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가야산 본문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구름다소 쌀쌀하나 오후 포근
오늘은 가야산 시산제다.
가야산은 금북정맥의 한자락으로 예로부터 명당이 많아 주변에 많은 사찰과 명당으로 유명한대원군
아버지 남연군의 묘가 있으며, 1970년대 명 풍수지리가인 육관 손석우묘가 등산로 초입에 있어 내노라하는
풍수가들이 자주 찾는곳이다.
덕산면에서 5.5km거리에 있으며 마을 회관을 지나 남연군 묘를 지나 옥양봉이나 석문봉쪽으로
산행을 시작할 수 있으나,우리는 관음전 옥양봉 석문봉 가야산 으로 이어지는 가야산 종주코스를
택해 산행을 시작했다.
광천리 마을회관을 지나 남연군묘를 지나면서 아 여기가 가히 최고의 명당이구나 하는게 풍수문외한인
나도 알수 있을만큼 남향에 좌우로 펼져있는 가야산 봉우리가 좌청룡우백호 하지않아도 좋다.
싶을정도다. 근처에 남연군묘를 이장할때 사용한 남은들 상여가 잘 보존되어있다.
관음전은 조그마한 암자로 등산로에서 150여m 떨어져있어 일부러 들러보았는데,스님의 독경소리만
요란하고,일반 사찰과 다름이 없는 평범함 그대로다.
관음전부터 옥양봉까지는 가파른 급경사 바위지대이나 그거리가 짧아 한숨에 오르기는 적당하다.
옥양봉에서 석문봉은 평범한 산길로 호젓함을 즐길수 있고 며칠전에 내린 눈이 20cm정도 쌓여
춘삼월에 다시 눈 산행의 여운을 즐겨 좋았다.석문봉부터 가야산까지는 아기자기한 바위지대로
난이도가 심하지않아 오르내림이 즐거움을 더하고 해미읍이 지척에 내려다보이는 조망도 좋다.
가야산 정상은 중계기지가 있어 아쉬움이 살짝드는 그런 산행이다.
가야산 직전 고갯마루에서 상계저수지 방향으로 하산하면 광천리 주차장에 이르는데.
고갯마루부터는 급경사로 잔설이 남아있어 아이젠을 착용하고 하산했다.
1. 산행코스
광천리 주차장-남연군묘-관음전-옥양봉-석문봉-가야산-육관묘-남연군묘(3시간20분,7km)
2. 산행개념도
덕산면 광천리 남연군 묘비
옥양봉
관음전
옥양봉에서 즐거운 간식타임
옥양봉에서본 광천리 우측 상계저수지 저멀리 옥계저수지
이분들은 남 다 먹고나면 와서 쯔쯔 먹을게 별루.....
옥양봉에서 석문봉가는 호젓한 산길
지나온 옥양봉
석문봉
석문봉에서 가야산가는 바위지대
가야산
주변에 개심사, 일락사, 보덕사, 원효암등 백제초기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사찰들과 해미읍의 명소로 이름난 해미읍성,
신라 때는 가야산사를 짓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으며 조선시대까지도 덕산현감이 봄,가을로 제를 올렸던 곳으로,
덕산온천에서 고개를 넘어 해미읍성-일락사-개심사-서산목장- 마애삼존불을 넘어 보원사를 보고 덕산온천으로
일락사는 여승들의 수도사찰로 맑고 싱그러운 계곡바람과 유난히 청아하게 들리는 풍경소리가 인상 깊다.
일락산은 석문봉에서 옥양봉쪽으로 가는 곳에서 좌측으로 가야 된다.
오늘 종주한 유일한산님 운영자포한 4인 가야산아래 하산직전 간식
오얏골쉼터
남은들상여
덕산에서 당진으로 가는 도중 남은들이라는 들판에 작은 정자가 세워져 있고 그 안에 상여가 놓여 있다.
이 상여는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수원에서 가야산(남연군묘)으로 이장할 때 사용한 것으로 구조가 특이하고
조각 솜씨가 뛰어난 궁중 상여이다. 긴 멜대를 중심으로 한 기본틀 위에 관을 싣는 몸체를 조성하고 맨 위에는 햇빛을 가리기 위
해 넓은 천을 펼쳤다. 몸체에는 봉황, 용무늬 등이 새겨지고 색색의 띠와 술을 늘어뜨려 화려하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주고
있는데 망자의 명복을 빌고, 슬픔을 덜어주려는 의미인 듯 싶다.
1847년 조선시대 대원군의 부친 남연군을 경기도 연천에서 현재의 묘(덕산면 상가리)에 이장할 때 사용하던 궁중식 상여라고
구전되고 있으며 상여 전체의 모습과 부속품의 조각 솜씨가 뛰어난 우리나라 고유의 민속 연구 자료로 상당한 가치가 있어
1974년 2월 2일 문화재 지정 신청에 1974년 3월 15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다.
남연군묘
명당 중의 명당,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로 알려져 있는 남연군묘는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가야산자락에 터 잡고 있다.
이곳을 찾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의 해미나들목에서 내려 45번 국도로 진입하여 덕산방향으로 10여km를 달리면 예산군 덕산면
소재지가 나온다. 면소재지까지 오는 내내 좌측 저 멀리에는 가야산의 연봉들이 그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면소재지에서 45번 국도를 15번지방도로 갈아타고 가야산을 정면으로 보면서 그대로 계속 직진하면 옥계저수지가 나온다.
이 저수지를 지나 상가리 가는 길에 들어서서 고개를 약간 치켜들면 석문봉(653m)을 중심으로 左로는 가야봉(677.6m)이
右로는 옥양봉(621.4m)이 병풍을 두른 듯 그 웅장한 자태를 확연히 나타낸다.
그리고 고개를 약간 내리면 옥양봉에서 뻗은 긴 산자락 끝과 그 안쪽으로 가야봉에서 뻗은 산자락 끝이 중첩되어 막고 있어 마치
더 이상은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바로 남연군묘가 위치한 가야산도립공원의 입구로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 공원의 널찍한
주차장 옆 구릉에 오르면 남연군묘가 있다. 남연군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이구(李球 -1822)로 인조(16대)의 셋째 아들인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그런데 그가 영조(21대)의 계보가 된 것은 그가 어릴 때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인 은신군에게 후사(後嗣)가
없자 그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계보는 영조에서 정조, 정조에서 순조, 순조에서 헌종으로 이어지다가 제24대
왕인 헌종이 후사 없이 죽게 된다. 세도정치의 절정을 이루었던 안동김씨는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유지하기 위해
은언군(영조의 손자, 정조의 아우)의 손자인 전계대원군의 셋째아들인 강화도령 원범을 제25대왕(철종)으로 보위에 오르게 한다.
그러나 철종마저도 후사 없이 죽게 되자 남연군의 손자이며 흥선군의 둘째 아들인 명복이 제26대 고종으로 보위에 오른다.
흥선군이 그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실권을 잡기까지의 행적은 야화 등에 의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아버지 남연군이 비록 영조의 증손자인 셈이고, 자신은 현손인 셈이지만 당시의 안동김씨 세도정치 하에서 그들의
권력에 위협이 될 남연군의 후손이 보위를 잇는 남연군묘가 이장되면서 폐사된 가야사는 상가리에 다시 세워졌다.
권력을 잡는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을 뿐 아니라 목숨을 부지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흥선군은 철저히 자신을
위장하고, 안동김씨의 경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건달들과 어울려 지내는가 하면, 안동김씨 가문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한편으로는 풍수공부를 하며 전국의 명산이란 명산은 빠뜨리지 않고 찾아 다녔다. 무너진 왕권을 회복하고 실권을
잡기 위해서는 명당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여년을
찾아다녔으나 마음에 드는 명당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흥선군을 찾아와,
“덕산 가야산 동쪽에 이대(二代)에 걸쳐 천자(天子)가 나오는 자리가 있는데 여기다 묘를 쓰면 10여년 안에 틀림없이
한 명의 제왕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광천 오서산에는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릴 수 있는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가 있습니다.
이 두 자리 중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고 물었다. 흥선군은 망설이지 않고 가야산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를
선택했다. 그런데 흥선군이 지관을 따라 그 자리에 도착해보니 이미 가야사(伽倻寺)라는 절이 들어서 있었고 더구나 묘를 쓸
자리에는 5층 석탑이 우뚝 서 있었다.
절의 탑 자리에 묘를 이장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지만 흥선군은 차례차례 일을 벌여 나갔다. 그는 우선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의 묘를 임시로 탑 뒤의 영조 때 판서를 지낸 윤봉구의 사패지를 그 후손에게서 빌려 옮겼다.
이때가 1844년이다. 상여는 연천에서 가야산까지 왕손을 운구하는 일이었으므로 한 지방을 지날 때마다 그 지방민이
동원되어 메었고, 가장 마지막에 맨 '남은들'마을에 기증되었다. 이 상여는 지금도 '남은들'마을에 보존되어있다.
다음 일은 가야사를 폐사(廢寺)하는 일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흥선군이 전 재산을 처분한 2만 냥의 절반을 가야사 중들에게
주고 절에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하기도 하고, 당시의 충청감사에게 중국산 명품 단계벼루를 뇌물로 선사하여 가야사 중들을
불러다가 강압하여 불을 지르게 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흥선군의 계략에 의해서 가야사는 폐사(廢寺)되고 탑의 뒷산에 임시로
모셨던 다음해인 1845년에 이곳으로 남연군묘를 이장하였다. 이때 정만인은 후에 도굴의 위험이 있으니 석회 3백 부대를 써서
관곽(棺槨)을 단단하게 다져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남연군묘 이장 후 흥선군은 둘째아들을 얻었는데 그가 명복으로 바로
고종황제가 된다.
남연군묘를 이장하고 18년 후다. 명복이 등극하여 대원군으로 정권을 잡은 흥선군은 가야사를 없앤 죄의식에 가야사와 탑의
은덕에 보덕한다는 의미에서 가얏골 상거리에 보덕사(報德寺)를 새로 지어 주었다. 그 후 고종황제의 뒤를 이어 순종이
등극하였으니 남연군묘는 정만인의 예언대로 이대천자지지가 정확히 맞는 셈이다.
남연군묘는 이대천자지지라는 ‘명당설’로도 유명하지만, 이 묘의 명당설 때문에 ‘남연군묘 도굴사건’이 일어나는 단초를
제공하여 우리나라 근대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에 더욱 유명하다. ‘남연군묘 도굴사건’은 조선과의 통상교섭을 요구했던
서구 열강들이 실권자인 대원군에 의해 번번이 좌절되자, 그의 강력한 권한이 아버지 남연군묘가명당이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말에, 남연군묘를 파헤쳐 그의 기세를 꺾고, 또한 남연군의 유골을 확보하여 통상개방에 협상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1868년 4월 21일 밤 오페르트가 주동이 되어 저지른 사건이다. 그러나 무덤은 단단한 석회석으로 다져 놓아 쉽게 파지
못했고, 조수(潮水) 때문에 철수함으로서 결국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이 사건은 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며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또한 천주교인들이 개입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천주교박해를 강화하여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학살한
계기가 된다. 당시 오페르트 일행이 타고 온 차이나호를 정박했던 행담도는 지금은 서해안고속도로의 휴게소로 이곳에
설치된 안내판에는 남연군묘 도굴사건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곳 행담도는 1868년 흥선대원군 시절 남연군묘 도굴사건의 주역인 오페르트가 차이나호를 타고 와서 상륙했던 역사적인
섬이다. 오페르트는(oppret.E.J)는 독일 상인으로 186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과의 통상교섭에 실패하고 돌아간 후 고종
5년인 1868년 4월에 세 번째로 조선의 답사를 계획했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를 도굴해 시체와 부장품을
이용하여 통상 문제를 흥정하려는 의도로 사건을 계획하고, 미국인 젠킨스를 자본주로 하여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 겸 보좌관으로 삼고, 묄(Moeller)와 조선인 모리배 2명, 백인 8명, 조선인 천주교인 약간 명, 말레지아인 20명과
유럽, 필리핀, 중국선원 등 총 140명으로 도굴단을 구성 680톤의 기선 차이나호에 소중기선 8톤급 그레타호를 달고 일본
나가사끼를 거쳐 4월 18일 당시 홍주목 신평현(현 당진군 신평면) 행담도(行淡島)에 북독일 연방의 국기를 계양하고 정박했다.
여기서 그들은 그레타호에 옮겨 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현 예산군 덕산면 구만포에 상륙하여, 러시아 군병이라 자칭하며
어둠을 틈타 덕산 가동(伽洞)에 있는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덕산군수 이종신(李鍾信)과 묘지기 및
주민들의 저항으로 쉽게 도굴작업을 할 수 없었기에 새벽녘에야 겨우 석회로 다져진 무덤의 한부분만을 파낼 수 있었다.
이러는 동안에 날이 밝아오고 주민들이 운집하고 감조하천인 삽교천의 퇴조시간도 다가오게 되어, 이들은 관곽(棺槨)까지
파낸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구만포(현 예산군 고덕면)로 퇴각했다. 이러한 비행은 국내에서는 물론 상해 주재 외국인들
사이에도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한 행동의 피고인으로 체포기소 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가 되고 말았으며 해적의 무모한 소행과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다. 결국 우리국민에게 악감정을 일으키고,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남연군묘의 주산(主山)은 가야산 석문봉(653m)이다. 석문봉의 좌우에는 옥양봉(621.4m)과 가야봉(677.6m)이 연이어
시립하고 있는데, 이를 두고 풍수에서는 천을(天乙), 태을(太乙)이 호위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서 천을, 태을이라 함은
북극성 주변의 별로서 천황대제를 뜻하는 천황대제성(天皇大帝星)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별을 말한다. 석문봉을 중심으로
천을, 태을로 3개의 봉우리가 균형 잡힌 형태로 늘어서 있는 모습이 마치 큰 봉황의 머리와 양쪽 날개를 연상시키게 하여 뭔가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특히 서쪽 봉우리인 가야봉 너머로 석양이 질 때 더욱 그러한 분위기를 강하게 느낄 수 있다.
남연군묘의 주룡은 석문봉의 중심에서 좌선(左旋)으로 출맥(出脈)하여 수많은 기복굴곡(起伏屈曲)을 하면서 크고 작은
봉우리를 만들고, 억센 기(氣)를 정제하고 순화하며 내려와 크게 과협(過峽)한 후 혈장(穴場)을 만들었다. 석문봉에서 뻗은
여러 산줄기 중 가장 튼튼하고 힘찬 모습이다. 그 모습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아 진짜 용의 모습도 이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풍수지리에서 혈의 크기는 주룡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지 않던가. 이곳의 힘찬 용맥을 보고는 과연 천자지지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남연군묘의 혈장(穴場)은 힘차게 내려온 주룡이 해(亥)방에다 머리를 묻고 입수도두(入首倒頭)를 만들었다.
입수도두는 생기를 정축(停蓄)해 놓았다가 혈에 공급해 주는 곳으로 둥그렇게 뭉쳐진 모습이 단단하고 유연하면서
양명해 보인다. 입수도두에서 양옆으로 지각을 뻗어 혈을 좌우에서 보호해주는 선익(蟬翼)은 그동안 사초 등에 의해
많이 훼손되었지만 제법 뚜렷하다.
앞에서는 혈장을 지탱하면서 혈의 생기가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두툼한 전순(氈脣)을 만들었다. 완벽하게 혈장의
요건을 갖춘 다음 그 한가운데에 혈을 결지하였다. 특히 전순(氈脣)에는 흙만으로는 기세 강한 입수룡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납작한 반석과 같은 요석(耀石)들이 수도 없이 박혀있다. 전순에 요석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용혈(龍穴)의 기세가 크다고
하여 대혈(大穴)의 증거가 된다. 또한 요석 하나에 정승 판서가 하나씩 난다고도 하고, 그 모습이 임금의 옥쇄와 흡사하면
어보사라 하는데 이것이 있으면 제왕이 나온다고 할 만큼 매우 귀한 돌로 여긴다. 이곳의 요석 중에는 두 개의 큼지막한 것이
있는데 이를 옥쇄에 비유하여 어보사라 하고 두 개이기 때문에 2대천자지지에 비유하기도 한다. 풍수에서는 혈을 품고 있는
일정범위를 혈장(穴場)이라고 하는데 와형(窩形), 겸형(鉗形), 유형(乳形), 돌형(突形)의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와형은 삼태기나 소쿠리, 닭둥우리처럼 생긴 형태이고, 겸형은 와형과 유사하나 양다리를 크게 벌린 형태이고, 유형은
뚜렷한 용맥 위에 여자의 유방처럼 불룩 솟은 형태이고, 돌형은 유형과 유사하나 혈장 뒤에서 반드시 움푹 꺼졌다가
돌기(突起)가 되거나, 거북이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볼록한 형태로 산정(山頂)이어야 한다. 남연군묘의 혈장은
돌형에 가까운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석문봉에서 내려온 주룡이 최종적으로
한번 움푹 꺼진 뒤 돌기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혈은 음양(陰陽)의 개념으로 볼 때 혈장이 음(陰)이면 양(陽)에 있고,
혈장이 양이면 음에 있다고 한다. 이는 우주만물의 이치가 양중유음(陽中有陰)하고, 음중유양(陰中有陽)이라는
음양상생(陰陽相生)의 원리를 풍수에 적용한 것이다. 남연군묘는 혈장이 돌형이므로 음에 속한다. 그래서 혈은 양에서
찾아야 한다. 이곳은 혈장에 오르기 전에는 봉분이 보이지 않아 혈은 우묵한 곳 즉 음래양수(陰來陽受)와 음중유양
(陰中有陽)을 취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연군묘의 단정하게 다듬어져있는 봉분 주위에는 상석과 비석, 한 쌍의 석양(石羊)과
한 쌍의 망주석(望柱石)그리고 하나의 장명등(長明燈)을 석물로 설치하였다. 모든 석물의 조각이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이지만
장명등이 특히 눈길을 끈다.
풍수에서는 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을 조안(朝案)또는 안대(案對)라고 하는데, 남연군묘의 조안은 마치 만조백관(萬朝百官)이
조아리는 듯한 형상(形象)이다. 아주 먼 곳까지 시야가 틔어 있으면서도 허전하지 않게 잘 짜여 있다.
남연군묘의 청룡과 백호를 이루는 산줄기를 살펴보면, 청룡줄기는 옥양봉에서 길게 뻗어 목성(木星)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수구(水口)를 막아준다. 백호줄기는 가야봉에서 뻗어 금성과
목성의 산들을 연이어 기봉시키며 서로 이어져 혈을 감싸면서 상가리 입구에서 청룡끝자락의 안쪽으로 그 끝자락을 오므려
역시 수구를 막아준다. 청룡은 길고 백호는 짧은 용장호단(龍長虎短)의 형세로 수구를 관쇄(關鎖)해주고 있고, 청룡과
백호가 여러 겹으로 중첩되어 물을 역수(逆水)시키니 길격 형상이다. 또한 청룡, 백호의 여러 줄기가 혈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듯이 산자락을 맞대고 있어 어전회의(御前會議)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가히 천자지지라 할 만하다.
그러나 완벽한 터가 없듯이 흠결도 보인다.
청룡 쪽이 혈과 많은 거리를 두고 감싸니 그 사이가 계곡이 되어 풍살(風煞)이 염려되고, 또한 청룡줄기 하나는
몽둥이를 들고 묘를 향해 공격하는 듯 머리를 내밀고 있다. 이를 두고 풍수가들은 고종과 순종이 외세의 치열한 압력 속에
숱한 시련을 받다가 망국의 서러움을 당하였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그리고 백호 쪽은 청룡보다 높고 크며 각각의 모습이
뛰어나 청룡을 압도하고 있다. 특히 백호줄기에서 기봉한 원효봉은 만만치 않은 위용을 자랑하며 혈을 능압하는 듯하다.
이를 두고 차손과 내당의 주장이 강한 곳이라 고종이나 순종 모두 장남이 아닌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올랐고 명성왕후
민비의 득세가 대단했다고 비유하기도 한다.
남연군묘에서 동북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청룡자락에는 문화재자료 제182호로 지정된 미륵불이 남연군묘를 등지고
골짜기를향해 서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이 돌아 서있는 이유에 대한 설이 분분하다. 북쪽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한 일종의 풍살(風殺) 비보(裨補)로 세워진 것이라는 설이 있고, 원래 가야사(伽倻寺)를 바라보고 있었으나 대원군이
가야사를 없애고 남연군묘를 쓰자 등을 돌렸다는 설이 있다. 세워진 연대에 대해서도 설왕설래하고 있는데 기법으로 봐서는
고려시대로 추정되고 있다. 남연군묘 이장당시에 세웠다는 마을사람들의 증언이 있긴 하지만 규명하기는 어렵다. 실제
조각된 장식을 보면 미륵불이라기 보다는 관세음보살로 봐야한다는 설도 있다.
풍수에서는 혈을 감싸고 빠져나가는 물길 또한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무조건 혈을 감싸고 빠져나간다고 다 좋은
물길은 아니다. 여기서도 음래양수(陰來陽受) 즉 우선룡(右旋龍)이면 좌선수(左旋水)가 받고, 양래음수 즉 좌선룡이면
우선수가 받아야
음양화합이 되어 좋은 물길로 본다. 남연군묘의 물길은 우측 백호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수도좌(右水倒左)로 혈을
감싸주면서 좌측 을진(乙辰)으로 파구(破口)된다. 이곳 주룡이 좌선룡이므로 우선수가 감싸니 양래음수로 음양화합이
되어 좋은 물길이다.
남연군묘의 좌향(坐向)은 亥입수룡에 따라 해좌사향(亥坐巳向)을 하였다. 좌향이란 등을 대고 정면으로 바라보는
방향으로혈의 뒤쪽 방위를 좌, 혈의 정면을 향이라 한다. 결국 좌와 향은 180도로 대칭 되는 방향이 된다. 풍수의
좌향법은 일차적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에 의하여 좋은 혈처를 결정했더라도 그 좌향을 파구의 방위와 양기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 법에 따라 적법하게 적용했을 때만이 생물체가 가장 좋은 생기를 취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대단히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용혈사수에 향을 추가하여 지리오결(地理五訣)이라고도 한다. 좌향법에는 용을 보고 정하는 법,
물을 보고 정하는 법 등 여러 이론이 있어 적용하는 법 또한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법이
가장 맞는 좌향법이라고 할 수도 없으며 여러 좌향법을 비교하여 그 지형에 가장 적합한 것을 적용할 일이다. 이곳의
해좌사향도 어느 좌향법을 적용했는지는 모르나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는 亥입수룡에 巳향이니 입수룡과 향이 모두
같은 정음(淨陰)이 되어 합법하고, 팔십팔향법으로는 부귀왕정(富貴旺丁)한다는 자생향(自生向)이 되어 합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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