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비자림/만장굴/성읍민속마을 본문
2015년 8월18일 선선한 맑은날 천사&어머니
평대리 비자림
제주 비자림(榧子林)은 제주 동쪽 30km 지점의 독립적인 산 저악(猪岳143m)의 평탄한 곳에 발달한 비자나무 숲이다.
현무암이 곳곳에 노출되어 있고 표토는 풍화한 화산재가 깊게 쌓여 있으며 자갈이 많다.
이곳에 비자나무 숲이 이루어진 유래는 마을 당제에 쓰이던 비자 종자가 사방으로 흩어져 자라 식물상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섬의 진상품으로 열매는 구충제로 쓰이고 지방분이 많아 비자유를 짜기도 하며 음식이나 제사상에 오르기도 했다.
목재의 중심재는 갈색이고 변재는 노란색으로 나뭇결이 곱고 가공이 쉬워 가구재,장식재 조각재등로 쓰였으며 비자나무 바둑판은 유명하다.
삼국시대 목선 바닥재로 사용한 유물이 발굴되기도 했다.
제주도는 남해에 있어 일찍부터 일본 중국과의 교역이 이루어져 건축과 조선을 위한 목재 벌목이 육지보다 빨랐다.
제주도는 육지에 없는 각종 식물이 많아 특산품으로 수출되기도 했다.
고려부터 조선에 이르기 까지 제주도 비자나무 열매와 목재는 토산공물로 바쳐 졌으며, 열매는 약용으로 과세 대상이 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비자나무는 국가용재로 그 수량을 파악하고 관리했으며, 귤,유자 밤과 함께 비자를 과원으로 분류하여 담장을치고 보호 하도록 했다.
평대리 비자림의 역사는 500~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조선시대 귀중재 생산과 더불어 과수원으로 보호 했기 때문에 오늘날 아름다운 숲이 남아 있다.
이 숲에는 비자나무 뿐 아니라 나도풍란,콩짜개난,흑난초,비자란,등 희귀 난과 식물이 자생하고 천선과나무,자귀나무,아왜나무,머귀나무,후박나무등이 있다.
구좌읍 동김녕리 만장굴
만장굴(萬丈窟)은 만쟁이굴이라 부르며 용암 동굴이다
용암 동굴은 용암의 표면이 식어서 굳어지고 난후 내부의 용암이 계속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용암 내부의 긴 공간이다.
지표를 흐르는 용암은 대기와 만나서 빠르게 굳지만 안쪽은 계속 용암이 흐르기 때문에 더디게 굳으며 동굴을 만든다.
용암 동굴이 석회 동굴과 다른점은 종유석,석순,석주가 있으나 석회동굴 처럼 자라지 않는다.
용암동굴의 내부는 대부분 수평적인데 석회동굴은 동굴의 경사가 급하다.
석회동굴은 지하수가 내부로 스며들며 암석을 녹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동굴 내부가 복잡하고,용암동굴은 단순하다.
대표적인 용암동굴은 만장굴,김녕사굴등 제주도의 대부분 동굴들이고, 석회암지대인 강원도의 환선굴,고수동굴등은 석회동굴이다.
만장굴은 1만m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 동굴로 굴 안 600m 지점에 큰 거북바위가 있다.
천 년 묵은 큰 거북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아주 정교하며 다시 400m 더 들어가면 높이 7m의 용암기둥이 있다.
성읍민속마을
서귀포시 표선읍 성읍리는 조선 후기 정의현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영주산(324m)을 배경으로 중산간 평지에 자리 잡은 정의현은 제주도 동도로 태종 16년에 현감을 두었다.
영주산은 영모르라 하는데 예부터 이산에 신선이 살고 있었다 하며, 이 산에 아침 안개가 피면 비가 온다고 한다.
진사리에 있는 정의읍성은 '진사성'이라 부른다.
세종5년 판관 최치렴의 감독하에 정월 초 아흐레 부터 열사흘까지 나흘만에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벽은 무너지고 현재는 남,서문만 복원돼 있다.
진사리라 불리는 성읍리에는 천년 이상된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봄에 이느티나무에 잎이필때 동쪽에서 잎이 먼저 피면 정의고을 동쪽이 풍년들고 서쪽에서 먼저피면 서쪽 마을이 풍년든다고 점을 치곤 했다.
정의 현감이 집무를 보던 정의현의 관아가 일관헌(日觀軒)이다.
세종 5년인 1423년에 정의 현청이 성읍리로 옮겨 오면서 정의읍성과 함께 지어졌다.
성읍에 있는 정의향교는 1738년(영조 14)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으며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읍 소재지가 표선리가 되었지만 이곳 성읍 사람들은 지금도 표선읍을 갈 때 “촌에 간다”고 하며 정의현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있다.
구좌읍 동김녕리 만장굴
만장굴(萬丈窟)은 만쟁이굴이라 부르며 용암 동굴이다
용암 동굴은 용암의 표면이 식어서 굳어지고 난후 내부의 용암이 계속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용암 내부의 긴 공간이다.
지표를 흐르는 용암은 대기와 만나서 빠르게 굳지만 안쪽은 계속 용암이 흐르기 때문에 더디게 굳으며 동굴을 만든다.
용암 동굴이 석회 동굴과 다른점은 종유석,석순,석주가 있으나 석회동굴 처럼 자라지 않는다.
용암동굴의 내부는 대부분 수평적인데 석회동굴은 동굴의 경사가 급하다.
석회동굴은 지하수가 내부로 스며들며 암석을 녹여 만들어지기 때문에 동굴 내부가 복잡하고,용암동굴은 단순하다.
대표적인 용암동굴은 만장굴,김녕사굴등 제주도의 대부분 동굴들이고, 석회암지대인 강원도의 환선굴,고수동굴등은 석회동굴이다.
만장굴은 1만m가 넘는 세계에서 가장 긴 용암 동굴로 굴 안 600m 지점에 큰 거북바위가 있다.
천 년 묵은 큰 거북이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아주 정교하며 다시 400m 더 들어가면 높이 7m의 용암기둥이 있다.
성읍민속마을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는 조선 후기 정의현 현청이 있었던 곳이다.
영주산(324m)을 배경으로 중산간 평지에 자리 잡은 정의현은 제주도 동도로 태종 16년에 현감을 두었다.
영주산은 영모르라 하는데 예부터 이산에 신선이 살고 있었다 하며, 이 산에 아침 안개가 피면 비가 온다고 한다.
진사리에 있는 정의읍성은 '진사성'이라 부른다.
세종5년 판관 최치렴의 감독하에 정월 초 아흐레 부터 열사흘까지 나흘만에 쌓았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 성벽은 무너지고 현재는 남,서문만 복원돼 있다.
진사리라 불리는 성읍리에는 천년 이상된것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있다.
봄에 이느티나무에 잎이필때 동쪽에서 잎이 먼저 피면 정의고을 동쪽이 풍년들고 서쪽에서 먼저피면 서쪽 마을이 풍년든다고 점을 치곤 했다.
정의 현감이 집무를 보던 정의현의 관아가 일관헌(日觀軒)이다.
세종 5년인 1423년에 정의 현청이 성읍리로 옮겨 오면서 정의읍성과 함께 지어졌다.
성읍에 있는 정의향교는 1738년(영조 14)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과 명륜당이 있으며 동재, 서재, 삼문 등이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면 소재지가 표선리가 되었지만 이곳 성읍 사람들은 지금도 표선읍을 갈 때 “촌에 간다”고 하며 정의현의 전통과 역사에 대한
자존심을 잃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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