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내 반골 정서의 반은 지리산이 만들었다.(성삼재-노고단-반야봉-삼도봉-뱀사골-반선) 본문
2020년 6월 5일 토요일 친구 환춘. 병선이랑
"그해 가을 빨치산한테 돌 석골로 잡혀간 니 백부가 보름 만에 뼈만 남아 돌아왔지?"
언제부턴지는 모르지만 아주 어린 유년부터 늘 들어오던 할머니 넋두리였다.
돌석 골? 짐작컨대 돌돌 골(뱀사골)을 그리 불렀다는 것을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야 알았다.
지재를 넘어 인월 읍내를 지나 30리만 가면 되는 곳
하루 반나절이면 다녀오는 곳을 보름 걸려 돌아온 큰아들이 다 죽을 모양을 하고 돌아왔다.
할머니는 그게 한이였고 그 아들을 온갖 정성을 다해 살려 놨다.
그랬더니 "부역" 했다는 죄명으로 두들겨 패고, 고문하고 잡아다 감옥에 처넣었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가 말하는 "인공 때"를 배웠다.
낮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밤만 되면 인공기가 휘날리는 대한민국과 인민공화국이 상존하던 세상,
그 세상에서 두 아들은 국군으로 한 아들은 부역자로 감옥에 갔다.
그 살아온 세월이 얼마나 한 스러우면 어린 손자 눕혀 놓고 살아온 세월을 반추하며 눈물을 삼키셨다.
그 할머니로부터 돌석 골, 반선, 피아골, 노고단을 배웠다.
동네 젊은 사람 반은 국군으로 반은 부역자로 그중에 몇몇의 먹물깨나 들었던 사람들은 빨치산으로...
낮이 오면 국군 가족이 완장을 차고 밤이 되면 빨치산 가족이 또 다른 완장을 차는 세상이었다.
그때 내 할머니는
"국군이 더 무서웠지 빨치산은 식량은 뺏어 갔어도 사람은 안 죽였지..."라고
첫째는 부역자지만, 둘째와 막내는 국군이었는데도 할머니는 대한민국 세상인 날이 새는 게 무서웠다.
철저하게 반공을 국시로 배웠던 내가 할머니 말씀을 이해하는데도 참 오랜 세월이 걸렸다.
동네마다 빨치산 가족이 몰살당했던 그 장소가... 어려서 피해 다니던 그런 곳이었다.
왜 그렇게 빨갱이를 처형한 장소가 많았던지...
난들... 범골... 다 우리 동네에 있던 지명이다.
그곳에서 처형된 사람이 '누구누구'...라고
"국군이 더 무서웠다. 빨치산은 사람은 안 죽였다"
국군은 외지인이었고 빨치산은 동네 사람 혹은 인근의 아는 사람
그랬다.
지리산에 빨치산이 은거하기 시작한 게 제주 4.3과 여. 순 사건 이후 산으로 간 공산주의자 들이다.
전쟁 전부터 마지막 빨치산 전순덕이 내원골에서 생포된 1963년 11월까지 지리산은 전쟁터였다.
그 빨치산들은 북으로부터 물자를 지원받은 게 아니라 자체 조달하는 거였으니 당연 인근 출신
빨치산들이 자기가 살던 곳에 식량을 구하러 나타나 얻어가기도 하고 뺏어가기도 했다.
부모요, 형제자매요, 친구며, 아는 형님, 동생, 삼촌, 아재였을 테니 총칼은 들었어도 차마...
그러나 국군은 달랐다.
낮이 되면 지난밤에 완장찬 사람 부역 다녀온 사람 골라내 공비로 몰았다.
그 책임자가 바로 요즘 죽음을 앞두고 국립묘지에 가고 싶다는 그 백선엽이다.
38선에서 인민군, 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던 이승만 정부는 후방의 안전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1951년 11월 남원에 백 야전사령부를 설치하였는데 그가 바로 백선엽이다.
백선엽의 야전 전투사령부는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탁월한 전투 역량을 발휘한다.
빨치산은 기본적으로 보급 투쟁으로 연명하는 데, 백선엽 토벌군은 이를 막기 위하여 산간 마을,
심지어 사찰까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백선엽 자신이 속했던 간도 특설대가 독립군을 토벌하던 그 방법 그대로 빨치산 소탕에 나섰다.
지리산 빨치산의 큰 세력은 잡았지만 그 사이 수많은 민간인 희상자를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빨치산들이 벌인 학살과 보급 투쟁은 산간 주민들의 삶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다.
그런데 대한민국 땅에서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 의해서도 양민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그들은 빨치산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빨치산으로 오인된 양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다.
거창군 양민 학살 사건으로 5개 마을의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한 순수 민간인 719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집단 학살당했다.
이 사건 바로 3일 전에는 산청군과 함양군 주민 500여 명이 학살당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
속칭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정확한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이게 바로 전쟁 영웅 백선엽의 전과인데 감히 국립묘지에 눕겠다고....
기록되지 않은 우리 동네, 그리고 옆동네, 또 그 옆동네 억울한 희생자는 기록된 것보다 더 많다.
그 내 할머니가 가슴에 담고 살았던 그 돌석 골(뱀사골)을 다녀왔다.
남원군 산내면 반선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
또 다른 내 할머니
외할머니 기억 속 빨치산
총소리가 문밖에서 나고 3명의 빨치산이 국군에 쫓겨 할머니 집으로 들이닥쳤다.
한 명은 피를 흘리고 있었고 뭐 묶을 것을 찾는데 할머니가 짜던 무명 베을 잽싸게
멍석말이 구명에 쑤셔 넣어 감췄다.
그걸 발견한 빨치산이 무명을 잘라 상처를 싸매고 무명 꾸러미를 집어 들고 사립문 밖으로 냅다 뛰었다.
할머니가 거기다 되고 악다구니를 썼단다.
"야 이놈들아! 그거 내가 겨울 내내 저거 시집보내려 짠 건데 두고가?"
저거는 그 당시 15살 엄마였다.
그랬더니 사립문으로 도망가던 빨치산이 휙 무명 꾸러미를 담 너머로 던지고 갔다고...
내게 지리산은 돌돌 골과 피아골, 노고단, 반선으로 기억되며 두 할머니와 엄니로부터 시작된다.
그 지리산은 내가 태어난 장수 번암과 더불어 내 반골 정서를 키워준 내 안의 배움터 였다.
언제 들어도 어머니 품 같은 곳
그래서 오늘도 나는 지리에 든다.
P.S
백선엽
만주봉천군관학교 졸업
간도 특설대 헌병 중위로 독립군 토벌부대 장교
(다른 나라 같으면 극형에 처할 조국을 배신한 죄)
해방 후
통위부 정보국장 겸 국방경비대 총사령부 정보처장
-만주군 간도 특설대(정보, 첩보, 비정규전 항일 토벌부대), 헌병(역시 비정규, 공작, 정보)
경력을 바탕으로 제주 4.3, 여. 순 사건 진압을 기획하는 위치에서 민간인 학살 책임
전쟁 중
5 사단장, 1 사단장으로 다부동 전투에서 공적이 있으나 공적이 부풀어짐(8개 사단 참석 1/8의 공적)
제1 군단장으로 휴전회담 대표
백 야전군 사령관
-만주군 간도 특설대, 헌병 경력을 바탕으로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 공이 있으나 민간인 학살
책임에 자유롭지 못함
다부동 전투의 공적이 그가 조국을 배신하고, 간도 특설대에서 독립군과 선량한 양민을 학살한
책임을 면 할 수 없는데 지리산 빨치산 토벌에서 다시금 같은 방법으로 양민 학살
안철수 원희룡 등 일부 야당 정치인이 그를 홍범도 이순신에 비교하는데 무식의 극치
1. 산행코스
성산재-노고단 고개-노고단-돼지령-임걸령-피아골 삼거리-날라리봉-노루목-반야봉 삼거리
반야봉-삼도봉-화개재-뱀사골-반선(19.9km, 8시간 30분)
@. 교통편
영등포-구례역
구례역-성삼재 03시 10분 구례 운수
반선-인월 택시(버스 시간별로)
인월-동서울 시외고속버스(백무 동발)
2. 산경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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