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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역사 속으로 시간여행

無碍人 2018. 6. 5. 12:30

2018년 5월31일 목요일 맑음 천사랑


로마시내 관광을 위해선 로마의 역사를 알아야 이해가 빠르다.

물론 현지 가이드 선생님도 이를 충분히 인지 하는지 로마 역사를 줄줄이 읊어 대는데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투어중엔 이해 할 수 없었던 로마의 역사를 자료를 찾아 되집어보고 주마간산(走馬看山) 식으로 지나간 로마 미니벤 투어를 정리한다.


로마왕정 시대(BC753~BC509)

늑대 젖을 먹고 자랐다고 하는 로물루스에 의해 기원전 753년 테베레 강변의 팔라티노 언덕 위에 건국된 로마는 전설적인 4명의 라틴계 왕과

3명의 에트루리아계 왕이 통치하게 된다.

에트루리아계 왕 치하에서는 선진국 에트루리아의 앞선 문화가 대거 유입되어 로마는 짧은 기간 안에 '세련되고 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공화정시대(BC509~BC27)

기원전 509년 왕정이 무너지고, 로마의 정치체제는 왕 대신 매년 선출되는 두 명의 집정관에 의해 통치되는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이때 로마는 왕정 시대와는 달리 국력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설상가상으로 기원전 390년에는 켈트족의 침입으로 완전히 초토화되고 말았다.

하지만 로마는 다시 일어섰으며, 귀족과 평민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를 안정시킨 다음부터 서서히 강력한 나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주변의 작은 나라들과 부딪히게 되었는데 기원전 4세기 말에는 남부의 산악민족인 삼니움족과 격돌했지만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그러나 로마는 자신의 결점을 보완하고 상대방의 장점을 역이용하여 삼니움을 결국 정복했고 삼니움 전쟁에서 터득한 전쟁기술을 바탕으로

마침내는 이탈리아 반도 전체를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그다음에는 바다로 눈을 돌려 당시 지중해 해상강국이던 카르타고와 격돌하여 심한 패배를 맛보았으나 결국에는 승리했고,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를 비롯한 동방도 모두 지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지중해는 로마의 내해가 되었다.

이처럼 거대한 나라를 건설한 로마였지만, 강력한 실력자들 간의 내전으로 공화정의 의미가 날로 퇴색되어 갔다.

이때 정적들을 모두 제거한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0~기원전 44)는 종신독재관이 되어 왕과 다름없는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여 로마의 정치체제를 공화정에서 제정(帝政)으로 바꾸는 기틀을 잡았고,

그가 암살당한 다음에는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다시 기선을 잡고 내전을 완전히 종식시켰다.


로마제국 시대(기원전 27 ~ 기원후 476)

기원전 27년 옥타비아누스가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Augustus)' 칭호를 받은 다음부터 로마에는 공화정이 막을 내리고

제국 시대가 본격적으로 도래했다.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기원전 27~기원후 14년)에 의해 완전한 기틀이 잡혔고, 티베리우스 황제(14~37년), 칼리굴라 황제(37~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41~54년), 네로 황제(54~68년)를 거치면서 발전과 혼란을 거듭했다.

네로 황제가 몰락하고 난 다음 기사계급 출신의 장군 베스파시아누스(69~79년)는 혼란한 정세를 평정하고 황제가 되어 자신의 가문과

로마제국의 영광을 상징하는 거대한 원형극장 콜로세움을 세웠으며, 장남 티투스(79~81년)와 차남 도미티아누스(81~96년)가

아버지로부터 제위를 계승했다.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다음에는 늙은 원로의원 네르바(96~98년)가 황제로 추대되면서 소위 '5현제 시대'가 열리는데

그가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발탁한 트라야누스 황제(98~117년)는 로마제국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117~138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138~161년) 시대에는 사상 최고의 번영기를 누렸다.

하지만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61~180년) 시대부터는 게르만족을 비롯한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면서 로마제국의

국운은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 로마는 오랜 기간 동안 혼란기를 거치게 되는데, 그 사이에 기독교는 여러 번 국가 차원의 박해를 받았으며,

이러한 박해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84~305년) 때 최고조에 달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사후 후계자 문제로 야기된 내란을 평정하고

로마제국의 제1인자로 등장한 콘스탄티누스 황제(305~337년)는 기독교 세력과 손을 잡았으며 313년에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했다.

로마제국 멸망의 역사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에 제국의 수도를 비잔티움으로 옮김으로써 급류를 타게 된다.

그 후, 로마제국은 동로마제국과 서로마제국으로 완전히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서로마제국은 1세기도 넘기지 못한 476년 역사의 뒷전으로

완전히 사라져버렸고, 동로마제국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거의 1000년 더 존속했다.

(건축으로 만나는 로마 1000년 정태남 글 옮김)


바티칸시국

교황청은 교황을 중심으로 바티칸 시국과 로마 성청을 다스리며, 세계 가톨릭 교회 및 교도를 통솔한다.

교황청은 The Holy See로 지칭되며 그 뜻은 전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자 대변자이다.

로마시바티칸 언덕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독립국가로, 성베드로대성당, 성베드로광장, 교황의 거처 및

교황청사무실이 있는 궁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0.44㎢, 인구는 약 800여 명(2017년 기준), 수도는 바티칸(Vatican City)이다.

인구의 85% 이상이 이탈리아인이며, 라틴어와 이탈리아어가 주로 사용되고, 프랑스어와 영어도 사용된다.

종교는 100% 가톨릭교이다.

이탈리아 정부의 보조금 및 바티칸 소유 부동산과 바티칸은행의 투자수익, 그리고 세계 각국의 가톨릭협회로부터 온

기부금으로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대부분의 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들여오는데, 물품에 대한 관세는 부과되지 않는다.

바티칸의 정체는 교황제이며, 교황 아래 수상격인 국무장관 추기경이 있다.


이론 무장을 했으니 본격적으로 로마투어 현장으로 GO GO....




콜로새움
개선문
대전차경기장
마찌니동상

포로로마
배네치광장
판테온신전 지름43m
트레비분수
스페인광장

바티칸 시국








피우지호텔




로마 시티 투어 미니벤








콘스탄티누개선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승리를 기념해 서기 315년 7월 25일에 완성됐다.

이날은 콘스탄티누스의 황제 등극 10주년 기념일이었다.

높이 대략 25미터가 되는 이 개선문은 고대 로마 1200년 역사에서 로마의 심장부에 마지막으로 세워진 기념비로, 현재 로마에 남아 있는

세 개의 개선문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클 뿐 아니라 보존 상태도 가장 양호하다

중앙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

 신의 영감과 숭고한 정신으로 나라를 위해 정의의 무기로 폭군과 그의 일파들에게 복수하였으므로 이에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은 승리의 증표로 이 개선문을 헌정했다" 라는 글귀가 남아 있다.







콜로세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암피테아트룸 플라비움을 세우면서 그 옆에 있던 높이 35미터나 되는 네로 황제의 거대한 황금동상 콜로수스(Colossus)는

헐지 않고 얼굴을 태양신으로 바꾼 채 세워두었다.

이 '원형극장'은 중세에 '콜로세움(Colosseum)'으로 불려졌는데, 이 명칭은 '콜로수스'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대전차 경기장

영화 "벤허"에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차경기 장면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런 전차경기가 열리던 곳이 바로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이다.

키르쿠스 막시무스란 문자 그대로 '최대의 경기장'이란 뜻으로 이탈리아 사람들은 치르코 맛시모(Circo Massimo)라고 부른다.

같은 경기장이라도 고대 로마인들은 스피나(spina, 등뼈 즉 중앙분리대)가 있어서 그 주위로 마차가 회전할 수 있으면

키르쿠스(circus)라고 했고 중앙분리대가 없으면 스타디움(stadium)이라 불렀다.


마찌니동상

로마 대전차 경기장 쪽에서 팔라티노 언덕을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로마 대전차 경기장의 한편에는 마찌니의 동상이 있답니다동상에는 그의 애국심을 의미하는 "La Patria (조국)"이라는

단어가 의미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마찌니 (Mazzini, 1805-1872)는 이탈리아의 애국자이자 혁명가였습니다.

Garibaldi를 도와 이탈리아의 통일과 독립을 꾀했던 애국지사입니다.




팔라티노언덕

팔라티노 언덕은 로마의 시조인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테베레 강에 떠내려 와 정착한 곳이다.

로물루스의 정치적 기반이 된 곳이기도 하며, 콘스탄티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가기 전, 약 4세기 중엽까지 로마의

가장 중심이었던 곳이다. 5~6세기에는 계속된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하는 요새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지리적 이점으로

각종 별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기도 했다. 팔라티노 언덕에 남은 건축물들은 모두 새로운 건축물들의 재료로 사용되어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로물루스의집

사람들은 팔라티노 언덕의 움막터를 ‘로물루스의 집(Casa di Romolo)’이라고 부르고 있다.

'로물루스의 집'이라는 말 속에는 로물루스가

전설의 인물이 아닌, 실재의 인물로 판명되기를 은근히 바라는 마음도 있는 것 같다







포로 로마노

콜로세오에서 성스러운 길이라는 의미의 ‘Via Sacra’ 거리를 따라가면 포로 로마노를 만날 수 있다.

팔라티노 언덕과 연결되어 있는 포로 로마노는 고대 로마 시대의 민주 정치와 상업, 법률의 중심지였다.

로 로마노는 여러 황제를 거쳐 오면서 발전했지만, 5세기경 로마가 분열되면서 이곳 대부분의 건물들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여러 시대를 거쳐 온 다양한 시대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S.P.Q.R.은 'Senatus Populus QueRomanus'

약자로 영어로는 'the Senate and the People of Rome'즉 현대의 연설문에서 '신사 숙녀 여러분'하는 것과 같이 로마에서 연설할 때

주로 처음에 말하던 "원로원과 시민 여러분"이란 의미가 된다.

여기서 "Populus Que Rmanus"는 로마 시민의 대표격인 민회를 의미한다.

귀족이자 사회 지도층인 로마 원로원과 평민의 대표 기관인 민회의 끊임없는 견제와 협의로 로마 제국은 지중해를 지배하고도

500년 이상을 번성했다. 그 대표적인 이념의 출발이 이 약자다.

흔히 방패나 군기 혹은 로마의 건물들 특히 지도층이 자신의 돈으로 지어서 기증한 건물에는 반드시 들어가 있다.





























조국의제단

조국의 제단’은 이탈리아 의회의 결정으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II(1820-1878)에게 바쳐진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국보급 기념물 중 하나다.주세페 사코니는 로마제국의 중심부에 고전시대의 위대한 성지들을

모델 삼아 이탈리아의 부흥을 찬양하는 콘셉트로 설계했다.






베네치아광장

많은 거리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로마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의 하나다.

광장 정면에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기념관이 있다. 1885년에 디자인해서 25년에 걸쳐 건축하여 1911년에 완성된

이 기념관은 이탈리아 통일(1870년)의 위업을 달성한 초대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를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현재 이탈리아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판테온 신전

원래는 평범한 고전적 신전으로 지붕을 씌운 4각형 평면의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118~128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완전히 재건했고 3세기초 세베루스 황제와 카라칼라 황제 때 부분적으로 개축되었다.
판테온은 그 규모, 구조 및 설계가 매우 특이하며 대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는 가장 커서 지름이 약 43.3m이고 기단으로부터의

높이가 21.6m에 이른다.
건물의 본체는 구형 공간이 돔 중앙에 있는 지름 8.2m의 오쿨루스를 통해 들어오는 빛에 의해서만 채광되고 있으며 대리석으로 입혀져 있다.

천장의 4각형 정간은 세베루스 때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청동제 장미 장식과 몰딩으로 꾸며져 있다.







판테온 신전 정면









트레비 분수

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불리는 트레비 분수는 로마 여행의 하이라이트다.

로마에는 크고 작은 분수대가 많은데, 르네상스 시대에 교황들이 고대 로마 제국의 상수도 시설을 보수하고 추가로 건설하여

물 공급이 원활해지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많은 분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바다의 신 넵튠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반인반어의 해신 트리톤이 있다.

한 트리톤은 해마를 길들이고, 다른 한 트리톤은 동물을 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대리석으로 만들었지만, 바로크 특유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이 살아 있어 로마의 분수 중 가장 아름다운 분수로 손꼽히고 있다.

예전 로마 제국에서는 전쟁터로 간 애인의 무사귀환을 기도하며 이곳에 동전을 던졌다고 하는데,

그것이 이어져 지금은 로마 여행 중 꼭 거쳐 가야 하는 동전 던지기 장소로 유명하다. 분수를 등지고 동전을 하나 던져

들어가면 로마에 다시 돌아오고, 두 개가 들어가면 운명의 사랑을 만나고, 세 개가 들어가면 그 사람과 결혼한다는 속설이 있다.

던져진 동전은 각종 국제 빈민 구호에 쓰인다.

트레비는 이태리어로 삼거리 라는 뜻이다.















스페인 계단

스페인 계단은 로마의 중심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원래 시 당국은 포폴로 광장이 중심지 역할을 하기를 기대했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늘 이곳에서 휴식을 취했다.

스페인 계단은 총 137개의 계단으로, 늘 수많은 사람으로 붐빈다.
스페인 계단의 원 명칭은 ‘트리니티 데이 몬티 계단’이다. 이 계단은 트리니티 데이 몬티(Triniti dei Monti) 성당으로

가는 길을 잇기 위해 1726년에 만든 곳이다.

이곳에 주 교황청 스페인 대사관이 있었으며, 프랑스 외교관이었던 에티엥이 1723년 기부금을 걷어 스페인 대사관을 설계한

스펙키와 데 산티스에게 부탁함으로써 스페인 계단으로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스페인 대사관 앞에는 큰 기둥 탑이 하나 있는데 로마 제국 시대에 건물을 지지하던 기둥을 하나 가지고 와서

1854년 피오 9세에 의해 선포된 ‘무원죄 수태교의(마리아는 아무런 원죄가 없다라는 교의)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했다고 한다.
스페인 계단에서 괴테, 바이론, 스탕달, 발자크, 안데르센 같은 최고의 작가들이 그들의 감성을 키웠다고 한다.

지금도 스페인 계단에는 키츠가 한때 살았던 집에서 늘 전시회가 열린다.

아직도 젊은 문학도, 예술가들은 이곳을 찾아 자신의 창작열을 드높이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 동쪽 입구에서 바라본 천장화와 서쪽 정면으로 보이는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성당 동쪽 입구에서 바라본 천장화와 서쪽 정면으로 보이는 "최후의 심판"                                    
최후의 심판 (The Last Judgment)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의뢰를 받아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완성하고 20여 년이 지난 뒤 같은

예배당의 벽에 그린 프레스코이다.

천장화와 달리"최후의 심판"은 매우 음울하고 비극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시스티나 성당은 사진 촬영 금지 구간이다(다음백과 퍼온사진)


바티칸 대성당(성베드로성당)

베드로 성당은 총 500개의 기둥, 50개의 제단, 450개의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총 5개의 문이 있다.

성당의 내부는 1506년 브라만테에 의하여 건축이 시작되어 미켈란젤로, 1600년대의 마데르노에 의해 내부 공사가

계속되어 공식적으로는 1626년에 완성이 되었다.

여기 있는 작품들은 아주 화려하며 바로크 풍의 모자이크와 거대한 조각들은 ‘이 성당이 과연 가톨릭의 본산답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끔 한다.

























































바티칸시국

가톨릭교는 313년 콘스탄틴 대제의 밀라노칙령에 의하여 공인된 이래 영향력을 계속 확대하여,

1859년 교황이 이탈리아 중앙부를 중심으로 1만 8,000㎢에 달하는 지역과 300만 명 이상의 주민을 통치하기에 이르렀다.

러나 1859년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일으킨 빅토르 엠마누엘(Victor Emanuel)이 1870년 교황의 군대를 격파하고

로마시를 점령함으로써 교황의 세속적 권력행사는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이후 교황청과 이탈리아 간에는 교황청의 지위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에 관한 ‘로마문제(Questio Romana)’가 발생하였다.

이 문제는 1929년 2월 교황청과 이탈리아의 무솔리니(Mussolini, B.) 정부 사이에 라테란조약이 체결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기본협정·재정협정 및 종교협약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조약에 의하여, 가톨릭은 이탈리아 내에서 법률로 특권을 보장받는

국교로 공인되었고, 바티칸은 하나의 주권국가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로써 바티칸은 1929년 2월 11일 이탈리아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무솔리니 정권 때 체결된 라테란조약은 현시대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내용이 있으므로 이를 개정해야 한다는 이탈리아

내의 여론으로 인하여, 교황청과 이탈리아 정부 사이에 조약 개정을 위한 교섭이 1967년경부터 추진되어 오다가 1984년 2월

종교협약을 개정, 전문 16조의 새로운 협약이 체결되었다.

신협약으로 가톨릭은 이탈리아 국교로서 지위를 잃게 되었고, 공립학교에서의 종교교육제도가 폐지되는 등 이탈리아 내에서의

가톨릭 특전이 크게 축소되었다.

교황은 바티칸의 통치자일 뿐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 전 세계 교회에 대하여 직접적 통치권을 지닌다.

교황은 종신제이며, 현재의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는 2013년 3월 제266대 교황으로 즉위하였다.

세부 행정 등에 관한 사항은 국무성·성성(聖省)·사무국·법원 등으로 구성된 행정부(Roman Curia)에서 시행한다.

국무성의 책임자인 국무장관은 교황을 직접 보좌하는 가장 긴밀한 직책이고, 일반 국가의 수상급에 해당된다.

교황청 내의 방어와 질서는 약 100명의 스위스 경호대에 의하여 유지되며, 외곽 치안은 이탈리아경찰이 담당한다.

바티칸은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보편적 평화의 추구, 국가와 교회간의 조화 및 협력추구를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외적으로 자유를 가장 선명히 표방하며, 선교활동의 자유보호를 위하여 종교의 박해에 대해서는 과감히 반대하고 있다.

1994년 말까지 149개국(EC 포함)과 공식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특히 1994년 6월 이스라엘과 10월에는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와

정식외교관계를 수립하기도 했다. 또한,

제3세계 발전기금의 설립을 호소하는 등 제3세계의 권익옹호를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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