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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계양산 중구봉 천마산능선

無碍人 2011. 1. 7. 09:07

2011년 1월 4일 화요일 날씨 흐리고춥다(영하10도) 홀로

 

누군가 내게 이런말을 한적이있다.

지금까지 살아온날에서 오늘 나는 가장 나이많은 늙은때라고....

그러나 앞으로 살아갈 날중에는 오늘이 가장 젊은나이라고....

12월31일과 1월1일은 그저 보통날의 하루 바꿈인데 사람들은 그의미를 부여하고 나이를 더하고 법석을떤다.

나도 범부인지라 그 어수선함을 즐기며 송년회다 신년회다 하면서 줄창마시고 떠드는 한무리였으랴...

오늘 밀린 은행업무를 처리하고 근질근질한 몸을 추스려야한다는 의무감에 늦은산행에 나섰다.

인천에 터를잡고 아이를낳고 기르고 한지 벌써 삽십수년...

내정서의 90%를 만들어준게 고향장수번암이라면, 삶의 경제적바탕을 이룬곳은 여기 인천인데 아직난 여기가 고향냄새가 안난다.

그런데도 날낳아준 번암은 점점 타향스러워지고  발 부치고 사는 인천은 고향스럽지않으니....

고향만 점점 잃어가고 있는게 아닌지 불안스럽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내게 번암같지는 않지만 인천에는 오를만한 산이 있다는거다.

백두대간과 호남정맥의 깊은맛 나는 고향산은 아니지만 바다가있고 거기 산이있어 잊혀져가는 고향냄새를 기억케하는...

그 인천의 산중에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산줄기가 계양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가는 중구봉과 천마산능선이다.(한남정맥)

이곳에서면 인천 전체를 조망할수있다.

옛도읍지가 되려다만 부평과부천의99봉 능선아래 끝모르게 솟아오르는 빌딩숲과, 인천앞바다의 거대한 신도시 청라 송도가조망되고..

아직도 검은연기 품어내는 인천항과 북항주변의 공장들...영종도로연결되는 영종대교,인천대교...

팔미도와 작약도앞에 떠있는 유람선과 유람선을 따르는 갈매기까지 보이는듯 그그림이 아름답다.

내가 인천이 고향스럽지않다고 여기는것은 인천에대해서 너무 모른다는거다.

내가사는 이곳이 어떤역사를 가졌고 여기 이동네는 왜 그런 이름이 지어졌는지 관심도,애정도없이 돈벌이만 급급했으니...

이제 인천을 고향 만들며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이 미치니....내 삶중에 가장 젊은날 오늘 당장...인천을찾아야겠다.

인천이라는 지명은 그지명에 한이있다.

미추홀(백제) - 매소홀(고구려) - 소성현(신라) - 인주(고려) - 경원군(고려) - 인천(조선) - 부천군(일제)

- 인천직할시-인천광역시

인천의 지명에서보듯 인천이 역사기록에 나타나기 시작한것은 미추홀이라는 비류백제의 도읍지로부터다.

미추홀-매소홀 등으로 순우리말로 이어지던 지명은 신라 경덕왕때 중국관제를 받아들이면서 한자표기로 바뀌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인천은 최고의 전성기를 맡는다.고려가 어떤 나라인가?

고려는 왕건을 중심으로한 개경 해양상권을 쥐고 있던세력이니...자연히 영종,강화 인천의 해양세력이 그 중심이되면서 이자겸으로 대변되는

인천이씨가 주측이되어 일곱명의 왕비를 배출한 인천은 '칠대어향'으로 불리우며 경사스러운 땅이라는 뜻의 경원군이라는 지명을 얻게 된다

어진이의 고향, 혹은 경사스러운 곳이라는 뜻을 지닌 인주, 또는 경원군이 된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면서 인천은 고려를 이끈 토착 세력의 근거지 중에 하나로 간주되어 군으로 강등되고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그러다가 세종의 비 소헌 왕후의 외가 고향이라 하여 한때 도호부로 승격되기도 한다.
1883년 마침내 인천항이 열리니, 조선말 인천의 변두리였던 조용한 포구 제물포가 점차 일본인들의 거주지로 급변한다.

한일합방 후 일제에 의해 1914년 인천은 사라지고, 부평의 '부'와 인천의 '천'자를 딴 부천군이 생겨난다.

그리고 그들의 근거지였던 동인천 일대만을 따로 떼어 '인천부'로 개편한다. 이 때부터 인천의 수난은 계속된다.

인천 고유의 토착 세력을 몰락시키려는 일본에 의해 인천은 기형적인 모습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지금 인천의 행정구역이 그를 대변한다.도대체 동서남북구분이 안되는도시가 되고 말았다.

서쪽에 동구,동쪽엔 남동구, 남구는 남쪽이아니고 남쪽엔 연수구,북쪽엔서구....동인천은 여기가 동쪽인가?

이모두가 일제의 농간으로 원래 부평의 중심과 인천의 중심을 외면하고 저들 침략기지로 만들면서 생긴일이다.

인천의 중심지인 문학과, 부평의 중심지인 계산동을 빗겨, 철도와 도로를 개설한 것이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니 인천은 슬픈도시다.

이런 인천에 딱 맞는 소설이있다.물론 그배경이 인천이다.

최인훈의소설 [광장] 한토막을 들여다보자.

 

윤애한테 말하지도 않고, 혼자서 곧잘 거리를 걸어 본다. 부두를 낀 거리를, 맥고모자를 눌러쓰고 기웃거리는 시간에, 그는 즐겁다.

윤애도 없고, 때리던 형사도 없고, 아버지도 없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서, 얼음에 잠긴 물고기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 그저 때를 보내는 게 좋다.

얼음에 차갑게 잠겨서, 눈을 번히 뜬 채, 지붕에 박힌 빛받이 창문으로 내리비치는 햇살 아래, 은색 비늘의 깨끗한 조기를 보고 있으면, 미술이라는 일이 짜장

가난하게만 느껴지는 사무치는 울림이 있었다. 물건 살 사람 같지는 않은지, 모른 체해 주는 그곳 사람들이 좋다. 너무 남한테 마음을 쓰면서 살아왔어.

모든 사람에게 이쁘게 보이려구. 흔히들 여자란, 남편이나 애인이 아닌 남자 한테도 꼬리를 치는, 타고난 갈보라지만, 시시한 소리다. 여자보다 더 쩨쩨한

남자도 얼마든지 있다. 나 같은 놈이 바로 그렇다. 남자는 씩씩해야 된다? 여자는 상냥스러워야 한다? 시시한 소리다. 아득한 옛날 수풀에서, 돌도끼로 짐승의

이마빡을 치던 때 얘기다. 씩씩하려야 씩씩할 거리가 없다. 어찌 보면 문화란 말은 턱없는 믿음의 범벅이다. 남자는 씩씩하다고들 한다. 이미 씩씩하다는 이야기는,

스포츠에서나 보이는 몸놀림의 깨끗함이라는 값밖에는 매길 수 없는 시대에, 아직도 이런 믿음이 남아 있다. 남자들은 씩씩한 체하려고들 한다. 애인들 앞에서,

굳센 수컷의 맛을 보여 주려고 애쓴다. 왜냐하면 그녀들이 바라기 때문이다. 그런 바람이 얼마나 모진 일인지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소뿔

끝에서 피를 뿌리는 스페인 사람들이 한다는 그 백정놀이에서처럼, 그들은 쓰러진다. 오늘날 세상처럼 사람이 '영웅의 삶'을 살 수 없는 때도 없다.

사람이 달라진 게 아니고, 조건이 달라진 것이다. 조건을 쑥 뽑은 다음에 그 어떤 알맹이가 남는다는 건, 곧 아름다운 미신이다. 나한테도 영웅의 삶을 살고,

영웅의 죽음을 죽을 수 있는 씨앗이 파묻혀 있을까. 그건 알 수 없다. 다만, 이 검은 해가 비치는 어두운 광장에서는 피어날 수 없는 씨앗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그런 광장으로 시민들을 불러 내는 나팔수가 바로…… 비린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목쉰 소리로 셈을 외친다.

한나이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가락을 붙인 셈 소리는 성의 구별을 잊게 한다. 저 여자들도 삶의 뜻을 가끔 생각할까? 아마 결코 않는다. 철학은 한가에서 온다고,

무엇에서 비롯했건 교육받은 숱한 사람들에게, 생각한다는 버릇이 붙어버렸다는 일은 물리지 못한다. 아가미처럼 이루어진, 이 '생각'이라는 가닥을 떼어 버리면,

그들은 죽는다. 아가미를 떼지 않고 매듭을 푸는 길만이, 사실에 맞는 처방이다.

 

 전쟁뒤 주인공 명준은 남도 북도 아닌 중립국을 택하여 인도로가는 배안에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소설에는 서울도 북도 나오지만 그배경은 인천이다

이데올리기와 사랑에 고뇌했던 반세기전 한 젊은이가 북으로가는 밀수선을 탄곳도 인천이고 명준이 말했던 '사랑'하기좋은곳이라는 곳도 인천이다

'비린 내 나는 살갗 검은 여자들이 꼬챙이로 고기를 꿰어 광주리에 옮기면서, 한나히요, 두흘이요, 서어히요 하고 목쉰 소리로 셈을 외치는 어시장'

을 천천히 거닐고 '기름이 떠돌고, 나뭇조각이며 빈 병이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선창'을 걸어보며 사랑과 이데올리기에 고민하던 젊음...

인천은 진한 슬픔이 있는도시다. 그래서 인천은 누구나 포용할수있는...상처받은 이들이 몸을부대끼며 살아가는....희망도 있다.

 

1. 산행코스

   아나지고개-천마산-군초소-중구봉-장명이고개-군초소-천마산-아나지고개(왕복 4시간소요)

 

2. 산행개념도

 

 원적산(한남정맥능선)

 장수산 그아래 나비공원

 천마바위

계양산의 한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높이 뭉친 산을 철마산(鐵馬山) 이라 부르고 있으나
원래의 이름은 천마산(天馬山)이다.
이 산의 유래는 암석에 말발굽(馬蹄) 이 많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산 계곡을 용마가 나타난 곳이라 부르는데
이 산에서 천마가 나왔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 산 기슭에는 고려 때부터 살아 왔다는 합천 이씨와 백천 조씨가 많이 산다.
조선조 중기 이 이씨 문중에는 한 장사가 태어났는데 그 아기는 태어난 지 일주일만에
걸음을 걸었다 하며 아기의 양어깨에 날개가 달려 하늘을 오르내렸다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가 나면 나라님께 반역할까 두려워하여
장사를 없애버리는 관습이 있었는데 이 장사의 부모들도 벌벌 떨며 외인이 알기 전에
이 아기장사를 죽이고자 다듬이 돌로 눌려 죽이려 할 때
천마산에서 천마가 나타나 큰 소리를 내어 울며 아기장사의 집을 빙빙 돌다가
아기장사의 목숨이 끊기니 천마도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씨 문중에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으나, 그런 후에는 큰 인물도 나지 않았다고 하며,
그래서 이산을 神聖視 하고 天馬山, 馬蹄峯 이라 부르고 있다.

 천마산

 청라지구

 

 

 

 

  징메이고개(장명이고개)

 계양산(394m)

 

 

 중구봉(275m)

 

 

 

 

 

 일몰직전의 서해바다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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