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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남한산성

無碍人 2014. 12. 22. 13:18

2014년 12월20일 일요일 맑 47아그들이랑

 

정축년 1월1일(1637년)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에서 스러져가는 명의 하늘을 향해 춤을 추고 있었다.

성밖 망월봉에선 적국의 군왕이 포탄을 조준하고 그 의식을 지켜 보고 있었다.

신년 하례라기 보다는 진혼식이라고 해야할까?

왜? 명을 섬기느냐,청을 섬기느냐하는 명분이 뭐가 그리 중요 하기에 도성을 버리고 백성을 적국에 넘겨주고 독안에 든쥐 신세를

자청해서....척화와 화의를 주장하는 군신들 틈에서 인조는 오락가락 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서울의 봄을 무참히 짓밟은 전두환일당은 광주에서 피맛을보 고 남한산성 아래 마천동 그부대에서 유사시 적후방을

교란하는 임무를 띈 특수부대를 사병화 하기 위해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난 공수훈련을 받기위해 피교육생 신분으로 마천동에서 처음 남한산성을 만났다.

거기에서 난 일주일동안 대기병 신분으로 교련복에 청바지를입은 저들 말에 의하면 광주 폭도 였다.

그들이 퍼붓는 최루탄과 몽둥이 세례를 수도없이 받으며 그들의 최루탄 받이였다.

 

병자년(1636년) 12월4일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을 쓰다가 청의 용골대 부대가 들어오자 백성과 도성을 버리고 준비도

없이 남한산성으로 피한다. 이 성에서 47일동안 척화냐,화의냐를 놓고 끊임업이 갈팡질팔 하다 삼전도의 치욕을 자초한다.

불과 수년전에 있었던 정묘호란의 교훈을 잊고 백성들을  진흙밭에 엎드려 울게 한것이다.

이른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세번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자초 했으니 우리 역사에서 이런 치욕은 ???

 

최루탄과 몽둥이 세례를 받아도 국방부 시계는 잘도간다.

3주간의 공수 지상 훈련은 지옥 훈련이다.

눈 뜨면 달리고 구르고 넘어지고 뛰어내리고 ....PT체조로 시작하여 PT로 끊나는 일과다.

상체가 약한 나는 하네스 끌기라는 훈련에서 고문관 직전까지 갔고, 11m 막타워 타기에서는 남들이 5~6번에

합격 하는것을 10여번 넘게 뛰고 양목덜미가 터지길 수차례(물론 70여번만에 합격한 동기도 있지만)...

그 마지막 지상훈련이 끊나는 그주 일요일, 낙하 훈련전에 주어지는 면회일에 난 언덕위의 하얀집(면회실)에서 기름에 빠진 닭 한마리놓고

그녀로부터 안녕을 통보받았다.

이게 두번째 남한산성과의 만남이다.

 

화의를 주장한 최명길은 "왕조가 쓰러지고 무너져도 삶은 영원하고 삶의 영원성만이 치욕을 덮어 위로할수 있습니다"인조에게 고했다.

척화를 주장하던 군신들은 최명길을 처단하라고 일제히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척화를 주장하며 싸우자고 준열한 언동을 하는자들도 내심 최명길 대감을 믿고, 충렬의 반열에 앉아서 역적이 성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게 아니겠소"라고 수어장 이시백이 일갈했던 것처럼 준비없는 척화가 얼마나 무기력 한가를 보여주고 있였다.

결국, 인조는 서문을 걸어나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니 5000년 역사에 이런 치욕은 없었다.

그리고 청의 요구로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우는데 그 비문을 누가 쓰느냐 하는 일로.....

칭병하는자..스스로 목숨을 끊은자...일부러 채택 안돼게 글을쓴자...이 모두 자기 가문과 자신의 체면만을....

결국은  부제학 이경석이 비문을 쓰고 평생을 글 배운것을 후회하며 살았다니...그래도 그의 용기는 기억해야 할진데..

 

낙하 훈련은 재미있었다.

생전 처음 타본 비행기 그게 군용기지만...

처음 성남 비행장을 이룩하던 순간 생생하다. 들판에는 가을이 무르익어 황금 들판이고 활주로를 이룩하는 순간까지도 내릴 수 있다는 가냘픈

희망을 가져보지만 이내 체념하고 조교의 "애인 있습니까?" 물음에 당당히 "없습니다"

아 ~나도 막타워 훈련시 까지만해도 "있습니다" 였는데 "애인 이름 세번??"조교의 말은 없었다.난 그저 "어머니~~"를 외치고 창공을 박차고 올랐다.

낙하산이 펴지고 가을 하늘이 연두색으로 밝아오며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어슴푸레 남한산성 그림자가 한강에 비추고 ...이게 세번째 남한산성과의 만남이다.

 

수어장 이시백은 "수어장은 척화요?화의요?"하는 최명길의 물음에

"난 수문을 지키는 초병일 뿐이요.내가 할일은 저수문을 지키는것 뿐이요"라고 했다.

햇볕정책이니 대북 강경책이니 하는것은 위정자들의 정책이다.

어느것을 택하든 5년동안 정권을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정부가 선택해야 할일 이지만 오늘날 우리 군은 과연 이시백같은 군인이 있는가

항복하는 순간까지 (항복도 위정자의 선택) 그는 난세에도 자기 임무에 충실했다.

햇볕이든 강경이든 군인은 군인 일뿐, 자기 자리에서 자기 임무에 충실하면 되는데 우리는 천암함에서,연평도에서 실망스런 군인만 보고있다.

준비없는 대북강경이 ..계산안된 맹목적인 친미가... 우리 민족을  어디로 몰고 가고 있는지 47일간의 남한산성 치욕의 역사에서 배워야한다.

 

낙하훈련이 끊나고 후반기 교육은 본격적인 적 침투훈련이다.

적진 깊숙히 침투하여 주요시설을 폭파하고 요인을 납치 암살하는 기술... 훈련은 남한산성이 본 무대다.

자기 전공별 훈련을 마치고, 종합훈련에 들어가면 낮에는 남한산에서 숙영하고 밤에는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위해 인근 용인, 하남,광주등을

야간에 이동하며 하는 훈련,이게 본격적으로 나와 남한산성과 만남인 네번째 만남이다.

 

그래도 인조에게는 척화를 주장하면서 목숨을 내놓은 충신이 있었다.

김상헌이 그였고 윤집,오달제,홍익한이 있었다.

김상헌은 대표적인 척화론자로 청에 볼모로 잡혀가 조선 선비의 기개를 지켰고, 윤집,오달제는 스스로 척화론자라 하여 자진 볼모가돼 심양

서문밖에서 처형됐으며,홍익한 역시 청에 잡혀가 처형됐다.

이시백은 문신으로써 남한산성 수어장이되어 인조곁에 있었다.

화의를 주장했지만 최명길은 자신이 역적으로 몰릴지 언정 민족과 백성의 안위를 진심으로 걱정한 충신이다.

이정부에 과연 이들같은 참모와 군인이 있는지....

혹 중국작가 뤼순의 책 아Q정전에 나오는 아Q만 있는것 아닌지...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빰을 때리고 때린것은 자기고 맞은것은 자기가 아니라고....' 우기는

 

나와 남한산성의  다섯번째 만남은 영등포 대방동인지 신길동인지 기억은 없지만 개구리복을 입고 어느 세탹소 앞에서 문전 박대를 당한후

수년이 지나서 였다

내내 이해가 안됐던 그녀의 '안녕' 통보를 궁금해 하던 그때, 그도시 어딘가에 살고있던 그녀산성의 어느 음식점에서 비빔밥 한그릇 씩

마주하고 "왜? "라고 묻지도 못하고 그렀게 이해 하는 것처럼.....

그랬다 그녀도 나처럼 평범했고 제법 아줌마 티가 나는....

그랬구나 행복해 보이는 그녀가 차라리 안심이 였다.자신이 선택한 삶이 아니던가...그리고 또 세월이 흘러 오늘 여섯번째 그 산성을 만났다.

오늘 친구들과 그 산성에 왔다. 내 옆에는 세상에 다시 없을것 같은 예쁜 천사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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