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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할망 부아났다(한라산/영실휴게소-노루샘-윗세오름-만세동산-어리목대피소-어승생악-어리목)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山·名山산행기

설문할망 부아났다(한라산/영실휴게소-노루샘-윗세오름-만세동산-어리목대피소-어승생악-어리목)

無碍人 2020. 8. 10. 23:06

2020년 8월 8일 토요일 친구(병선, 환춘, 복순) 비

 

한라산 번개팅

팬데믹으로 항공 산업이 최대위기다.

각국은 출입국 제한 등 여행 규제로 자국민 보호에 나섰다. 

여행 및 항공산업은 급격한 소비위축으로 유례없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다 보니 제주행 탑승권이 1만 원대까지 내려갔다.

우리 "곱게 미치자" 팀은 급 번개로 한라산 당일치기 등산에 나선다.

목요일 결정 토요일 결행

급하게 먹는 밥이 체하는 법

금요일 이후 한라산은 긴 장마로 전면 통제다.

며칠 괜찮다 싶었는데, 장마전선이 남쪽으로 내려 가면서부터다.

그러나 던져진 주사위 ..

결행이다

 

출발 ..

김포는 비가 그치고 햇살까지 구름 사이로 찬란하다.

제주 공항도 엷은 구름이 낮게 드리웠어도 비는 없다.

다시 입산 여부를 타진해보니 성판악, 관음사 코스는 전면 통제,

영실코스는 부분통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이 영실코스다.

윗세오름까지만 등산이 가능한 조건부 입산이다.

영실은 한라산 정상인 백록담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계곡이다.

날씨가 맑았다가 순식간에 운무에 뒤덮이는 변화무쌍한 곳이다.

제주 사람들은 한라산이 운무에 덮이면 설문대할망이 부아났다고 한다.

설문대할망?

바닷속 흙을 삽으로 떠서 제주를 만든 키 크고 힘센 여신이다.

태초에 탐라에 세상에서 가장 키 크고 힘쎈 설문대할망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누워 자던 할망이 일어나 앉아 방귀를 뀌었더니 천지가 창조되기 시작했다.

불꽃 섬은 굉음을 내며 요동치고 불기둥은 하늘로 솟았다.

할망은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불을 끄고 치마폭에 흙을 부지런히 담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이 너무 높아 한 줌 떼어내 산방산을 만들고 떼어낸 자리가 백록담이 되었다.

한라산을 만들며 터진 치마폭에서 흘러내린 흙, 나막신에서 떨어진 흙이 모여 오름이 생겼다.

오름 중에 정상에 움푹 파인 곳은 할망이 봉우리를 툭툭쳐서 파였기 때문이다.

또 할망이 싸는 오줌발에 성산포 땅이 씻겨나가 우도가 생겨났다.

제주에서 설문할망이 만들지 않은 건 영실기암과 차귀도뿐이다.

설문할망이 한라산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한 다리는 제주 앞바다에 있는 관탈섬에

다른 다리는 서귀포 앞바다 자귀 섬이나 대정 앞바다 마라도에 올려놓았다.

성산 일출봉은 빨래 바구니, 우도를 빨랫돌 삼아 빨래를 했다.

 

설문대할망이 오늘 단단히 부아가 났다

설문할망이 부아가 나면 안개로 한라산을 감춰버린다.

택시로 1100 도로를 따라 영실로 가는데 안개로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오늘 너희들에게는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어' 하는 듯하다.

우리가 뭘 잘못했지?

'장마로 온 나라가 들썩인데 번개팅이 가당한가?

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제주도를 당일치기로 다녀 간다고?

말이 되는 소리여?

가당치도 않다.'

라는 듯 낮인데도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다.

영실(靈室)은 부처가 고대 인도에서 설법했던 영산회랑, 영취산에서 유래했다.

오백나한 역시 깨달음을 얻은 불제자를 칭하고 영실 좌측 능선에 있는 볼레 오름은

부쳐가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불래악(佛來岳)으로 불린다.

영실에는 조선시대 나라의 기운을 흥하게 하기 위해 국성재를 지내는 '존자암'이 있었다.

영실 계곡엔 짙은 안개와 비가 앞을 가리고 계곡물은 폭포가 돼 흐른다.

제주도는 화산섬으로 토양이 화산토와 현무암이라 물을 저장할 수없다.

계곡과 폭포는 비 와야 계곡이고 비와야 폭포다.

오늘은 계곡답고 폭포답다.

다만 병풍바위와 영실 기암은 설문할망의 심술로 모두 가려졌다.

가린 걸로 모자라 비와 바람이 장난이 아니다.

설문할망 입장에선 우리가 괘씸할 법도 하다.

제주섬과 한라산을 빚고 자신의 몸을 던졌다.

그리고 아들들로 하여금 한라산과 제주 바다에 화룡 점점으로 오백 나한상과 차귀도가 되게 했다.

그걸 당일치기로 보겠다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마라다.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무것도 보여 줄 수 없다.

보기만 못하는 게 아니라 내 몸 가누기도 힘든 비바람이다.

바람에 날아갈까 봐 모자는 벗어 들고 안경은 붙잡고 가는 형국이다.

돈내코 백록담동릉 진달래밭 성판악 교래 윗세오름으로 한라산을 동북 서로 도는 이 곳은

일명 레인 벨트(rain belt)다.

남동쪽에서 올라오는 습도를 가득 담은 북태평양 저기압 기단과 한라산 정상의 고기압 찬 공기가

부딪혀 많은 비를 만든다.

제주나 서귀포에 비 한 방울 안 내려도 중산간에 비가 내린다.

윗세 오름은 웃세 오름으로도 불린다.

위에 있는 세 오름이라는 뜻이다.

제일 위쪽에 있는 큰 오름을 붉은 오름이라 하고, 가운데 있는 오름을 누운 오름, 아래쪽을 족은 오름이라 한다.

큰 봉우리인 붉은오름과 가운데 봉우리인 누운 오름 사이에 윗세 오름 대피소가 있다.

윗세 오름 대피소에 이르자 장대비다.

대피소 안은 난방 중이다.

누군가는 그래도 추운지 자꾸 출입문을 닫는다.

대피소에서 간단하게 간식으로 요기를 한다.

배낭 속에 있는 막초 생각이 간절하다.

비는 잣 아들 기미가 안 보이고 그냥 어리목으로 하산하기로 한다.

오늘 남벽은 출입통제다.

설문할망은 하산 길에도 아무것도 보여줄 기미가 없다.

끝까지 응징이다.

안개랑 비랑 바람이랑 실컷 놀았다.

어리목 하산길 데크에서 비바람을 우산으로 가리고 배낭 속 막초를 비운다.

어승생악(御乘生岳)은 글자 그대로 용마(龍馬)가 태어나 임금에게 바쳤다는 뜻이다.

1.3km 정상을 왕복한다.

오름 정상에 있는 분화구는 코빼기도 안 보이고 일제 강점기 가슴 아픈 역사만 되새김한다.

제주 사람에게 바람은 친구이고 이웃에 사는 궨당(眷黨, 친인척)이라 한다.

제주는 바람의 본향이다.

사시사철 평균 4.8m/sec의 바람이 분다고 한다.

제주 사람들은 바람 불 때 태어나 바람 속에 살다가 오름아래 바람속에 묻히고

바람을 벗 삼아 육신이 썩어간다고 한다.

그 바람

뭍사람이 평생 가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할 바람만 실컷 맞고 왔다.

그래도 친구 말처럼

"이 또한 즐겁지 아니 한가?"

 

 

 

그 오늘

누군가는 그토록 간절히 살고 싶었을 내일이다.

(친구야 !

수년 전, 햇수도 기억 못 하지만 그 무덥던 날,

친구가 떠난 날... 사라지는 것보다

잊히는 게 더 슬프다는데, 잊힐 때 잊혀지더라도 오래 기억할게..

그곳은 코로나도 없지?)

                                .

                                .

                                .

기억해야 할 친구가 더는 늘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 산행코스

   영실휴게소-병풍바위-윗세오름-만세동상-사제비동산-어리목계곡-

   어리목휴게소-어승생악(왕복)-어리목 (5시간 30분15.4km,GPS)

  

   사진협조:

   배병선, 최복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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