그리 부른다고 한다.

아직도 무당골에는 굿당이 남아 있고 성업중이란다.

다만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비는 대신 개인의 영달과 출세를 기원하고 무병장수를 비는.......

하느재는 묵상리 사람들이 재넘어 부평에 나뭇짐을 지고 넘을때 고개가 가파르고 높아 하늘로 올라 가는것 같다고 하여 '하늘재'라 했는데

시간이 지나며 '하느재'라 부르게 됐다. 다른 뜻으로 '땀이 비오듯 흐른다'는 '하누재'로 불리기도 하는데 한자로 한우현()이라 표기하며

조선지지에는 한자로 한우현이라 표기하고 '한우재고개'라는 우리말로 표기돼 있기도 하다.

등로는 서설이 내려 상서로운 기운이 감돌고 이곳이 무당골이라 하니 이른 아침 지나는 사람 없는 고요가 잔등을 서늘하게 한다.

잰 걸음으로 무당골 고개를 넘어 수목원을 지나 고랑재고개에 이른다.

고랑재고개는 묵상동에서 옛 부평으로 넘어가는 고개인데 '밭고랑' '물고랑' 하듯 좁고 긴고개 라는 뜻으로 쓰인다.

고랑재 하면 될것인데 뒤에 고개가 또 붙었다.

네이버 지도에도 나오는 이름이라 그냥 쓰기로 한다.

경인운하를 파면서 살던 주민을 이주 시킨 이주 단지를 지나 반딧불이와 도룡농 서식지를 지난다.

환경운동가 신정은씨와 윤인중 목사가 7개월간 나무위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지켜낸 소중한 자연이다.

피고개는 검암동에 살던 해주 정씨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렵게 과거 공부를 하여 진사시에 합격해 관직에 나갔는데 억울하게 관직을 박탈당하고 돌아 오는길에 이고개를 넘다 피를 토하고

죽었다하여 '피고개'라고 한다.지금도 검암동에는 해주 정씨 집성촌이 있고 조선의 문신 허암 정희랑의 유허지가 남아 있다.

징매이고개는 옛날 개성을 오가는 길목 이었다.

이곳은 원체 도적이 많아 행인 1,000명 이상이 모여야 넘을 수 있다는 뜻에서 ‘천명고개’로 불리기도 했다. 

부평의 고려때 지명인 수주()를 따서 '수주현'이었다.

고려 충렬왕은 매 사냥을 즐겨 응방()을 이곳에 설치하고 매를 징발 했다고 하는데 이로부터 '징맹이고개 징응현(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

징맹이고개가 한자로 표기되는 과정에서 '경명고개'를 거쳐 '경명현'이 되었다고 전한다.

"조선지지자료"에 경명현()이라는 지명과 함께 우리말로 '경명이고개'라 기록되어 있다.

묵상동쪽으로 앞매이산,말등매이산 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 것으로봐 이곳이 매 훈련장이거나 사육장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이 징매이고개가 '중심성'(衆心城)이  있던 자리다.

운요오 사건으로 일본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돼고 원산과 인천이 개항된게 1883년이다.

서구 열강들의 강요로 개항을 결정한 고종임금은 이 자리에 성을 세우라고 명한다.
병인·신미양요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왕은 경명현을 주요 전선으로 판단한 것이다.
동쪽으로 171m, 서쪽으로 297m, 성문이 3m에 이른 총연장 471m의 중심성은 그러나 별다른 쓰임 없이 방치되다 1914년 헐리고 만다. 
중심성은 당시 축조를 지휘했던 부평부사 박희방이 백성들의 노고를 치하해 지은 이름이다.

중심성을 지나 계양산 산림욕장에 이르러 공원 관리원 한테 '이규보 시비'위치를 묻는다.

'이규보시비?' 반문하며 모른단다. 자기는 공원 불법행위 단속 나왔단다.

그런게 어딨느냐는 표정이다.

완장차고 목에 힘이 가득 들어간 폼이 거만하다. '완장이라...' 쓴 웃음이 난다.

바로 옆에 거대한 돌탑이 있다.

이규보 시비다. 건물 2층 높이의 화강암 돌탑이 사뭇 위압적이다.

고려 시대의 자그마한 시비를 기대 했던 나는 그 공원 관리인의 무식 만큼 무식하고 무모하다는 느낌이 든다.

이규보가 이 시비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진다.

고려시대 대표적인 문장가이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으로 유명한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1168~1241)는 1219년 지방관의

죄를 묵인해 계양도호부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13개월간 좌천된 적이 있어 부평(계양)과 인연이 깊다.

그가 머물렀던 관사 자리에는 ‘자오당지(自娛堂址)’라는 지표석이 남아 있으며, 계양산 자락에는 이규보의 시비(詩碑)가 건립돼 있다.

또 부평구 십정동에 있는 국철1호선 역의 이름인 ‘백운(白雲)역’도 이규보에게서 비롯된 명칭이다

이규보의 시비는 그가 태어난 여주 강화등에도 있는데 13개월의 짧은 기간 이곳에 머물렀던 관사의 당호(堂號)를 자오당(自娛堂)이라 하고

자오당기를 지었다. 자오당은 '홀로 즐거워 한다'는 뜻으로 이 시절 이곳 계양부사의 관사가 얼마나 궁상 맞은지를 보여준다.

자오당기에 의하면 "고을 사람들이 산기슭의 갈대 사이에 있는, 마치 달팽이의 깨어진 껍질 같은 다 쓰러진 집을 태수(太守)의 거실이라고 했다.

그 구조를 살펴보니, 휘어진 들보를 마룻대에 걸쳐 놓고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 했을 뿐이다."

부사의 관사가 이랬으니 이 시절 이곳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궁핍 했을까 짐작이 간다.

자오당터는 부평 향교가 있는 건너 중구봉 아래에 있다.

지금 계양구청 양궁장으로 쓰는 자오당터와 이규보가 더위를 피하며 임지를 떠날때 초정기(草亭記)를 썼던 초정터를 다음 구간에 들러보기를

기대하며 계양문화회관 주차장을 거쳐 연무정에 이르러 1구간 답사를 마무리한다.

놀며 쉬며 2시간 30분이면 족하다.

 

1. 답사코스

   연무정-하느재-무당골-청수수목원-고랑재고개-앞매이산 숲길-묵상동 이주단지-반딧불서식지-피고개-중심성(징매이고개)

   -계양산 산림욕장-계양문화원-연무정(8.9km 2시간 30분)

 

@. 교통편

    인천 지하철 1호선 계산역 5,6번 출구

 

 

 

연무정

 

여러 사람이 함께 걸으며 방향을 표시하는 마스코트

 

둘레길 로고와 닻을 형상화한 방향 표시

 

 

하느재

 

 

 

 

 

청수농원

 

 

 

 

 

 

고랑재고개

 

 

묵상동솔밭

 

 

 

 

 

 

 

 

 

 

 

 

 

 

피고개

 

 

 

 

 

 

 

중심성(징매이고개)

 

 

 

 

아규보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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