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인천둘레길 3코스(원적산 둘레길)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道界·市界·郡界

인천둘레길 3코스(원적산 둘레길)

無碍人 2014. 12. 23. 10:13

2014년12월14일 일요일 맑다가 눈 천사랑

 

인천둘레길 3코스는 원적산을 한바퀴 도는 9.8km의 산책로다.

원적산(元績山165m)은 인천 부평구와 서구를 가르는 경계로 북쪽으로 천마산(), 계양산(山)으로 남쪽 으로는

함봉산,만월산을 거쳐 부천 성주산,안양 수리산,수원 광교산,용인 석성산을 거쳐 안성 칠장산으로 이어지는 한남정맥이다.

오늘 코스는 원적산 생태통로가 있는 세일고등학교 정문에서 가좌동을 거쳐 경인여상 방면으로 진행한다.

늦은 오후 집안의 잔치 행사에 참석 하기위해 처가 식구들이 집으로 모이기로 해 이른 아침 둘레길에 나선다.

가좌동은 구한말 부평군 석곶면 가좌리로 가좌란 우리말 가재에서 나왔고 '가재가 많이나는 동네'라는 뜻이다.

1980년대초 인천에 온 나는 실제로 지금 생태통로에서 가좌동으로 넘어오는 오른쪽 골짜기 개천에서 가재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다.

가좌리는 송림동 도화동에서 보면 지금은 매립된 인천 의료원옆 인천교 아래 개골 건너라는 뜻으로'개건너'라는 우리말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제말 천간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광복후 가좌동()이 되었다.

마가의 다락방을 지나 경인여상 뒷길에 이르면 석남동이다.

석남동(洞)은 구한말 부평군 석곶면 번작리()와 고잔리에 해당한다.

번작리란 우리말 '번직이'에서 온말로 해안 초소에 번(番)을 섰다하여 유래한 이름으로 일제 강점기 촌상정()이라 불리다

광복후 '석곶 남쪽에 있는마을'이라는 뜻으로 석남동이 되었다.

석남약수터(가좌여중)을 지나 팔각정을 거쳐 가정고등학교 뒷길로 가면 가정동이다.

가정동(佳停洞)은 여말선초의 문신 조반이 농사를 지으며 시작(詩作)을 하던 가정터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구한말 석곶면 가정리,서곶면 가정리가 됐다가 일제 강점기 천대전정(千代田町)이 됐고 광복후 가정동이 됐다.

 

서구는 계양산과 천마산 원적산이 등뼈처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 서쪽 해안에 자리 잡았다.

해안선이 들쭉 날쭉해 마치 잔털이 무성한 반달모양 같다하여 모월곶이라 불렸다.

해안엔 율도와 세어도 청라도를 비롯해 장금도,이도,호도,문첨도,소문첨도등의 크고 작은 섬이 널려 있었으나 대부분 서해 매립지로 매립돼

청라지구와 쓰레기 매립장이돼 이름만 남아 있다.

서구는 옛날부터 한강 이남 지역에서 한강을 건너 평양이나 개경(송도)으로 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육로로 과거를 보러 가기위해 삼남지역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여각촌이 발달하여 500여호에 이르렀다 한다.

우리 고유 공놀이인 '격구;가 번창해 큰 구경거리가 돼기도 했고 검암동엔 쑥시장인 '발아장'이 있어 전국의 보부상이 모여 들었다.

세종실록엔 서구에서 생산된 '사자쑥'이 약효가 좋아 중국과 일본에도 알려져 '쑥당의 고장'으로 기술돼 있다.

 

나비를 주제로한 나비공원을 지나 장수산에 이른다.

청천동은 장수산과 원적산에서 발원한 물이 하도 맑아 '맑은 내(청천,淸川)'라  불려 청천동이 됐으며,구한말 까지는 부평 도호부 마장면((馬場面)

속하였다. 마장(馬場)이란 지명이 생긴것은 청천동,산곡동,효성동 일원을 '마당뜰'이라 했는데,허허벌판에 억새가 우거진 곳이라 말이 좋아하는

억새 우거진 벌판이라서 '새벌''새벌리(효성,曉星)'가 되었다.

이벌판의 중심지가 마제이(마장,청천)이 였다.

원적산 공원에 이르면 산곡동이다.

산곡동은 부평도호부 마장면 산곡리 지역으로 산이 곶으로 되어 '뫼꼬지' '뫼꽃말' '산화촌' '산곡'이라 하였으며 조선조때 말을 먹이던 곳으로

마장 ,백마장,이라 하였는데 일제 강점기 장끝말을 병합하여 부천군 부내면이 되었다가 일본식 이름인 하구바쬬(백마정,白馬町)가 되었다.

한때 백마장이 왜색이라 배척하기도 했는데 엄연히 백마장이라는 우리 지명이 있었고 부평이 고려 조선에 이르면선 말을 키우던 곳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있었으니 꼭 배척할 말은 아닌듯 싶다.

 

부평이 우리 역사에 나타난 것은 고구려때로 주부토군이 였다.

그 뜻은 황무지에 둑을 쌓아 농경지로 만들었는데 그 둑이 연이어 터져 '줄보둑','주부토'라 부르는데서 비롯된것으로 처음에 우리 땅이름이 우리 말이

였는데 중국에서 한자가 들어 오면서 한자로 표기를 하면서 그 뜻이 달라져 한자 해석식 지명 풀이는 의미가 없다.

신라때 명칭인 장제군(長堤:긴보둑)을 고려초에는 수주(樹州)로 바뀌었는데  그 당시 읍 소재지가 나무서리 마을인 묵상(木霜洞)이 였는데

호족인 이희목이 살았기 때문에 부여된 이름 이였다.

고려 충렬왕때 길주목(吉州牧)으로 승격 되었는데 이곳에 매사육장을 두고 즐겼다 하여 길주(吉州)라 했다.

이렇게 충렬왕 이전엔 왕실의 매사육장으로 황무지로 보존 했던 곳으로 보인다.

려 의종 4년(1150)때 안남(安南)도호부라 했고,읍소재지를 선곶(船串:배곶-배꽂-梨花)에 옮겼다가 의종19년(1165) 현재의 계산동 중구봉아래

온수골로 옮겼다.

고종2년(1215) 안남도호부를 계양도호부로 그리고 충렬왕때 계양도호부를 길주목으로 승격한 것이다.

고려 충선왕때 탄생한 부평부는 조선조 태종 13년(1413) 부평도호부로 승격되고 인주(仁州)는 인천군으로 되어 부평 도호부에 예속됐다.

이때까지 부평도호부는 현재의 인천 부천 구로구 일원이 부평 도호부에 예속돼 있었다.

원적산 공원을 지나 세일고등학교 뒷길을 통해 생태 통로 앞에서 둘레길 3코스를 마감하니 놀며 쉬며 3시간이다.

 

1. 탐방코스

   원적산생태통로-마가의다락방-경인여상-석남약수터-팔각정-장수산-원적산공원-원적산터널(백련사)-원적산생태통로

   (9.8km,3시간)

 

@. 교통편

     도보이동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