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낙동정맥 15구갼종주(숲재-사룡산-비슬지맥분기봉-서오리고개-아화고개-만불산-관산-한무당재) 본문

이 또한 지나가리/낙동정맥(完)

낙동정맥 15구갼종주(숲재-사룡산-비슬지맥분기봉-서오리고개-아화고개-만불산-관산-한무당재)

無碍人 2018. 3. 7. 07:04

2018년 3월 4일 일요일 맑다가흐림 포근 배법이랑


한신(韓信)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한초삼걸(漢初三杰 소하, 장량, 한신)"의 한 사람이다.
배수진(背水陣)과 사면초가(四面楚歌), 다다익선(多多益善), 필부지용(匹夫之勇), 등 고사성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는 밥을 빌어먹을 정도로 불우했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고향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난한 젊은시절 한신은 항상 칼을 차고 다녔는데,그것을 보고 불량배들이 길을 막고, 
"너는 칼을 차고 다니니 용기가 있으면 나를 한번 찔러봐라,아니면 내 바짓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 "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한신은 모욕을 참으며 그 불량배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 사람들에게 겁쟁이라는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을 참는다는 뜻의 과하지욕(袴下之辱 )의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홀로 우뚝 서기는 쉬워도 낮추어 굽히기는 어렵다.

 뜻이 있어도 세상이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좌절의 역경 앞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기르며 때를 기다릴 일이다.

 그러나 그 굽힘이 뜻을 꺾는 굴종일 수는 없다.

 세상에는 지고도 이기고, 이겼지만 지는 그런 승부도 있다.'

채근담에 있는 말이다.


무슨 뚱단지 같은 넉두리냐구??

요즘 내가 그렇다.

쓸데없는 자만과 공명심이 혹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돼진 않았는지?

고개를 숙여야 할 나이에 그러지 못해 친구의 상처가 큰지?

좀더 일찍 뜻을 굽혔어야 하는데 쓸데없이 내 주장이 강해 일을 그르쳤는지 복잡한 심경이다.

그래도 또 내안의 악마는 우리가 몇년 만난 친구인데??

내게 그럴수 있어? 이건 수치고 모욕이야?

그렇게 날 이기고 싶냐 ?

친구간에 이기고 지는게 뭐가 대단하다고 다 내려 놓지 못하는지 ?

나는 언제쯤 완전체 인간으로 거듭 날 수 있을런지....

머리 좀 식혀야 겠다고 하는데 실로 4개월만에 친구와 일정이 맞아 낙동에 들었다.

출발부터 비 예보가 신경을 쓰게 하는데,터미널을 떠날때 부슬비가 차창을 스친다.

현지 날씨는 오후 늦게 비 예보가 들어 있고 오전 비 올 확률 30%다.

오늘 한무당재에서 숲재 구간은 초반 관산 오름과 후반 사룡산 오름이 난코스다.

관산 오름은 거리가 짧지만 사룡산 오름은 지친 산행 후반에 비까지 온다면 난코스가 될거 같다.

친구와 상의해 북진 하기로 하고 경주 터미널에서 생식 마을이 있는 우라마을 입구 숲재로 이동한다.

숲재는 이곳 사람들은 숙재라한다.

경주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 등 재 양편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

'숙재고개'라고 버젓이 네이버 지도에도 나와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예부터 내려온 이름일 뿐 유래는 모른다”가 내가 여기저기 검색한 결론이다.

"고지대인 우라리서 낮은 아화 쪽으로 숙진다고 숙재라 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기록이 지역 신문에 있다.

어쨌든 숲재의 이름은 숙재로 확인됐다. 한자로는 ‘淑嶺’(숙령),

재에서 천촌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골 이름은 ‘숙골’,거기 있는 저수지는 ‘숙곡지’다.(04:30)

우라리 시루미기 마을은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로 쓰였으면 한국 전쟁이후 생식하는 기독교인이 들어와 터를 잡았다.

사룡산(四龍山,685m)은 일명 전방산()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와 영천시 북안면 당리,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의 경계에 있다.

옛날 용 네 마리가 승천한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서쪽으로 구룡산(), 동쪽으로 오봉산()과 이어지며 삼국시대 부산성(:사적 제25호)과 더불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북쪽 능선 안부에 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 금정사()가 있으며, 정상 부근 평원지대에 생식마을 시루미기가있다

마을은 깊은 잠에 빠져있고 철문 3개를 통과하여 사룡산 정상에 선다.
내 디카의 야간 후레쉬가 말썽을 부려 임시 방편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쓰기로 한다.(05:05)
사룡산을 찍고 산불 감시탑을 지나면 낙동정맥상의 비슬지맥 분기봉(656봉)이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상의 사룡산(683m) 북쪽 400m 지점의 656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금호강의 남쪽 울타리와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 나루터에서 밀양강과 낙동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146.5km의 산줄기로

최고봉인 비슬산(1083.6m)의 이름을 따서 비슬지맥 이라 칭 한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아화고개와 숲재 중간에 위치한 656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사룡산(683m), 구룡산(674.8m), 발백산(674.5m),

대왕산(607m), 선의산(756.4m), 용각산(692.5),상원산(674.1m), 삼성산(668.4m) 등 600~700m 대의 산군들을 지나 비슬산(1083.6m)에

이르러 북쪽으로 청룡지맥을 분기 시키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화봉(1057.7m), 수봉산(592.5m), 묘봉산(514m)을 지나 천왕산(619.2m)에 이르러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분기 시킨 후 동남진 하며, 붕어등(278.8m)을 지나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 나루터에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그 맥을 다 한다.(05:20)

긴 내림을 내려 서오리 고개에 서고 양지쪽에서 간식을 하며 모처럼의 낙동을 만끽한다.

잔뜩 구름낀 날씨가 구름이 걷히며 햇살이 따뜻해 지더니 급하게 온도가 상승한다.

겨울 등산복을 탈의하고 가볍게 봄 산행복으로 갈아입는다.(09:25)

오르 내림없는 편안한 임도따라 경부 고속도로 굴다리 중앙선 철길을 건너면 4번국도가 지나는 아화고개다.

멀지 않는 만불산 극락 세계에서 삼천대천 세계로 친히 나투신 33m의 아미타대불의 금빛 가사가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아화고개(100m)는 영천 북안면 고지리에서 경주 서면 아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영천 고지리에서는'시모골재','도둑골재'라 부르고 경주 서면 아화리에서는 '지경고개' '아화고개'라 부른다.

서쪽 영천쪽으로는 금호강으로 가는 북안천이 동쪽 경주쪽으로는 형산강으로 가는 서천내가 경주시에 들러 대천으로 합류한다.

경주시 서면 아화리는 넓은 벌판과 언덕을 끼고 있는 마을로 본래 '아불(阿弗)', '아울(阿鬱)', '아을'이라고 불러오다가 '불'

'화(火)'표기하면서 '아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언덕에 불을 지르면 종일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고 하여 '아화(阿火)'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훗날 글자를 풀이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화의 옛 이름은 아불(阿弗)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권 제30 동이전 진한조에는

아화(阿火)는 '우리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고 적고 있다.(08:50

4번국도 굴다리를 나와 좌측 산불 감시탑 아저씨의 까칠한 반응을 웃음으로 대처하며 만불산 등로를 찾아 오르다가

양지쪽에서 천사가 챙겨준 막초 한잔으로 아침을 해결한다.(09:10)

만불산(275m)은 신라의 공예품 만물산(萬佛山)을 재현에 놓은 만물사(萬佛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20세기에 설립된 현대 한국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1987년 서울, 부산, 대구에 포교원을 설립하였고, 1995년 사찰 설립을 완공하였다.

1993년에는 스리랑카에서 부처 진신사리 5과를 이운하였고, 노천아미타불을 점안하였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로는 노천 아미타물을 비롯하여 국내 최대 법당전불인 삼존불,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 진신사리

5과와 보리수나무가 있다.

또한 33m 영천 아미타대불, 부도탑묘, 황동와불열반상, 황동만불대범종, 인등대탑, 만불보전, 관음전, 대웅전, 법성게 법륜,

수정유리광여래불, 복주머니, 유자영가 등이 있다.

관산(冠山 394m)은 경주시 서면 도리와 영천시북안면 관리,신촌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옛 기록에는 고관산(高冠山)으로 나와있으나 어느 시점에서 관산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쪽으로 낙동을 가두고 동쪽 경주쪽으로는 금호강과 형산강의 분수계가 된다.

묘지 옆구리에 박혀있는 몰상식한 삼각점(삼각점이 먼저인지 묘지가 먼저인지 알수 없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몰상식하다)을

뒤로하고 완만한 오르내림을 편안하게 달려 한무당재에 이른다.

한무당재는 할마당재라 부르기도 하는데 글 서두에 언급했던 한신 장군을 모시는 영엄한 무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오 무렵 청명하던 하늘은 금새 비가 올거 같은 낮은 구름이 잔뜩 들어 오고 있다.(14:05)


1. 산행코스

   숙재-사룡산-비슬지맥분기봉-서오리고개-아화고개-만불산-관산-한무당재

   (22.3km,9시간 35분)



2. 산행경로

   10:22분 - 부평구청역
   23:55분 - 강남고속터미널
   03:30분 - 경주고속터미널
   04:30분 - 숲재(숙재)1
                 생식마을정문-생식마을후문
   05:05분 - 사룡산(685m)
   05:20분 - 비슬지맥분기점(656m)
   05:35분 - 전망바위-효동고개(형제목장)
   07:25분 - 서오리고개(909번지방도 영천시표지판)
                 임도갈림길
   08:00분 - 경부고속도로굴다리
                 중앙선철로
   08:50분 - 아화고개(4번국도)-4번국도 굴다리
   09:30분 - 만불산(275m)
   09:45분 - 포장임도
   10:00분 - 양계장밀집지역
   10:30~11:10분 - 점심

   12:15분 - 관산(393,5m)
   12:55분 - 외골재
   14:05분 - 한무당재(할마당재 청석골재


@. 교통편

   강남-경주 심야고속

   경주터미널-숙재 택시 35000원

   할마당재-건천 택시 목욕후 식사

   건천-신경주역 택시 10000원

   신경주-광명 ktx

 

3. 산경표


한신(韓信)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한초삼걸(漢初三杰 소하, 장량, 한신)"의 한 사람이다.
배수진(背水陣)과 사면초가(四面楚歌), 다다익선(多多益善), 필부지용(匹夫之勇), 등 고사성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렸을 때 그는 밥을 빌어먹을 정도로 불우했고 어머니의 장례식도 치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고향 회음(淮陰 지금의 강소성)에서 있었던 일이다. 
가난한 젊은시절 한신은 항상 칼을 차고 다녔는데,그것을 보고 불량배들이 길을 막고, 
"너는 칼을 차고 다니니 용기가 있으면 나를 한번 찔러봐라,아니면 내 바짓가랑이 밑으로 지나가라 "고 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한신은 모욕을 참으며 그 불량배의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나가 사람들에게 겁쟁이라는 비웃음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바짓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을 참는다는 뜻의 과하지욕(袴下之辱 )의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홀로 우뚝 서기는 쉬워도 낮추어 굽히기는 어렵다.

 뜻이 있어도 세상이 그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그 좌절의 역경 앞에서도 묵묵히 자신을 기르며 때를 기다릴 일이다.

 그러나 그 굽힘이 뜻을 꺾는 굴종일 수는 없다.

 세상에는 지고도 이기고, 이겼지만 지는 그런 승부도 있다.'

채근담에 있는 말이다.



숲재는 이곳 사람들은 숙재라한다.

경주 서면 천촌리와 산내면 우라리 등 재 양편 사람들이 그리 부른다.

'숙재고개'라고 버젓이 네이버 지도에도 나와있다.

왜 그렇게 부르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예부터 내려온 이름일 뿐 유래는 모른다”가 내가 여기저기 검색한 결론이다.

"고지대인 우라리서 낮은 아화 쪽으로 숙진다고 숙재라 했을지 모른다"는 정도의 기록이 지역 신문에 있다.

어쨌든 숲재의 이름은 숙재로 확인됐다. 한자로는 ‘淑嶺’(숙령),

재에서 천촌리 쪽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지나는 골 이름은 ‘숙골’,거기 있는 저수지는 ‘숙곡지’다.(04:30)

우라리 시루미기 마을은 골짜기의 지형이 시루와 같이 생겼다는 의미로 쓰였으면 한국 전쟁이후 생식하는 기독교인이 들어와 터를 잡았다.

사룡산(四龍山,685m)은 일명 전방산()이라고도 한다.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우라리와 영천시 북안면 당리,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의 경계에 있다.

옛날 용 네 마리가 승천한 산이라는 뜻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서쪽으로 구룡산(), 동쪽으로 오봉산()과 이어지며 삼국시대 부산성(:사적 제25호)과 더불어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북쪽 능선 안부에 신라 때 창건된 유서 깊은 절 금정사()가 있으며, 정상 부근 평원지대에 생식마을 시루미기가있다

마을은 깊은 잠에 빠져있고 철문 3개를 통과하여 사룡산 정상에 선다.
내 디카의 야간 후레쉬가 말썽을 부려 임시 방편으로 핸드폰 카메라를 쓰기로 한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상의 사룡산(683m) 북쪽 400m 지점의 656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금호강의 남쪽 울타리와 밀양강의

서쪽 울타리 역할을 하면서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 나루터에서 밀양강과 낙동강 합수점에서 그 맥을 다하는 146.5km의 산줄기로

최고봉인 비슬산(1083.6m)의 이름을 따서 비슬지맥 이라 칭 한다.

비슬지맥은 낙동정맥 아화고개와 숲재 중간에 위치한 656봉에서 서쪽으로 분기해 사룡산(683m), 구룡산(674.8m), 발백산(674.5m),

대왕산(607m), 선의산(756.4m), 용각산(692.5),상원산(674.1m), 삼성산(668.4m) 등 600~700m 대의 산군들을 지나 비슬산(1083.6m)에

이르러 북쪽으로 청룡지맥을 분기 시키고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조화봉(1057.7m), 수봉산(592.5m), 묘봉산(514m)을 지나 천왕산(619.2m)에 이르러 남쪽으로 열왕지맥을 분기 시킨 후 동남진 하며, 붕어등(278.8m)을 지나 밀양시 상남면 외산리 오우진 나루터에서, 밀양강과

낙동강이 합수되는 지점에서 그 맥을 다 한다











서오리고개


춘심을 이기기 쉽지 않을거야

금방 터질 듯













경부고속도로













영천만불사 아미타여래불







중앙선 철로




4번국도 아화고개

아화고개(100m)는 영천 북안면 고지리에서 경주 서면 아화리로 넘어가는 고개다.

영천 고지리에서는'시모골재','도둑골재'라 부르고 경주 서면 아화리에서는 '지경고개' '아화고개'라 부른다.

서쪽 영천쪽으로는 금호강으로 가는 북안천이 동쪽 경주쪽으로는 형산강으로 가는 서천내가 경주시에 들러 대천으로 합류한다.

경주시 서면 아화리는 넓은 벌판과 언덕을 끼고 있는 마을로 본래 '아불(阿弗)', '아울(阿鬱)', '아을'이라고 불러오다가 '불'

'화(火)'표기하면서 '아화'가 된 것으로 보인다.

언덕에 불을 지르면 종일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다고 하여 '아화(阿火)'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훗날 글자를 풀이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화의 옛 이름은 아불(阿弗)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삼국지"권 제30 동이전 진한조에는

아화(阿火)는 '우리 마을'이라는 뜻이 있다고 적고 있다













만불산(275m)은 신라의 공예품 만물산(萬佛山)을 재현에 놓은 만물사(萬佛寺)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20세기에 설립된 현대 한국불교의 중심 도량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부처님이 모셔져있다. 

1987년 서울, 부산, 대구에 포교원을 설립하였고, 1995년 사찰 설립을 완공하였다.

1993년에는 스리랑카에서 부처 진신사리 5과를 이운하였고, 노천아미타불을 점안하였다.

이곳에 보관되어 있는 유물로는 노천 아미타물을 비롯하여 국내 최대 법당전불인 삼존불,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 진신사리

5과와 보리수나무가 있다.

또한 33m 영천 아미타대불, 부도탑묘, 황동와불열반상, 황동만불대범종, 인등대탑, 만불보전, 관음전, 대웅전, 법성게 법륜,

수정유리광여래불, 복주머니, 유자영가 등이 있다.


관산









관산(冠山 394m)은 경주시 서면 도리와 영천시북안면 관리,신촌리 사이에 있는 산이다.

옛 기록에는 고관산(高冠山)으로 나와있으나 어느 시점에서 관산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서쪽으로 낙동을 가두고 동쪽 경주쪽으로는 금호강과 형산강의 분수계가 된다.

묘지 옆구리에 박혀있는 몰상식한 삼각점(삼각점이 먼저인지 묘지가 먼저인지 알수 없지만 우리 상식으로는 몰상식하다)을

뒤로하고 완만한 오르내림을 편안하게 달려 한무당재에 이른다.








한무당재는 할마당재라 부르기도 하는데 글 서두에 언급했던 한신 장군을 모시는 영엄한 무당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오 무렵 청명하던 하늘은 금새 비가 올거 같은 낮은 구름이 잔뜩 들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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