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검단지맥 2구간종주(은고개-벌봉-봉암성-북문-서문-수어장대-남문-검단산-왕기봉-이배재고개)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한남정맥의 지맥

검단지맥 2구간종주(은고개-벌봉-봉암성-북문-서문-수어장대-남문-검단산-왕기봉-이배재고개)

無碍人 2011. 6. 24. 07:28

2011년 6월12일 일요일 맑음 천사랑

 

오늘 종주코스인 은고개에서 이배재구간은 전코스가 남한산성구간이다.

남한산성은 치욕의 역사현장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항전의 현장이기도하다.

이곳의 감회는 지난해 겨울 남한산성 등산시 기록되었으니 더 부연하고 싶지않다.

다만 천사와 동행하면서 내인생의 전반전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였다.

다소 덮기는 했지만 오롯한 오솔길을 걸으며 담담히  우리 인생의 전반전을 돌아보았다.

내 인생을 50분 축구경기 전후반으로 나눈다면...

나는 지금 후반전 4분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나는 체력안배중이다.

언제 내 감독이 부실체력을 이유로 교체를 명할지 모르는 절대절명의 위기에 오로지 체력하나로 버티고있다.

나는 전반전에 스트라이커로서 득점하지못했다

그토록 부모형제가 원하는 입신출세가 득점이라면 나는 그득점을 못한거다.

그냥 평범하게 그라운드를 누볐을뿐...한번의 실점위기를 간신히 면한게 공이라면 공일정도로...

또한번의 득점기회도 난 아직 득점하지 못했다.

자녀들의 입신이 그기회라면,난 겨우 어시스트 하나 올렸을뿐 그게 아직은...

그러나 지금 경기는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겨우 후반4분

지금은 후반전 20분까지는 철저하게 체력관리를 해야한다.

섣불리 득점하려고 서둘렀다가는 언제 실점할지도 모른다.

내 감독은  인정사정 볼줄모른다.

언제 부실체력을 이유로 그라운드에서 날 아웃시킬지...

욕심을 버려야한다.

한번에 역전시키려는 과도한 물욕,승부욕,명예욕,모두 내려놓자.

스트라이커로서 꼭 화려한 득점을올리고 두팔을 벌려 그라운드를환호하는 영광은 내게 없을수있다.

그러나 천천히 체력을 안배하고 부지런히 달리다보면 내게 소박한 어시스트하나 올릴수있는 기회는 아직 남아있다.

후반 20분까지 부지런히 뛰자 그리고 기다리자.

내 감독이 날 그라운드에서 불러낼때 난 당당히 내발로 걸어나가야한다.

열렬하진 않지만 그래도 소박한 박수라도 받으며...

들것에 들려 나가는 뒷방노인은 .... 심판에게 퇴장명령을 받고 불명예로 그라운드를 떠나는 선수는 되지말자.

이제 승부를 뒤집는 화려한 역전보다는 실점하지말고 깨끗하고 매너있는 마무리로 그라운드를 떠날준비를하자.

그게 승리가 아닌 비기는 경기일지라도  비기기만해도 ......나는 승자가 될수 있다.

 

1. 산행코스

   은고개-벌봉-봉암문-북문-서문-수어장대-남문-검단산-왕기봉-이배재고개(7시간,약12km)

 

2. 산행경로

   05:04분 - 부개역출발

   06:30분 - 강변역 환승센타 경기광주행 13번버스 환승

                 강변역 1번출구로나가 횡단보도건너 환승센터정류장

                 환승센터 포장마차는 김밥이없어 터미널쪽에가서(2번출구) 김밥으로 아침요기하고 점심용 김밥준비

   08:20분 - 은고개도착

                 건너편 교차로신문사 옆 대리석 계단으로 진입하면 호젓한 마루금이 시작되고 벌봉까지 호젓한 산행가능

                 주말인데도 산꾼이 거의 없어 천사랑 오붓하게 담소를 즐길수있는 코스다.

   10:20분 - 벌봉(남한산 521m)

                 벌봉은 그 고스락의 바위가 벌처럼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벌바위봉이라고도 부른다.
                 여기까지 성(봉암성)이 둘러쳐져 있지만 여기의 석성은 병자호란 때는 없었다. 뒤에(조선 숙종조) 광주유수 윤지선의 주장으로 축조된 것이다.
                 벌봉은 한쪽에서 보면 크나큰 두 쪽의 바위로 보이는 우뚝 솟은 암봉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병자호란 때 청나라 태종과 그 군사들이

                 이 벌봉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는 우리편 군사들의 상황을 살폈다 한다.
                 벌봉이 당시의 산성에서 가장 높은 수어장대보다 높기 때문에 산성 안을 넘겨다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청 태종은 이 벌봉의 정기를 깨트리기 위해서 폭파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청군들이 이 벌봉에 머무를 때 새처럼 큰 벌들이 청군들을

                괴롭혔다는 이야기도 있다. 벌봉은 남한산성에서 흔하지 않은 암봉으로, 바위틈에 굴도 있어서 기도터로도 이용되고 있다.

   10:40분 - 봉암성

                 병자호란때 벌봉을 청군에 뺏겨 곤란을 겪어 숙종때 다시쌓은 외성으로 신성,혹은 동성이라한다.

   11:00분 - 북문

                 봉암성에서 북문으로 오는길은 등산로가 다양하게 발달되어 있어 자칫하면 다른길로 빠져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일쑤다.

                 그러니 이정표가 잘돼있으니 유심히 살펴가면 이내 진행할수 있다.

   12:00분 - 치욕의 성문이다.

                인조가 이성문을 걸어나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치욕을 당했다.

                북문에서 서문 남문으로는 성벽옆 순환로를 이용한다.

   12:30분 - 청량산(수어장대 480m)

   13:00분 - 남문

                 남문에서 성남쪽으로 나오면 성남시계종주 표시가 있고  표시따라 성벽옆으로 지나가면 시멘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산불감시초소와

                 자동차에서 막걸리를 파는곳이나온다.

                 여기서 막걸리에 번데기 안주로 한사발 요기를하고 점심을 먹었다.

   14:20분 - 검단산(535m)

                 산불감시초소에서 도로따라 계속가면 검단산정상은 송신탑이있는곳인데 바로옆 헬기장이 있고 여기에 표지석이있다.

                 검단산 약수터를 지나 봉우리몇개를 오르락내리락하면 왕기봉에 이른다.

   14;40분 - 망덕산(왕기봉 500.3M)

                 왕기봉에는 표지석이있고 나무의자가 설치되어있다.

                 여기서 가파른길을 내려가면 이배재고개다.

   15:00분 - 이배재고개

                광주와 성남을 잇는고개로 정상에 버스정류장 표시는 없어도 광주 성남을 오가는 버스는 여기서 정차한다.

                모란으로 이동 모란에서 인천오는 버스 탑승

   16:00분 - 모란에서 태화버스탑승

   17:20분 - 인천집도착

 

@ 교통편

    1호선 2호선이용 강변도착

    강변에서 13번,13-2번 이용은고개

    이배재에서 3-3번 버스 모란이동

    모란-인천 태화고속버스이용 부평도착

 

3. 산행개념도

 

 은고개

 

 

 

 

 

 

벌봉(521m)

벌바위(峰岩)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산2-1, 남한산성 산줄기에 속한 봉우리의 하나로 외성의 하나인 봉암성(벌봉)이 축조되어 있다.

‘벌바위’는 이곳 산 봉우리에 높이 10m 정도의 벌어져 있고, 모양 또한 벌처럼 생겨서 부르는 이름이다.
벌봉을 둘러싸고 있는 봉암성은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들이 벌봉에서 성내부의 동태를 살펴 우리 군사들을 공격하자 1686년(숙종 12)에 부윤 윤지선(府尹 尹趾善)이

본성의 보강차원에서 처음으로 축조한 것이라고 한다.

이 봉암성이 본성과 마주치는 곳에 암문이 만들어져 있으며 또한 벌바위의 아랫쪽에는 봉암으로 통하는 암문이 있다.
이 바위에는 여러 전설이 전해지는데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이 바위에 정기가 서려 있으므로 화약으로 바위를 깨트렸다고 하며, 그로 인하여 산성에 있던 인조가

마침내 청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청나라 군사가 산성을 공격하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벌이 날아와 쏘아대어 청군이 물러갔는데 그 벌들이 참새만큼 큰 벌들이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남한산성(청량산)에서 검단산으로이어지는...

 검단산

청태종 군사가 저런모습으로 청량산을 내려다 보았을까???

 동장대 암문

 봉암성

 

 

 

 

 

 

 하남시

남한산성의 북쪽 춘궁동(하남시)이 백제를 건국할 때의 서울인 위례성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물론 춘궁동 일대가 옛 하남 위례성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가장 유력한 학설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일대 고골(하남시 사창동 항동 교산동 춘궁동 일대)의 동쪽 울타리가 되는 산줄기가 벌봉과 객산을 잇는 능선이다.
고골은 남한산성에서 북동쪽 객산으로 뻗은 산줄기와 남한산성에서 북쪽 금암산과 이성산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로 한강을 향하여 부채살처럼 퍼진 골짜끼다.
이 골짜기 끝의 하남시 춘궁동이 옛 위례성이라는 것이다.

한강을 향해 펼쳐져 있는 이 고골은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을 뒤로하고 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요즈음 이 지역에서 많은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한다.
이 골짜기를 서쪽으로 내려다보며 한강을 향해 동북쪽으로 뻗친 산줄기가 벌봉과 객산 줄기이며, 사실은 벌봉(512m) 이 남한산성의 최고봉으로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479.9m)보다 더 높다.

 북문

 청량산(수어장대 480m)

 

 

 

서문

 

수어장대

서장대는 남한산성의 대표적인 장대로 서쪽 주봉인 청량산 지상에 세워져 있는 이 건물은 지휘 및 관측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서 지어진 누각이다.

성내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게 지어진 누각과 건물의 왼쪽에 사당인 청량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어장대 뒤편에는 우물이 나란히 2개가 있어 장대에 근무하는 장졸에게 음료수를 공급하였다.

이 건물은 인조 2년(1624) 남한산성 축성 때 단층누각으로 지어 서장대라 불리던 것을 영조 27년(1751) 유수 이기진이 왕명으로 이층누각으로 증축하였다.
남한산성의 수어는 처음에 총융청이 맡았으나 성이 준공되자 수어청을 따로 열어 전담하게 하였다.

수어청에는 전/후/좌/우/중의 5영이 소속되는데 전영장은 남장대에 , 중영장은 북장대에, 후영장과 좌영장은 동장대에, 우영장은 서장대에 배치되어 소속된

군인을 지휘하였다.
인조 14년(1636) 1월 18일에는 산성에 들어온 인조가 성을 순찰하다가 서장대에 이르러 장사들을 격려하고 행궁으로 돌아 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南漢誌』에는 광주유수 이기진이 쓴 다음과 같은 「수어장대기문」이 기록되어 있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으로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웠던 곳이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당일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동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어 可汗이라고 이름한다.......

슬프다. 터와 묘가 슬픔을 일으키고 종묘가 공경을 일으킴은 천리의 양심이라 그 환경을 따라 말없이 느끼며 유연히 생기나니 진실로 그 서연(黎然)과 유연(油然)의

발단을 인하여 확대한다면 인과 예의 실을 못다 쓸 것이다.
이 대에 오르고도 그 감개하고 탄식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누구나 이것을 말미암아 더욱 충성의 의를 힘쓴다면 이 장대에서 웃는 것이 어찌 홀로 부하나 사열하고 형세나 찾고 말리오.만약에 혹시라도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는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 일 것이다. 후인에게 경계하며 또 고하노라.
수어장대는 하층 정면5칸, 측면3칸, 상층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양식 2층 누각이다 .

지붕은 상하층 모두 겹처마를 둘렀으며 사래 끝에는 토수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용두를 올렸으며 용마루에는 취두를 올렸다.

건물의 기둥은 높이 60cm의 팔각장주초석 위에 올려져있고, 포는 주심포 양식의 이출목익공식이다. 1층의 사방 1칸은 복도로 비워두고 정면3칸, 측면2칸만을

장마루를 깔고 사방에 높이 45cm의 난간을 둘렀다. 이층은 1층 우측 뒷켠에 있는 사다리를 통하여 올라갈 수 있도록 하였다.
2층은 무망루라 하는데 1836년 유수 박기룡이 증축한 것이다. 2층은 정면3칸, 측면2칸의 사방에 판문을 달았으며, 판문에는 태극무늬를 그렸다.

천정양식은 연등천정을 하였다.

 

 

 매바위

 

 

 

 검단산(535m)

남문

 

 

 

 

 

 

 검단산 정상

 

 

 검단산약수터

 왕기봉(망덕산 500.3m)

 

 이배재고개 

예전에는 목현동의 이배재 고개가 남한산성의 보장지(保障地)로서 군사적요충지였다.

병자호란 이후에 군사훈련을 할 때면, 이 고개가 척후지점(斥候地點)으로서, 또 최전방 진지로 삼아 조련(操鍊)하였다.

따라서 이배재 고개 밑의 마을인 목현동에는 주막이 있었으며, 조선조 말기까지 광주의 읍치가 남한산성에 있을 때에는, 목현리를 경유, 초현(草峴)을 넘어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이 대로여서 평소 인마(人馬)의 왕래가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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