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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를 만나다....(43년만의 해후, 내고향 번암)

無碍人 2013. 12. 31. 08:18

2013년 12월 21~22일 토,일요일 청명 초딩친구

 

산꾼으로 살며 이땅의 산줄기를 찾아 헤메고 있지만 내고향 번암면에는 무심했다.

지난 여름 금남호남정맥을 종주하면서 정리되지않은 생각을 피력하긴 했지만....

장수군지 번암면 유래에 따르면

"번암면은 태백정간(소백산맥)과 노령산맥의 두메산 어느골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다.주변에 백운산, 장안산, 팔공산, 대성산, 고남산이

 동서남북으로 병풍처럼 둘러 있다"

이 무슨 뚱딴지 같은소리? 결코 이정의에 동의 할수 없다.

틀렸다 말하지는 않겠지만 결코 옳다고 할수는 없다.

이미 왜곡돼... 많은 학자들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조선산악론'에 의한 산맥표현방식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니...

우리의 산맥구조는 여암 신경준에 의해 이미 250년전에 지형적구조로 1대간 1정간 13정맥을 모태로하여, 백두대간은 국토를 남북으로 가르며 동해로 흐르는물과

서해로 흐르는물을 갈라놓는 대분수령, 즉“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에의한 정의가 정설이다.

고토분지로의 지질학적 산맥표기를 전적으로 부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산은 지형적인 구분이 옳으며 지질학적 구분이라는 고토분지로의,이론도 이미 오류가 너무

많아 대부분의 학자들이 부정하고 있는데, 고토분지로에게서 배운 한국인 제자들이 서울대를 비롯한 유수의 대학에 자리잡고 앉아,대를 이어가며 그의 이론을 고집해,

아직도 태백, 소백, 차령, 노령산맥 운운한다면,진정한 일제 청산은 요원하다.우리의 산줄기는 우리의 '산자분수령' 이론에 의해 이미수십만의 산꾼들이 마루금을 타며

증명해 보이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란  무엇인가?

"뫼산(山) 스스로자(自) 나눌분(分) 물수(水) 고개령(嶺)" 한문 해석 그대로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라는 뜻이 된다.

더 쉽게 표현하면 “두 능선(稜線)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稜線)이 하나 있다” 라는 말이된다.

그러므로 나라 안에 산(山) 없이 시작되는 강(江)이 없고 강(江)을 품지 않은 산(山) 이 없으니 산(山) 과 강(江)은 하나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에 나라의 물줄기란 물줄기를 모조리 그려 놓으면 나머지 공간이 몽땅 다 산줄기가 되는 것이다.

나더러 번암면의 지형적인 위치를 정의 하란다면 나는 이렇게 정의 하고 싶다.

"백두산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남한땅, 설악산, 태백산,소백산을 넘어 덕유능선에서 육십령을 건너 깃대봉, 영취산에 이르고 영취산부터 백운산,중고재,광대치,봉화산,

짓재,아막산성,사치재,매요재,고남산을 지나,여원재건너 고리봉,정령치,만복대,성삼재,노고단 지리산주능선을 지나 천왕봉에 이르는길목,영취산부터 매요재까지

백두대간 능선을 좌청룡으로 거느리고,영취산에서 무룡고개 건너 장안산을 북현무로, 금남호남정맥 밀목재,사두봉,바구니봉,수분재,신무산,금남호남천황지맥 대성산을

우백호로, 백두대간 고남산을 남주작으로 하는 천혜의 명당터"

좀 장황하다면

"장안산을 북현무로하여,백두대간 영취산,백운산,봉화산을 좌청룡으로,금남호남정맥 사두봉,바구니봉 대성산을 우백호로 거느리고,백두대간 고남산을 남현무로 하는

천혜의 명당터"라고....

 

그니와 헤어짐은 준비가 없었다.

이토록 오래도록 그니와 만나지 못할거라고는 그 교실에서는 상상이 안갔다.

그 교실.... 내 정서의 80%를 만들어준 그 교실에서... 우리는 준비 없이 오랜 헤어짐을....

그리 뛰어난 아이가 못됐던 나는 가까스로 맨꼴찌로 우등상을 받았다 못받았다 하던 6년의 시간들이 였다.

그 졸업식이 끝나고 마지막 종례 시간...무슨 연유인지는 기억되지 않지만, 그종례시간 우리반 담임대신 옆반 담임이었던 우리 친구 인철 아버지의 마지막 종례는

기억속에 각인돼, 이후 내 인생의 지표가 되어왔다.

"학교에서의 우등생이 사회에서 반드시 우등생 되라는 법이없고...학교에서의 열등생이 사회에 나가 꼭 열등생이 되라는 법도 없다, 오늘의 우등생이 열등생이 될수 있고

오늘의 열등생이 우등생이 될수있다"난 그해 졸업식에 우등상을 못받다.

그니와는 그렇게 헤어져 43년? 강산이 4번 변하고 수년....

그니를 만나러 가기전 몇날은 잠을 이룰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부터 꼭 그니를 한번 보고 싶다고.....

 

백두대간 영취산(1076m) 무룡고개, 금남호남정맥 장안산(1236.9m)은 금강,낙동강,섬진강이 나뉘는 지역이다.

해발 1000m급의 고산으로 둘러쌓인 번암면,  그중에서 가장 상류에 해당하는 지지리(知止里)는 섬진강의 지류인 요천의 발원지로,직선거리로 따져 장수읍이 8km,

함양읍이 15km,남원시가 25km이다.

그런데 지지리 사람들은 '남원백리' 하면서도 가까운 장수읍이나 함양읍을 생활권으로 하지 않고 남원을 생활권으로 하며 살아왔다.

그도 그럴것이 장수읍으로 가려면 금남호남정맥상의 고산준령 장안산(1236.9m)으로 대변되는 어치재,밀목재를 넘어야하고,함양읍으로 가려면 해발 730m의

중고개재를 넘어야 한다.

결국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30리길 장수읍과,40리길 함양읍이 산과 강의 이치에 따라 가장 '먼' 동네로 간주되는 것이다.

강은 사람을 흐르게 하고, 산은 가둔다. 강이 동질성을 품는 동안, 산은 이질성을 키운다. 

이 땅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자 할때, 산과 강을 보는 눈부터 가다듬어야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유사이래 내고향 번암땅은 언제나 행정구역상 남원 땅이였다.그런데 일제의 조선강점이 시작되던 을사조약이듬해(1906년)부터 장수읍에 편입된것이다.

"산자분수령"에 어긋나는 행정구역 개편이였다.

이 모두가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의 황당한 이론에 의한 이땅의 토지 수탈 역사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강을 따라 살아야 하는 분명한 이유가 근년에 이곳에서 증명이 되고있다.

'장수사과'는 그맛과 향에서 다른 사과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품사과다. 처음엔 백화점에서 가장 비싼가격에 판매되던 명품사과로...

태어난것은 송재관이라는 사람이 1987년 홍로라는 품종을 밀식재배하여 오늘날 명품사과가 된것이니 고작 26년쯤된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장수군 전역에서 재배되고있는데....이사과가 같은 장수군인데도 수분재넘어 번암쪽에서는 재배가 안된다는것이다.

이를 어찌 설명할것인가 "산자분수령"밖에 없다.

산이 가두고 이질성을 키울때 강은 흘러 동질성을 키운다는 '산자분수령'만이 이를 설명할 수 있다.

수분령 남쪽은 번암땅 요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북쪽은 장수땅 장수천을거쳐 금강으로.....

 

그니가 왔다.

담박에 알아볼수있는 그니도 있고....도무지 상상이 안돼는 그니도 있다.

검게 그을린 시골 촌부도 있고 세련된 도시 신사도 왔다.인자한 누님 얼굴을 한 그니도.... 천상 어머니 같은 그니도....

이름도 얼굴도 기억 안나는데 어디서 본듯한 그니들....

그렇다 내 어릴적 동네 어귀를 지게지고 봇짐이고 돌아오던 그 아저씨 아줌마가 그니 얼굴에 있다.

시장에서 차부에서 마주치던 낯익은 얼굴이 그니들이다.

뜨거운 포응으로 금새 우리는 43년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가고...눈물나게 행복한 순간이 지나간다.

참 먼길을 돌아온 그니들 어찌 살았는지 묻지 않아도... 어디서 사느냐고 물을 필요도 없는  그런 나이에.....

 

백두대간 백운산(1278m)과 금남정맥의 장안산(1236.9m)의 두줄기 사이에 상평과 하평이라는 두 자연 마을이 있었다.

우리나라 8대 종산으로 금강이남의 모든 산줄기의 어버이 산이라 할수 있는,장안산을 머리에 이고 있는 이마을은 1750년경 천주교 탄압을 피해온 신자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마을로,벽계승람에는 상하평응(上下坪凝)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우리 번암사람들은 "드렝이"라 즐겨 불렀다.

옛날  어떤 선비가 성적산(聲笛山팔공산)에 올라 피리를 불었는데,피리소리의 높고 낮은 아름다운 음율이 번암면 여러 마을에 퍼졌는데 이소리를 "들리느냐""들어라"

"들린다""들었다"에서 피리소리에 응대하는 의미를 부여하여 "드렝이"라 했다 한다.

드렝이 동쪽은 비교적 완만하여 온화한 느낌을 주며 반대편 사암리 쪽은 경사가 심하고 힘있게 솟아오른 세봉우리가 있어 삼봉산이라 부른다.

한때 50여가구 300여명의 주민이 살았는데 1987년 동화댐 건설로 마을이 없어져 이곳에 살던 그니는 실향민이 되었다.

다음은 드렝이에 살았던 내 친구 그니(花雲 이론나)가 부르는 망향가이다. (친구 스토리에 있는 글을 허락받고 옮겨옴)

 

꿈속에서도 그리운 !내고향.!

골목 어귀어궈..굽이진 논 두렁길..

꼴망태메고.토끼풀 뜻으려가서

해질녁 논두렁길을 콧노래 부르면서

다니는걸 참 좋아했었지..!

마을앞 아름들이 정자나무 두그루..

어른들의 쉄터. 아이들의 놀이터...

여름이면 키큰 감나무가

동네 지붕을 다 감싸안아 버리고.

모래알이 환히 보이던 맑은물과

하얀조약돌과 바위들이 넘치던 넓은 냇가..

큰비가오면 짐검다리 떠내려가 물에 빠지기도하고.

어른들이 업어주기도하고.

학교에 못가기도 했지.!

마을앞내 건너 신작로에 삼판하던 트럭에매달려

얻어타기도하고.

먼지나는 신작로길을

진달래 한아름 꺽어 학교에 가져가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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