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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2코스(천마산둘레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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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둘레길 2코스(천마산둘레길)

無碍人 2014. 12. 11. 14:48

2014년 12월11일 목요일 맑음 나홀로

 

인천둘레길 2코스는 징매이고개 생태통로로 부터 시작된다.

중구봉 천마산 둘레길로 징매이고개 도로구간을 지나면 도심속 호젓한 길이 묘미를 더한다.

둘레길 시작전에 영신군 이이묘와 부평향교,자오당터 초정지를 둘러보기 위해 작전역 7번출구로 나와 영신군 이이묘에 이른다.

영신군 이이는 조선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이자 의성군 채(采)의 여섯째 아들이다.

자는 화보(和甫)로 조선 단종 2년(1454)에 출생하여 정의대부(正義大夫) 영신군(永新君)에 봉해졌고 부평에 낙향하여

기거하다가 중종 21년(1526)에 사망하였다.
현재, 이 묘역에는 영신군 이이 부부의 묘를 비롯하여 그 자손 14명의 분묘가 모여 있다.

명당이라는게 바로 이런거다 하는게 눈에 보인다,

아침 했살에 양지바른 언덕의 무덤들은 마치 일광욕이라도 하듯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자세가 저승에서도 가족간의 화목이

바로 이런거다 하는것을 보여준다.

잘가꾸어진 묘역과 주변의 연륜을 느끼게 하는 노송들이 조선 왕실의 위엄을 잘 갖추고 있는 듯 하다.

그많은 왕손들이 다 사라졌어도 도심 한가운데 이렇게 자리하고 관리를 받을 수 있다는게 바로 명당터 아닌가 싶다.

영신군 묘역을 나와 인천교대 방향으로 골목을 돌아 오르면 중구봉 아래 부평 향교가 자리 하고 있다.

고려 인종 5년(1127)에 계양산 아래에 지은 안남향교를 병자호란(1636)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지은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18세기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의 수리가 있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동무 서무 내삼문 등이다.

교육공간인 명륜당을 앞에 두고, 제사공간인 대성전을 뒤에 둔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향교의 배치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으로, 다른 향교에 비해 간소한 구조를 하고 있다.

부평이 우리 역사에 등장한것은 고려 26대 충선왕2년 1310년이다.

본래 고구려의 주부토군()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때에 장제()로 고쳤고, 고려 초에는 수주()라 하였다.

995년(성종 14) 단련사(使)를 두었다가 뒤에 폐하였으며, 1150년(의종 4) 안남도호부()를 두었다가

1215년(고종 2) 계양도호부()로 바꾸었다.

1308년(충렬왕 34) 길주목()으로 승격시켰다가 1310년(충선왕 2)부평부()로 강등시켰으며, 1413년(태종 13)

부평도호부가 되었다.

원래 부평향교는 현 계양구 오류동에 수주향교로 출발하여 수주의 후칭인 안남도호부가 의종 19년(1165) 계산동(온수골)으로

이전됨에 따라 당시 안남향교도 안남산 남쪽(현위치)에 이전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향교를 나와 서해초등학교옆 북인천중학교 방향으로 중구봉을 향해 가면 계양구청 양궁 연습장이있다.

중구봉(288m)은 계양산과 천마산을 잇는 산줄기로 크고 직은 봉우리가 모두 아홉개이고 고려시대에 중구절(重九節)

치뤘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아래 이규보의 자오당터와 냉천(冷泉)이 있다고 부평읍지에 기록돼있다.

이 양궁연습장 안에 백운거사 이규보가 계양도호부 부사로 좌천돼 13개월간 머물때 자오당(自娛堂)이라는 당호를

붙였던 관사터가 있다.

이규보는 자오당기에서 "나는 대사간 지제고(大司諫 知制誥)로부터 계양부사로 귀양왔다.(고종6년,1219년)

고을 사람들이 깊은 산 옆 나무 덤불속에 쓰러질 듯 깨어진 달팽이집 같은 것을 태수의 처소라 한다.

들보와 기둥을 아무렇게나 얽어매어 억지로 집이라고 이름 한것으로 쳐다보면 머리를 들수가 없고,구부리면 무릅을

펼수도 없다.더위를 만나 그 속에 있으려면 깊은 시루속에 들어가 찝질을 당하는것 같다.

처자와 노비들이 모두 머리를 내두르며 거기에 거쳐 하지 않으려 하나, 나는 홀로 기뻐하여 깨끗이 닦고 쓸어

그집에 써 붙이기를 자오당(自娛堂)이라 하였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산기슭 배수지로 쓰는 정도니 그때야 오죽 했으랴...

이곳으로 부터 가마를 타거나 말을 타고 관아가 있는 현 부평 초등학교로 출퇴근을 했을 이규보가 보인다.

자오당터 아래 지금은 신도브레뉴 아파트 뒤 빌라촌 어디쯤 이규보가 중건해 여름철 더위를 피하는 곳으로 이용했던

초정(草亭) 터가 있다.
"뒤에 오는 자에게 가볍게 하는 일이 없기를 부탁하고, 또 이 태수(이규보)를 위하여 불후(不朽)의 자취를 보존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규보가 개경으로 임지를 옮기기 직전인 1220년 음력 7월에 '계양초정기(草亭記)'를 일부러 남기며 후임에게 간곡한

부탁을 했을터 인데 지금은 흔적도 없고 있었다는 표지석하나 없다.

백운거사 이규보는 계양부사로 재임한 13개월 동안'조강부' '계양망해기' '초정기' '자오당기' '명월사시'와 가는 곳마다

즉흥시를 남겼다.

특히 조강나루(租江津)를 건너며 지은 조강부(租江賦)와 자오당기는 그의 심화를 달랬을 것으로 추측이된다.

이규보는 시,술, 거문고를 즐겨 삼혹호(三酷好) 선생이란 별호로 불렸고,유시로부터 작문에 능해 경사,백가,불교등 모든

문헌을 섭렵하여 한번 읽고 기억하는 재주가 능하고 기개와 성격이 강직해 조정에서는 인중룡(人中龍)이란 평을 받았다.

신라에 최치원,조선에 송강 정철이 있다면 고려에는 이규보가 있다 할 정도로 그는 우리나라 3대 문장가 이기도 하다.

 

본격적으로 둘레길 2코스는 징매이고개 생태 통로로부터 시작된다.

칼바람이 몰아치는 고갯마루 생태통로를 지나 둘레길 시그널에 인증샷하고 맛바람을 헤치고 공촌정수장 직전에 좌틀한다.

징매이고개는 백제때부터 공촌동 일대의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여 신정동에 있는 소금창고로 나르던 물류 이동 고개였다.

고려시대는 계양도호부에서 개성을 향해가는 통행로로 도적이 많아 천명이 모여야 고개를 넘을 수 있다는 '천명고개"라

불리울 정도로 도적이 많았다.

조선의 의적 임꺽정도 이고개 인근에서 군사를 훈련 시키기도 했다 한다.

공촌 정수장을 지나면 구릉지 안부가 나타나는데 딱 군사를 집결 시켜  훈련 하고 은둔 시키기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임꺽정이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바람끝은 매섭지만 지난밤에 내린 비가 새벽에 얼어 얼음을 깨며 지나는 재미와 서릿발을 밟고 지나는 소리가 서걱서걱

운율을타며 재미있다.

서곳 근린공원 까지는 한적하고 호젓한 산길에 지나는 사람 없으니 상염에 잠기며 나만의 상상의 나래를 펴기에

너무 좋다. 홀산하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방공사 전시장 같은 사방공사 구간에선 '기슭막이''누구막이''바닥막이' 같은 사방공사 공법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실제 시공된 모습을 확인 할수 있어 관계당국의 친절이 이 정도구나 싶어 흐믓하다.

서구청 관계자들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모든일을 이렇게만 한다면 존경받는 공무원이 될텐데.....

천마산(天馬山.227m) 계양구와 서구의 경계지점에 있는 산이다.

철마산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조선지지'에 천마산(天馬山)으로 표기 돼있다.

천마산에는 아기 장수 전설이 있다.

천마산 아래 서구 가정동에 합천이씨와 백천조씨가 많이 살았는데 합천이씨 집안에 아기장사가 태어났다.

장사가 나면 역성 혁명이 일어날까 두려워한 조정에선 아기장사를 없애 버리려 했다.

이 아기 장사의 부모들도 벌벌 떨며 다른 사람이 알기 전에 아기장사를 다듬이 돌로 눌려 죽이려 했다.

이때 천마산에서 천마가 나타나 큰 소리로 울며 아기장사의 집을 빙빙 돌다가 아기장사의 목숨이 끊기니 천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발자국이 바위에 흩어져 새겨져 있다고....
이씨 문중에는 이전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그런 후에는 큰 인물도 나지 않았다고 하며,그래서 이산을 신성시 하고

 天馬山, 馬蹄峯 이라 부르고 있다.

봉수 치안센타 뒤 절개지 사면 아래 마제석( 馬蹄石)이 흩어져 있다 하여 30여분 찾아 보았는데 신통치 않다

루윈시티 고압선 지중화 공사로 사면 일부는 이미 공사장이 됐고 곧 이 흔적들도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루윈시티 공사 현장을 지나 경인고속도로 서인천 나들목이 지나는 도로가 안하지고개다.

서구 가정동에서 계양구 효성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아나지고개'로 불리기도 한다.

징매이고개(경명현)와 함께 과거 해안 지역으로부터 부평으로 넘어가던 주요 고개의 하나로서 조선 시대 삼남지방의

대동미를 한양으로 운반하던 통로이기도 했다.

당시 창고가 설치되어 있던 서구 원창동으로부터 부평을 경유하여 한양으로 대동미를 옮기기 위한 고개였다고 전한다.

또한, 운하 굴착을 시도했던 고개로도 알려져 있다.

조선 시대 조운선이 자주 난파되었던 강화도 손돌목을  피하기 위해 인천 앞바다에서 부평을 넘어가는 운하를 굴착하게 되었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대동미를 원창동에 모아 난파위험이 있는 손돌목을 피해 굴포천을 통해 한강으로 가려는 시도였다.

그 첫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원통이고개(간석동에서 부평으로 넘어오는 고개, 현 부평삼거리역)이다.

두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무너미고개(장수동에서 구산동으로 넘어오는고개), 그리고 세 번째 시도가 이루어졌던 곳이

안하지고개 였다.

안하지고개에서 운하를 굴착하려 여런번 시도 했으나 암반이 계속나와 그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운하를 굴착 할 수 없어

포기 하게되었다. 

안하지란 '더 이상 굴착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부여된 지명이라고도 전한다.

둘레길은 경인 고속도로를 넘어 청천동 나비공원 앞에서 인천둘레길 3코스(원적산 둘레길)로 이어진다.

 

1. 탐방경로

   영신군이이묘-부평향교-자오당터-징매이고개-공촌정수장-서곳근린공원-인재개발원-동우약수터

   봉수치안센타-안하지고개-나비공원(4시간,12km)

 

@. 교통편

    인천지하철 1호선 작전역 7,8번출구

    551번 마을버스,14-1번버스(부평역행,부평여고하차)

 

 

 

 

 

 

 

 

 

영신군 이이묘

 

 

 

부평향교

 

 

 

 

 

 

 

 

 

 

 

 

 

 

 

 

이규보의 자오당터

 

 

 

 

징매이고개

 

 

공촌정수장옆길

 

 

 

 

 

 

 

 

 

 

 

 

 

사방공사 전시장

 

 

 

 

 

 

 

 

 

 

 

 

 

서곳근린공원

은혜병원

심곡초등학교

 

 

인재개발원 정문옆으로 돌아가면...

 

 

 

 

동우 한성 아파트 사잇길

봉수치안센타

 

 

 

 

 

 

마제석?

 

루윈시티공사현장

 

 

안하지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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