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리 부부 산방
금남정맥 8구간종주(진고개-깃대봉-가자티고개-조석산-청마산성-석목고개-금성산성-부소산성-구두레나루) 본문
2014년 3월1일 토요일 연무 미세먼지심함 천사랑
금남정맥은 오롯이 백제에 드는 길이다.
운장산을 넘어 백령고개가 옛 백제의 전략적 요충지 탄현이고, 이길을 통해 의자왕이 지금 합천의 대야성 원정길에 나서고...
또 이길을 통해 신라군이 황산벌에 집결하기도 한 그길.... 금남정맥 128km의 마지막 길을 밟으며 비운의 왕 백제 31대 의자왕을
만나러 사비에 간다.
백령산성을 지나 배티재에서 대둔산을 넘어 깃대봉 함박봉 황룡재 천호봉 개태사를 지나며, 계백과 관창을 만나기도 하고, 견훤과
그아들 신검의 권력 다툼을 엿보며 안타까워 하고, 개태사에서는 왕건과 최일 장군을 만나며 역사를 넘나 들었지만, 금남정맥의
하이라이트는 오늘 이 구간,청마산성,금성산을 지나 백제후기의 왕도 사비시대의 도성, 부소산성에서 구두레나루에 맥을 다하는
백제의 안타까운 역사를 더듬는 길이된다.
부지런을 떨며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공주행 버스에 오르고, 택시와 시내버스를 이용해 연무 가득한 진고개에 선다.(08:50)
등로에는 벌써 장구나물과 이름모를 꽃이 빼꼼히 봄을 알리며 그 수줍은 꽃망울을 내밀고...냉이와 쑥도 제법 토실토실 매서운
동장군을 물리치고 개선장군처럼 건재를 알린다.
힘들지 않게 밤나무 단지를 올라 깃대봉, 안경구덩이산,명덕재에 이르고...(9:50)
명말 청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한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四夫有責)"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백제의 31대 의자왕의 책임이야 말로 막중하다.그런데 안타깝게도 다른왕에 비해 의자왕의 역사 앞의 책임은
지나친면이 있다.
역사 기록이라는게 승자의 기록임은 간과 할 수 없지만, 사비성에 이르는길에 백제 마지막을 살았을 의자왕을 생각해본다.
의자왕은 무왕과 선화공주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雄勇膽決 武王在位三十三年 “義慈王 武王之元子 立爲太子 事親以孝 與兄弟以友 時號海東曾子(의자왕(義慈王)은 무왕의 맏아들이다.웅걸차고 용감하였으며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 무왕이 재위 33년(632)에 태자로 삼았다.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와는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
아버지 무왕이 서거한후 641년 즉위한 의자왕은 즉위 다음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미후성(獼猴城) 등 40여성을 함락시키고 윤충을
보내 대야성(합천)을 공격하여 성주 품석의 항복을 받고 품석의 처자를 모두 죽이는등의 전과를 올린다.
대야성이라 함은 지금의 합천으로 백두대간 넘어 서라벌 깊숙히까지 백제의 영토가 이르렀음 의미하는걸로 백제가 가장 강성 했을때
보다 넓은 영토를확보한다. 대야성 성주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로 처는 김춘추의 딸이다.
이런 연유로 김춘추는 백제가 철천지 원수가 되고 고구려와 동맹을 하려하나 오히려 고구려는 말갈과 더불어 백제를 도와 북쪽의30여성을 함락 시킨다.(의자왕 15년,655년)
명덕재는 감나무골재라고도 하는데 감나무는 보이지 않고 오늘 산행중 가장 높은 봉우리 감투봉(262m) 오름을 오른다.
가장 높다 하지만 동네 뒷동산 가는 기분으로 가볍게 오르고 내리면 799번 도로가 지나는 가자티고개다.(10:55)
가자티고개(123m)는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와 남산리를 연결하는 2차선 포장 도로로 남산(南山) 아래에 있어 남산골이라 불리는데,
철조망이 있으며 친절하게도 철조망에 출입문을 달아두어 산님들이 여닫고 지나게 배려를 해주는 유일한 곳이다,
그런데 철문은 고물장수가 떼어 갔는지 없다.
양지바른 언덕을 올라 버들강아지가 한껏 시절을 뽐내는 언덕에서 쑥내음과 함께 이른 점심을 해결하고....
곁들인 막걸리도 맛나다. 이렇게 천사랑 함께하는 산행은 언제나 입이 즐겁고 눈이 행복하다.
그냥 함께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길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행복한데....
맥길을 잇는 다는게 만만 찮으니 늘 함께 하잘 수 없는게 현실이다.
말이 20여km지.... 하루 산행거리로는 너무 벅차다.오즉하면 '산고의 고통'이라 할까?
재위 15년차 의자왕은 이렇게 정복 군주로 승승장구했는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하면 재위 15년(655년) 2월 태자궁을 호화롭게 수리하고 왕국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설치하고 다음해
삼월에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진다 "十六年 春三月 王與宮人淫荒耽樂 飮酒不止"라고 기록하고 있다.
왜? 의자왕은 갑자기 궁녀와 주색 잡기에 빠져 든것일까?
김부식이 누군가? 신라 유민출신 아닌가?
백제 패망의 정당성을 찾으려다 보니 김부식의 기록은 여기부터 돌변한다.
있는 역사기록은 어쩔수 없지만 패망한 군주 의자왕을 황음무도한 패륜아로 몰아간다.
바로 그 답이 삼국사기에 있다.
내가 전문적인 역사 학자도 아니고 삼국사기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도 아니지만 김부식은 김춘추가 당고종을 설득하여
소정방의 13만군을 이끌고 백제를 치게 하려 할때....아니 그 기록을 남기려 할때 백제의 수도 사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장황하게 기록하고 있다
“十九年 春二月 衆狐入宮中 一白狐坐上佐平書案 夏四月 太子宮雌雞與小雀交 ... 五月 王都西南泗沘河 大魚出死 長三丈
秋八月 有女屍浮生草津 長十八尺 九月 宮中槐樹鳴 如人哭聲 夜鬼哭於宮南路(19년(659)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와 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書案]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했다. ...
5월에 서울[王都] 서남쪽의 사비하(泗沘河)에 큰 물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길이가 세장(丈)이었다. 8월에 여자의 시체가
생초진(生草津)에 떠올랐는데 길이가 18자였다. 9월에 궁중의 홰나무[槐樹]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
이는 하늘의 뜻이 백제를 떠났음 강조하는 것으로 의자왕의 폭정을 기술하려 하며 쓴글이다.
나당연합은 유사이래 외세를 끌어들여 이땅을 살육한 최초의 사건이다.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는 민족 최대 최악의 수치다.
나당 연합이후 이 민족은 반도안에 갖혀 수도 없이 외세의 침입을 받으며 수난의 역사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김부식은 1145년 정권을 장악한 경주계통의 문신귀족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는 사실을
주지해야한다.
그도 나당연합이 부끄러웠 을지도 모른다.학자로서 나당연합이 정당화 될 수 없다는것을 어쩌면 이시대에 김부식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부끄러운 자기 조상들의 역사를 정당화 하려면 의자왕을 패주로 기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자티에서 완만하게 10여분 오르면 됨봉 갈림길이 나오고 약간 비껴선 됨봉(160m)에 다녀와 고만고만한 봉우리 몇개를 오르락
거리면 부여군 조촌면 세탑리 신탑골과 공주시 탄천면 가척리 돌담리를 이어주는 신앙고개에 이르고...(12:40)
사람의 흔적이 끊긴 고갯마루는 이곳이 예전엔 고개였구나 하는 희미한 흔적만 남아 있고 개활지(187m)를 지나 비슷한 봉우리
두어게를 넘어 성터흔적이 있는 조석산에 이르고(13:30) 본격적으로 사비성의 외성이라 할 수 있는 청마산성길을 걷는다.
재위기간 내내 원정과 출정으로 힘을 기른 의자왕은 서서히 정권 이양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도 이미 60세를 바라보는 노년에 이르고 있었으니....
그는 자신의 아들 41명에게 좌평이라는 벼슬을 주는데...좌평은 조선시대 관제로는 정승에 해당하는 직급으로 우리가 잘아는
계백장군이 좌평 아래 달솔이였으니.....나름의 왕권 강화였겠지만....귀족들이 그냥 놔둘리 없었겠지...
충신 좌평 성충, 흥수등이 간하다 죽임을 당하고 귀향가고 했을게고....
나름의 막강한 군사력과 부를 가지고 있던 백제는 당군 13만과 신라군 5만의 연합군이 밀려오는데 내부분열로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충신 성충이 죽임에 이르러 간하던 탄현과 기벌포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는 충언을 실기하고....
"臨終上書曰 忠臣死不忘君 願一言而死 臣常觀時察變 必有兵革之事 凡用兵 必審擇其地 處上流以延敵 然後可以保全
若異國兵來 陸路不使過沈峴 水軍不使入伎伐浦之岸 擧其險隘以禦之 然後可也(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을것이니
원컨대 신이 때를보고 변화를 살폈는데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며, 무릇 군사를 쓸때 지리를 살펴 강의 상류에서 적을 맞이하여
지킬것이며, 다른나라가 육로로 침입하면 침현(탄현,백령산성)을 넘지 못하게 하며 수군은 기벌포(백강,백마강) 언덕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여 좁은곳에서 적을 막아야 합니다"
결국 나당 연합군은 탄현(백령산성)을 넘어와 황산벌에서 계백이 5000의 군사로 맞섰으나, 중과부적 4번의 전승에도 불구하고
패퇴하여 장렬이 전사하고....기벌포로 들어온 소정방군을 피해 둘째아들 태에게 사비성을 맡기고 웅진성에 이르렀는데...
둘쩨 태는 소정방군이 들어오자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대응하는데...태자의 아들 문사가 숙부가 왕이라 칭하니 후환이 두려워
항복하고...결국 내분으로 600년 사직이 풍전등화에 이른다.
더군다나 웅진 성주 이직(예직이라 하기도 함)의 배반으로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항복하였다.
이때가 660년 음력 7월18일
웅진성에 들어간지 5일만의 일로 임존성(예산)이 백제 패망후에도 3년을 버틴것으로 봐서 백제가 갑자기 패망한것은 내분과
이직의 배신이 원인된것이다.
의자왕은 7월29일 소정방과 김춘추에게 나아가 술을 따르며 항복의식을 치르고, 8월17일(양력 9월24일) 귀족88명과 백성
12000여명이 당나라 낙양성으로 끌려가 의자왕은 1년후 파상풍과 화병으로 사망하여 북망산에 묻힌다.
조석산(184.9m)은 부여읍 능산리에 있는 산으로 청마산성 흔적이 있고 이후 오산리고개에서 석목고개에 이르는 내내 산성길을
따라 진행한다.
청마산성은 능산리에 있는 산성으로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위한 외성으로 포곡식 산성이다.
백제의 가장 큰성으로 방어를 위한 산성이라 남문이 없으며 이밖에도 외성으로는 지나온 석성산성,성흥산성, 증산성이있다.
오산리고개는 청마고개라고 하기도 하며 이지역 사람들은 채마소고개라 부르며 부여읍 용산리와 능정리를 넘는고개다.
왼쪽으로 내려가면 백제의 왕과 가족등의 묘로 추정되는 능산리 고분군이 있다.(14:40)
석목고개는 4번국도가 지나가며 금성산으로 이어진다.
급하지 않으며 잘 만들어진 산책길따라 오르면 정자가 있는데 이곳이 금성산 통수대다
금성산(121.2m) 통수대는 백제의 삼산(三山) 가운데 하나이며,삼국유사 남부여조에 궁중에 삼산이 있는데 그이름은 일산(日山)과
오산(吳山)과 부산(浮山)이다. 백제 전성기에는 이들 삼산에 신선이 살았으며, 삼산중에 일산은 사비성 동쪽에 있었으며 지금의
금성산으로 추정되며, 오산은 지금의 오석산,부산은 백강마을 뒷산을 일컫는다.
삼산의 중앙 금성산(錦城山)은 백제 전역의 각 산성의 통신을 담당하는 통수대(統帥臺)를 세워 외적의 침입이나 내란등이 발생했을때
군사행동의 총괄 연락 지점으로 역할을 한것으로 보인다. 통수대는 글자 그대로 장수들이 모이는 장소인것이다.(16:00)
통수대에서 사비길 따라 무노정(無老亭)에 이르고 임도 따라 내려가면 활궁장뒤로 부여여고 방면 시내로 내려간다.
부여 도서관뒤 부여여고 정문으로 들어가 맞은편 계단을 오르면 팔각정이라는 백제 우물이 있고 우물뒤로 비로소 부소산 마루금에
이른다.(16:30)
부소산성에 대해선 여기서 내가 언급하지도 않아도 많은 정보가 있으니 마루금따라 진행한다.백제 삼충신 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삼충사,영일루, 궁녀사,태자골 숲길, 군창지,반월루,낙화암 고란사를 휘휘둘러 고란사 선착장에서 구드레 나루에 이르는 유람선으로......(17:00)
백제가 망하던 날 의자왕의 궁녀 3000명이 낙화암 절벽에 올라 몸을 던졌다는 것이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전설이다.
역사기록에는 삼천궁녀라는 삼천도 나오지 않은데,왜 삼천궁녀가 낙화암 절벽에서 뛰어 내렸다는 것이 정설처럼 내려오는지 내내
궁금했다.
참 오래전 20대후반 낙화암에 올랐을때, 그때 백마강 물은 도저히 삼천명의 궁녀가 물에 뛰어내려 죽을곳이 못된다 생각 했는데.....
오늘 다시 찾은 백마강 물은 유람선이 다닐만큼 수량은 풍부한데.....그 맑던 물은 온데간데 없고 탁하고 금방 악취가 올라올 정도로
탁하다. 가둬둔 물이 안스럽고....역사는 어찌됐던 황당한 전설로 돈벌이에 여념없는 이시대가 슬프다.
유람선에선 의자왕 왜곡에 앞장선 유행가 소리가 요란하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비교적 사료가 잘 남아있는 조선시대 궁녀의 수가 영조 이전에는 100여명 내외였다고 하고,가장 많았던 시기도
영조조에 600명 정도라 한다.지금 부여군의 인구가 10만이 안되는데 지금 10만의 인구가 3000의 궁녀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절대로 그리 할 수 없다는것은 수학은 몰라도 산수를 쪼매 아는 사람이라면.....궁녀만 있었겠는가 도성을 지키는 군사는 더
많아야하고 귀족들의 식솔과 하인들은 얼마며 그들을 먹여 살리는 백성의 수는.....
그렇다고 나라가 망했는데 도성의 가장 북쪽 외진곳의 절벽에서 뛰어내린 사람이 없었겠는가?
후궁들이며 궁녀들이 잡혀서 모욕을 당하는이 죽음을 택한이가 있었을테고....백성들도....
처음궁녀가 언급된게 삼국유사 '백제고기'편에서 부여성 북쪽 큰바위절벽(왕포암 王浦巖)에 예부터 전해오는 말이 있는데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죽음을 못 면할것을 알고 서로 이르기를 "차라리 자진할지 언정 적의 손에 잡혀서 죽지 않겠다"하고 절벽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라고....
또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도 '여러 비빈들'이 자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이게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 낙화암 이야기다.
그뒤 시인 묵객들이 낙화암을 지나며 시로써 허망하게 망해버린 나라의 아픔을 노래 할때 몸을 던진 백성들의 한을 표현하기도
했지만....처음으로 3000궁녀가 언급 된것은 일제시대 나온 윤승한의 소설"김유신"에서 이고,결정적인 것은 '낙화암'이라는
유행가에서.....
이모두가 의자왕을 황음무도(荒淫無道)한 패륜군주로 몰아 가는데 일조를 한것이다.
군주의 묘호는 죽은 다음에 부여되는 것인데 의자왕(義慈王)의 묘호에서 보듯 그는 죽은다음에 의롭고 자혜로운 왕이라는 묘호를
얻었다.그는 실패한 군주였지 결코 황음무도한 패륜군주는 아니였다.
고란사,고란사약수,고란초 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으니 언급을 삼가기로 하고 구드레 나루에 선다.
금남정맥 128km을 완주하고 이제 다시 호남정맥에....새로운 호기심을...
구드레는 부소산 서쪽 백마강가에 있는 나루터이며 금남정맥이 주화산에서 발원하여 128km의 금강남쪽을 달려와 맥을 다하는 곳으로, '구들돌'이라는 말에서 유래한것으로 삼국유사에 의하면 백제왕이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가다 사비수 언덕에 올라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자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 이곳을 자온대(自溫臺)라 부르게 됐고 그 이름에서 '구들돌' '구드레'로 변화한것이라 한다.
1. 산행코스
진고개-깃대봉-명덕재-감토봉-가자티고개-조석산-청마산-석목고개-금성산-부소산-구드레나루
(22km,9시간)
2. 산행경로
03:50분 - 부개집
04:00분 - 부개농협 88탑승
05:00분 - 구로역 환승
05:19분 - 노량진역 버스환승(640번환승)
06:05분 - 강남터미널
07:30분 - 공주터미널
08:00분 - 시내버스터미널(탄천삼거리행210)진고개행 230번(08:30분)
08:20분 - 탄천삼거리
08:50분 - 진고개(645번 지방도상)
09:00분 - 깃대봉(160.5m)
09:27분 - 안경구덩이산(106m)
09:50분 - 명덕재(감나무골 고개)
10:18분 - 감토봉(262m)
10:55분 - 가자티고개(799번 지방도)
벌목된 양지바른언덕 점심
됨봉(160m)
12:40분 - 신앙고개
13:30분 - 조석산(182.9m)
13:50분 - 청마산
14:40분 - 오산고개
15:20분 - 석목고개(4번국도)
16:00분 - 금성산(121.2m)
16:30분 - 부여여고
17:00분 - 부소산(105m)
17:20분 - 낙화암.고란사
고란사 선착장에서 유람선
17:50분 - 구드래나루터
@. 교통편
부평역 9500번 혹은 삼산체육관 9800번 탑승(05:00출발) 하면 고속터미널 0605분차 탑승 가능하나
만약에 대비해 여유있게 가려고 88타고 영등포 전철환승 노량진역 640번환승
고속터미널-공주 06:05분,06:40분 우등고속
공주터미널-시내버스터미널 택시이용 3500원
08:00분 210번 탄천 삼거리
08:30분 230번 진고개
구드레-부여터미널 택시 3000원
부여-남서울 18:30분,19:20분
전철환승
3, 산경표
탄천삼거리
장구나물이 어느새...
진고개
깃대봉
명덕재(감나무골재)
가자티고개
청마산성터
청마산성길
ㅇ
오산고개
석목고개
금성산
벤치에 누워 하늘보니...
활궁터
주택 정원에 봄은 오고 있다.
런닝멘에 나왔다는 부여에서 꽤 유명한 한우집
여기서 외식하려 했는데..시간이 없다.
부여여고 정문안으로해서 우측계단을 통과하면 팔각정
백제때 우물이란다. 팔각정
영일루
군창지
부소산성 소나무 숲이 참좋다.
반월루
사자루
백화정
천년송
낙화암 절벽
백마강,백강(금강)
고란사
고란사 선착장
낙화암(유람선상에서...)
금남의 끝 구드레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